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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
영적 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of spiritual liberty)...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선언문(Christi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종교개혁의 선전 포고(battle cry of the Reformation)...자유의 헌장(Charter of Freedom) - 이러한 말들은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묘사하는 데 붙여진 이름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썼기 때문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 저작에서 루터는 행위와 반대된 것으로서의 은혜와 믿음의 개념으로 이동해 갔으며, 또한 후에 개신교(protestantism)의 교리가 되었던 항변서(pro-test)를 확립했던 것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서신과 결혼한 사이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나의 아내 캐더린(Katherine Von Bara)이다”라고 했다. 루터에게 있어 갈라디아서는 그의 아내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루터는 그처럼 갈라디아서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가 쓴 갈라디아서 주석은 종교개혁의 선언문(the manifesto of the Reformation)이 되었던 것이다.
테니 박사(Dr. Merill Tenney)는 ”만약 갈라디아서가 씌어지지 않았었더라면, 기독교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종파로 머물렀을지도 모르며, 또한 서구 세계의 사상은 완전히 이교화(異敎化)됐을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갈라디아서의 멧세지는 해방(liberation)의 멧세지이다. 그것은 참된 자유의 멧세지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멧세지이다. 특히 갈라디아서는 오늘의 상황에 관련된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해방운동(liberarion movements)에 관한 논의들이 무수히 많다. 서구 사람들은 쉴 새없이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은 새 도덕(new morality)과 새 윤리(new ethics)에 관해 말한다. 언론의 자유, 행동의 자유, 사랑의 자유 및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라고 주장하는 그 어떠한 것도 결코 진정한 자유(genuine freedom)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그 자유는 여전히 포로된 상태에 놓여 있는 거짓 자유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자유를 구한다. 세상에는 참 자유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유에 이르는 그 길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있다. 그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사람은 결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와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한 가지 중요한 전제(前提) 곧, ”영적 자유는 진리를 통해 오며,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유의 본질이다. 사람은 죄의 종이요, 죄가 야기하는 싸움의 노예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때, 그는 그 진리를 찾게 되며, 또한 그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때에 비로소 자유를 향한 그의 추구는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거듭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에 사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는 바울이 세운 두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첫째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에 머무르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자유를 누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유에 관한 본 서신을 쓰게 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본 서신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남부 갈라디아에 몇몇 교회들을 설립했었다. 곧 주후 47년에 시작됐던 첫 전도 여행 중,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갈라디아라 불리우는 지역까지의 수백 마일을 여행했었다. 갈라디아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터어키의 일부로서 폭 160-280 km, 길이가 약 402 km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다니면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및 비시디아 안디옥 등의 갈라디아 주요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었다. 그 후, 그러한 지역을 다시금 차례로 되돌아보며, 그곳에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을 마친 다음,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교회로 돌아갔다.
그 후 주후 43년, 실라와 동행한 제2차 전도 여행 중, 그는 제 1차 전도 여행 중에 설립했던 교회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을 했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갈라디아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그들은 그에게 속한 바, 곧 믿음 안에서 낳은 그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두번째 방문 후 불과 얼마되지도 않아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추종하게 되었고 그 소식은 바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거짓 교사들은 세 가지 면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첫째로 그들은 바울의 사도 자격을 은밀히 파괴하였고 둘째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요구하였으며, 세째로 유대인의 모든 규례와 의식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중의 몇몇은 예루살렘 공의회로부터 왔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을는지도 모른다(행 15:1-5참조). 그들은 ”유대주의자들”(Judaizers)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다움”(Juewishness)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자들과 비교해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바울은 분명 「행위와는 상관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했으며, 또한 「의식과는 상관없는」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가르쳤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의 세 가지에 주안점을 두었다.
자신의 사도직과, 또 자신에게는 엄연히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말할 권리가 있음을 변호하는 일
은혜의 복음을 다시금 설명하는 일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일
이는 갈라디아서 전체 내용을 정확히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그의 사도직을 변호한다. 3장과 4장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오직 은혜뿐임을 확증하며 마지막으로, 5장과 6장에서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곧 은혜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를 가르친다.
자신의 편지를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의 이단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큰 일을 행했으니, 곧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자유의 헌장을 작성했던 것이다.
