(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은 누가 봐도 ‘승자독식’의 사회다. 시장의 경쟁은 치열하고 승자가 거의 모든 것을 가져간다. 우리나라는 소득상위 1%가 전체소득의 16.6%를 가져가는 나라로 미국의 17.7%에 이어 OECD 국가들 중에서 두 번째로 소득의 편중이 심한 나라다. 또, 우리나라는 소득상위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서 미국의 48%에 이어 OECD 국가들 중에서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이 두 번째로 높다. 노동자들 간의 소득격차도 엄청나게 크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노동자들 중 ‘소득하위 10% 대비 소득상위 10%’의 소득배율이 2-3배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의 5배나 된다. 이것도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을 빼고 정규직만을 계산한 것이다. 비정규직을 포함하면 비교 자체가 참담할 것이다.
승자독식의 격차사회가 초래된 이유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소득의 불평등이 이렇게 참담할 만큼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1995년만 해도 우리나라는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이 32%에 불과했다. 이는 현재 미국의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 48%보다는 오히려 북유럽의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 28%에 훨씬 더 가깝다. 지난 20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이 이렇게 심해졌을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시장과 경제의 ‘대책 없는 자유화’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시장과 경제에 대한 IMF와 미국의 자유화 요구가 거셌고, 산업화 성공 이후 관치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해법으로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가 국내의 재계와 학계에 의해서도 꾸준히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자유화의 바람은 당대의 내외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라는 승자독식 체제를 제도화화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논리적으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의 경험에서 보듯이,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래서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이라는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득의 불평등으로 인해 1930년대의 대공황을 초래했고 당대의 사람들을 불행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후 시장과 경제의 완전한 자유만을 강조하던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수정의 핵심은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자유화를 인정하면서도 자유화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불평등을 최소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시장과 경제의 ‘민주화’이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신속하게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새 시대로 이행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결과는 엄청나게 좋았다. 전후 25년 동안 인류는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보냈다.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그것이다. 연평균 경제성장률(4%)은 이전 시기의 두 배에 달했고, 복지와 분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의 비중이 1950년 5%에서 1980년 20%로 증가)는 제도적으로 모두에게 삶의 안전성과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의 거센 바람이 몰아쳤음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와 함께 ‘민주화’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효율성과 형평성을 함께 추구하는 보다 현대화된 복지국가 모델을 구축해왔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는 북유럽 국가들이고, 가장 실패한 나라는 미국(영국)이다. 영국과 미국은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에만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에만 집착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모범으로 삼았다. 미국과 IMF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시장과 경제를 모두 자유화했다. 첫째, 재벌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는 부자감세를 지난 20년 동안 줄기차게 추진했다. 그래서 정부의 재정능력은 줄었고 국가부채는 늘어난 반면, 재벌 대기업들은 감세 혜택으로 더 큰 자본을 축적했다. 둘째, 모든 종류의 규제를 완화했다. 금융규제의 완화는 물론이고 노동과 건강 관련 기업규제마저도 완화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살기에는 부적합한 나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시장만능과 경쟁만능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힘 있는 자가 승자가 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재벌 대기업은 경제력을 집중했고, 그 결과 경제와 산업은 물론이고 노동시장까지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가 양극화되고 말았다.
산업혁명 시기의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알려준 역사적 교훈은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는 반드시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 사조를 선도하며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를 이끌었던 미국과 영국은 이후 압도적으로 ‘불평등’이 증가했다. 이는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복지국가 정부를 통해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와 함께 ‘민주화’를 견지하고 보편적 복지를 제도화하면서 복지국가 노선을 지속적으로 현대화했던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비교적 ‘작은 불평등’과는 크게 대비된다. 결과적으로 현재 미국은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이 48%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승자독식 사회인데 비해,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이 28%에 그쳐 불평등이 훨씬 덜하다. 이는 전자는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만을 강조했고, 후자는 자유화와 함께 민주화를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불행한 대한민국, 누구의 책임인가?