● 갈라디아서 1:1-10
1. 바울과 그의 복음
사도 바울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쓰든,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에 편지를 쓸 때에는 통상 긍정적인 자세로 그 서두를 시작하려 애썼다.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그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는 말로 시작했으며,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는 온 세상에 두루 알려지게 된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심지어는 그에게 숱한 걱정거리만을 안겨 주었던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조차도 그 서두를 긍정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밖에 그의 다른 서신들, 곧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 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대개 어떤 칭찬의 말과 함께 따스하고 정감어린 어투로 그 서두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의 통상의 편지 양식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 서두를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단지 문제의 본론으로 뛰어들어, 곧 바로 그 요점에 도달한다.
사실, 바울은 편지를 부드럽고 온화하게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대주의자들”이라 부르게 된 그룹이 어떤 잘못된 사상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갈라디아에 여러 개의 교회를 설립했었다. 그가 전파한 은혜의 복음이란 ”구원은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오며, 「그 외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서 믿는다”고 말했지만 구원의 필요 요건으로서, 그 어떤 것을 덧붙였으니, 곧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유대인의 모든 규례와 유전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를 덮고 있는 표피 일부분을 잘라 내는 작은 수술로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것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으셨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창세기 17장, 특히 11절 참조).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길 원했지만, 또한 유대주의의 낙인도 고수하기를 원하는 거짓(혹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대교화”하기를 원했으며, 또한 갈라디아 교회 내에 파괴와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특별히 겨냥한 표적은 이교의 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께 회심한 이방인들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떤 이방인 회심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갔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주장에 저항도 했지만, 그 힘은 극히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다.
자기가 맨처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한 바로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해 들었을 때, 바울은 분개하지 않을 수없었다. 갈라디아서는 ”번득이는 칼”이라고 불리워 오는데, 바울은 타는 듯한 정열과 영혼 깊숙한 데로부터 솟아오르는 강한 확신 속에서 그 칼을 휘둘렀다.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호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1-2).
바울은 붓을 들자마자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자신의 권위를 확증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는 앞으로 그가 1장과 2장에 걸쳐 매우 상세히 취급할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독자들에게 계속 환기시키는데, 이는 갈라디아인들이 마음 한 구석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도적 권위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고, 따라서 바울은 주도면밀하게 그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자신을 단지 ”바울”이라고만 소개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사도된 바울”(1절) 이라고 밝힌다. 자신이 사도인 것을 왜 그토록 강조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사도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도를 자처하는 하루살이가 아님을 바울은 처음부터 확실히 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직분은 신적 임명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의문을 일축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그가 논증해야 할 명제(thesis)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명확히 답변하는 것과 또한 그들이 품고 있던 그릇된 생각을 옳게 교정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 것은 사실상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위치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명칭을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에베소서 및 골로새서에서도 사용한다.
「사도」(apostle)라는 용어는 ”특사, 대리자, 혹은 대사”라는 뜻을 가진다. 유대인에게 있어 매우 친숙했던 이 용어는 특별한 사자(使者 : emissary), 곧 자신에게 임무를 맡긴 자를 대신해 행동하도록 합법적 권위를 부여받아 파송된 자를 가리킨다. 누가복음 6장 1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대신하여 행동하라”고 분부하셨다.
바울은 사실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이 참 사도인 것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으며, 그런 이유로 자신의 사도직을 자주 반복하여 변호한다. 고린도전서 15장 5, 8절에서 그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같이 자기도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노라고 역설한다.
과연 바울이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된 것과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다메섹에 머물렀던 것 및 다시 보게 된 후 그 곳에서 예수를 전파했던 것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바울의 눈이 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때에 그가 눈이 멀게 된 것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바울은 특별히 사도로 택함받는 은총을 누리게 되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 곧 열 두제자와 한가지로 그 역시 ”사도”의 직임을 부여받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召命)이 결코 인간에게서 온 것이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임명을 받은 사도이다. 따라서 그는 개인이나,교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임명받은 자로서 본 서신을 기록한다.
2절에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를 언급하여 자신이 현재 머물러 있는 곳의 신자들 모임에서도 자신을 사도로 인정했으며, 또한 그가 사도인 것이 입증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 점은 갈라디아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곧,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이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그의 사도직이 인정되고, 또한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사도적 사역에 협력하고 있다는 암시는 갈라디아인들 가운데 있는 의문과 또 신앙의 혼돈을 제거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이처럼 바울이 주도면밀하게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은 그의 사도직이 곧 그의 가르침의 신빙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즉,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에서 행한 그의 사역이 헛되며, 또한 그 사역의 핵심으로서의 신자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복음까지도 거짓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그의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나 갈라디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멧세지와 그의 사역의 동기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3-5).
바울은 이 단 두 구절에서 그의 멧세지를 확립하고, 또한 복음 전체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3절에서 그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문안한다. 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와 같은 통상적인 인사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은혜는 평강을 낳는다. 은혜는 위치적인(positional)것이요, 평강은 실제적인(practcal) 것으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고 곧 그것의 핵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세 가지 국면,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 죽음의 목적, 죽음의 기원(起源)으로 복음을 논증한다.
예수께서는 좌절감에 빠진 슈퍼스타로서 죽지 않으셨다. 어떤 대의(大義) 를 위한 자기 희생의 전형(典型)으로서 죽으신 것도 아니다.심지어 그분의 죽음은 사랑의 행위만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희생 제사였다. 물론 그분의 죽음에 사랑이 내포된 것은 사실이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희생 제사였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것이다(고후 5:21 참조).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분의 죽음의 본질이 희생 제사라면, 그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실제 행위(rescue operation)라 할 수 있다. 「건져 내신다」(deliver)는 말은 ”구조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사도행전 7장 10절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서 사용된다. 요셉은 종으로 팔렸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가 겪는 모든 환란 가운데서 그를 「건져 내셨던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현재의 ”이 악한 세대”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한다. ”이 악한 세대”라는 용어는 지금의 일시적인 세대, 곧 사단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재의 무가치하고 소멸 중에 있는 체계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현재의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받게 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세상 밖의 다른 세상에 따로 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세상 안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세상의 것이 아니요」 그것의 체계 안에 갇혀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원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마 26:39/행 2:22, 23 참조).예수께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버지의 계획임을 인식하고 계셨다(12:27-32/ 18:10, 11/ 19:10, 11 참조). 그것은 결코 돌발적인 사고나 계획의 실패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이다.
1-4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멧세지와 그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에의 서론 부분을 살펴보았다. 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의 삶의 동기를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그 모든 것, 내가 살며 행하는 그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한 그의 삶의 동기는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철저히 실현된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지고(至高)한 삶의 목적이었다.
거짓 교사들을 향한 저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복음의 이 중대성에 비춰볼 때,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에서 이탈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들이 너무 쉽게 흔들리고 마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으며,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복음을 혼돈케 하고 왜곡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에 몹시 격분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당하게 변질시키는 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확언하면서 그 사실을 두 차례씩이나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위의 6-9절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저주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어떤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그분에 의해 파멸되도록 작정된 것이 있다.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모두 ”저주받는 자나 물건”을 의미하는 「아나테마」1)(anathema)로 표현된다.
1)이는 또한 파멸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역한글성경의 갈라디아서 1장 8, 9절에서는 이 「아나테마」가 ”저주를 받는다”는 뜻으로 번역됐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미 파멸되기로 작정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를 다루어 온 역사를 살펴볼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파멸에 빠지도록 작정하신 어떤 것이 있음을 보게 된다.
여호수아를 일례(一例)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모세(Moses)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그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책임을 부여받았다.백성들이 여리고 성 앞에 섰을 때 여호수아는 그들을 향하여하나님께로부터의 멧세지를 전달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수 6:17, 18)2)
2)여기서 「바친다」는 표현은 흠정역에서는 모두 ”accursed-저주받는다”로 번역했고 칠십인역에서도 이는 ”anathema-아나테마”를 사용하고 있다-역자 주.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저주하고 계셨다. 그분은 여리고가 멸망되도록 작정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백성들은 여리고가 제 운명대로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기고 ”멸망당하도록 작정된 것들”을 취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그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수 7:19 이하 참조).