저명한 정치철학자 롤스는 <정의론>에서 ‘자유권’만을 강조하는 사회질서는 정의로운 사회질서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권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의의 제1원칙’으로 삼아 최우선의 순위에 놓았지만, 시장의 자유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불평등 때문에 자유권만으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권(시장의 자유)이 초래하는 ‘불평등’을 최소화함으로써 이를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도록 하는 두 가지의 조건(정의의 제2원칙)을 함께 제시했다. 이것이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다. 이는 시장과 경제의 민주화 조치와 복지정책들(보편적 복지와 공공부조)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현존하는 국가들 중에서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가장 부합하는 나라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이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편에는 미국(영국)이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북유럽에 가까운가, 아니면 미국에 가까운가? 앞서 살펴본 양극화 통계로 보면, 후자가 정답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동안 양극화 성장을 해왔다.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사조가 이끄는 “작은 정부, 큰 시장” 체제 하에서 승자독식의 경제 질서를 구조화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양극화의 격차사회다. 롤스의 자유권이 설명하는 시장과 경제의 자유화는 최대한으로 보장되고 있지만,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했거나 제도화의 수준이 여전히 미약하다. 자유로운 경쟁의 전제조건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보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자 집에 태어났던 가난한 집에 태어났던 국가가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입법을 통해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을 제도화해야 한다. 원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재능)의 격차가 모든 것을 좌우하게끔 해서도 안 된다. 특정 재능만 우월하게 대접받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10%의 좋은 일자리와 90%의 나머지 일자리로 양극화된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승자독식 구조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격차사회에서 늘 불안하고 불행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선택을 했는가? 누가 북유럽의 스웨덴 같은 방식이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방식을 선택했는가?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자신은 그런 결정을 한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그런 결정을 직접 한 적이 없었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 그런 결정이 내려졌고, 그것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세 배나 늘었고, 출산율은 급감했고, 범죄율은 두 배나 늘었다.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경제사회적 생태계가 조성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던 그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의 여야 정치권이 그들이다. 여야 정치권은 지난 20년 동안 10년씩 번갈아가며 집권을 했고, 여야를 이루며 적대적 공생을 즐겨왔다.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는 시장과 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승자독식 체제를 구조화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시장과 경제는 ‘민주화 없는 방임적 자유화’를 통해 승자독식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정치는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통해 승자독식 체제를 구조화하고, 양당체제를 통해 적대적 공생을 해왔다. 자유화된 시장에서 경제 분야의 승자는 늘 재벌 대기업들과 이들의 경제 엘리트들이었다. 자유화된 시장과 마찬가지로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의 정치 시장에서도 승자는 늘 자유시장의 승자와 같은 편에 서서 승자독식을 경험했던 엘리트들이었다. 그래서 경제 분야의 승자와 정치 분야의 승자 간에는 친화성이 매우 강하다.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은 이렇게 자유시장의 승자들이 지배적 엘리트로서 경제와 정치의 모든 권력을 독점해온 배타적인 나라였고, 이런 구조적 한계 속에서 민생의 불안과 국민의 불행은 커져만 갔다.
승자독식의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해야
대다수 국민은 우리나라의 정치가 낡았다고 생각한다. 정치 전문가가 아니라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낡은 정치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영호남 지역주의 정치와 인물 중심의 패거리 정치가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정치풍토에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결과는 늘 동일하다. 언제나 실패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라는 선거제도는 늘 1등만을 요구한다. 2등은 필요 없다. 승자독식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 표라도 더 얻은 1등만 당선되고, 나머지 후보들의 모든 표는 죽은 표가 된다. 그래서 일부 유권자들의 의사만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되고 나머지 다수 유권자의 의사는 과소 대표된다. 이런 승자독식의 정치는 결과적으로 재벌 대기업과 경제 엘리트들의 의사를 과도하게 대의하고, 노동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의하지 못함으로써 경제와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격차사회가 지속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경제사회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구조적 한계와 결함을 가진 ‘절차적 민주주의’에 머물러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치의 승자독식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시장과 경제의 승자독식 구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다. 정치가 국민의 다양한 의사와 이해를 포용적으로 대의함으로써 다양성과 민주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게 된다면 시장과 경제 또한 그에 걸맞게 ‘자유화’와 함께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낡은 정치를 해체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나는 이것이 “역동적 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시대정신을 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승자독식의 낡은 정치를 국민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대의하고 조정하는 비례성 강한 다당제의 합의제 민주주의로 교체해야 한다. 기존의 낡은 기득권 연합적 정치질서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새로운 정치 에너지와 국민의 참여와 지지가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