신약에서 하나님은 특히 거짓 교사들을 저주하신다. 거짓 교사는 악의와 속임수에 가득한 자이다. 곧 그는 마귀의 자녀요, 의의 적이며, 또한 주님의 곧은 길을 굽게 하는 자이다.
사단은 주로 거짓 교리의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사단을 규정하시기를 ”거짓의 아비”라고 단순하고도 날카로운 어조로 말씀하셨다(요 8:44). 사단은 혼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곧 그는 거짓말하는 영들, 즉 귀신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거느리며 활동한다. 그들은 통상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통상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한다. 사단의 교활함이 바로 그 점에 있다. 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서는 그 진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지극히 영적인 모습을 입고 나타나서 활동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나는 사단이 술집이나 안마 시술소 혹은 외설서적, 「플레이보이」와 같은 도색 잡지의 판매를 부추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사단의 부추김이 없더라도 우리의 육신의 정욕(요일 2:16)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단이 거짓 종교 체계, 특히 기독교의 구조 안에 있는 체계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일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믿는다. 20세기에 이르러 사단은 다양한 형태의 사이비 종교와 자유주의(li-beralism) 및 현대주의를 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최근에는 신비주의자들과 동방 종교들이 그의 강력한 하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단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그가 목적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거짓 종교 교사들을 이용한다.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로 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모든 거짓 교사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구원의 교리를 공략하는 데 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를 흐리게 하는 것으로서, 모든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공략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바울의 멧세지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유대주의자들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바울의 멧세지를 손상시키려 얼마나 애썼던가를 보게 된다.
6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자기가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복음을 떠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6절에서 「떠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이탈한다”(to defect)는 뜻을 가진다. 이는 통상 변절자를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렇게 빨리 영적 변절자들이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맞서서 싸우려 하지도 않고 쉽사리 그들을 좇아가고 만 갈라디아인들도 용서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았으며, 사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한다(6, 7절).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은 이른 바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을 그 내용으로 삼는 바울의 복음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들려졌기」때문이다. 즉,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알맹이는 그대로 놔둔 채 다만 그 처음과 끝 부분에 각각 할례와 유대인의 규례를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규례를 준수해야 되는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는 사단이 얼마나 교활한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의 그 어떠한 복음도 결코 복음일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한 자들의 거짓 술책일 뿐이다.
8, 9절에서 우리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엄중한 경고를 본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이 전한 이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바울 자신이든지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경계하기를, 어떤 사람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오면, 그를 집 안에 들이지도 말며, 또한 그에게 인사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다(요이 10, 11절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시기를, 거짓 교사들에게서 떠나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들에게 속하지 말라고 하신다.
바울의 근본적 삶의 목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였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대중적인 인기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러한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10절 초두의 ”왜냐하면”(for)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가르」(gar)3)에 해당한다.
3)gar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의 접속사로서 그것이 속해 있는 문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for' 등으로 빠짐없이 번역하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문맥상 이 단어의 번역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독자들은 갈라디아 1장 10절의 초두에 본래 이 「가르」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바란다-역자 주.
그런데, 이 「가르」라는 단어는 그 용례(用例)가 다양하므로, 그 문맥에 따라 ”실로”(yes, indeed), ”확실히”(certinly)로 번역될 수도 있고 혹은 감탄사로서 번역되기도 한다. 아마도 여기 본문에서 사용된 「가르」의 가장 적합한 의미는 ”자, 봐라!”(there)가 될 것이다.
바울은 묻기를, ”자, 봐라 ! 내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그 같은 저주의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께 위탁되었음을 재차 설명한다. ”너희는 내가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감당해 오는 중 사람의 기쁨을 구하려 했기에 그 모든 고난과 고통과 괴로움을 달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에 대해서갈라디아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행 14:1-20).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그가 갈라디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던가를 환기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 까닭은, 만약 그들이 갈라디아에서의 그의 삶을 기억한다면, 필경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그들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거나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말하거나 행동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근본적인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뿐이었다.
● 갈라디아서 1:11-24
2. 외곬의 사람, 바울
바울이야말로 실로 외곬(single minded)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을 믿든지 자기가 믿는 바대로 철저히 살았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그 당시의 이름은 사울)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그 자신을 묘사하기를,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5)라고 말한다.
그렇게 전통적인 율법주의자로 부상하던 시절, 그는 당대 바리새인중의 대가인 가말리엘 문하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율법의 아주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라도 준행하는 성실한 바리새인이었다. 종종 우리는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들로만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가식이나 위선의 탈로 위장하지 않았었다. 그는 율법주의, 즉 바리새적인 율법 개념에 전적으로 매여 지냈던 인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주의의 척추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사랑했으며, 그것을 암송하고 준행하는 일에 신명을 다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율법의 골수분자라 할만큼 철저히 훈련받은 그 율법주의자는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권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로부터 은혜의 복음으로 사람을 그토록 급격히 변화시키는 데에는 기적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바울은 율법 아래 매인 삶과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한 자로서 자유의 헌장(憲章)인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다. 회심 이후, 그는 은혜의 투사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은혜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갖게 된 탓이었다.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 있던 삶과의 대조를 통하여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의 실재를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1-14).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근원은 유대주의자들의 멧세지에 비해 훨씬 더 월등한 것임을 알게 한다. 바울의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11절). 그는 유대주의자들처럼 사람들의 전통으로부터 복음을 입수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자신의 멧세지를 부여받았던 것이다(12절).
바울은 전통적인 종교에 속하는 사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속한 사도조차도 아니었다. 오직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셨으며 또한 사도로 위임하신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서 성경의 권위 문제와도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순복시켜야 한다.
나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그 부분만을 빨간 글씨로 인쇄한 성경을 갖고 다니는 어떤 이를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이 성경 중에 빨간 글씨로 인쇄된 부분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리스도에서 하신 말씀이거든요”라고 했다.
그는 잘못됐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검정 글씨로 인쇄된 부분이 바울에 의해 씌어졌든, 베드로에 의해 씌어졌든, 혹은 그외 다른 사람에 의해 씌어졌든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빨간 글씨 부분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말 역시 그분 자신의 말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의 가르침은 대부분 전통, 곧 구전(口傳)에 의해 전달된 정보(information)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전통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하는 것같이 나의 복음을 받지 않았다”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교사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면, 학생은 그들은 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소위 랍비식(rabbinic)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정보가 그리스도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임을 밝힘으로써 유대인의 통상적인 학습 방법을 전면 거부한다.
바울은 구원받기 이전부터 복음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또한 그분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렇게 증오했던 복음을 이제는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증거되다시피 그러한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그를 변화시키기에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다메섹도상에서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13, 14절에서 바울은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은혜를 깨달을 길이 없었다. 그는 복음의 개념, 즉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증오했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만 보면 핍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은혜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행위없는 구원을 그토록 증오했던 그가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탈바꿈된 것이었다.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의 체험은 그가 전하는 멧세지의 근원이 결코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설득으로는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광신적(狂信的)이며 율법주의적인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를 은혜의 전파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를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를 혐오하던 자를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흥미진진한 사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15, 16절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멧세지가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회심을 체험하기 전, 즉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기 전까지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기로 하신 것, 그것이 바로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를 변화시키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바울이 잉태될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성별(聖別)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사도가 되도록 택함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침례) 요한(눅 1:13-17 참조)을 위시하여 다른 여러 일꾼들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그분이 계획해 놓으신 대로 한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택정”하셨다. 바울은 구원받기 위하여 아무 일도,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그의 눈이 멀 정도의 영광 가운데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심으로써 그는 예수님과 일 대 일로 대면하게 되었다(행 3:1-21 / 26:1-18 참조).
16절의 ”그 아들을...내 속에 나타내시기...”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의도를 엿본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가운데 계신 자신의 모습을 최초로 바울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그리고 바울의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의 충만한 아름다우심은 줄곧 그에게, 그리고 그를 통하여 펼쳐져 보이게 되었다. 바울을 향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의 회심에서 시작되었다가 이내 끝나 버린이 아니다. 노정(路程)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출발점이었다. 바울은 계시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에 관해 더욱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데 그의 여생을 바쳤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에의 부르심(a call to salvation)과 섬김에의 부르심(a call to service)을 동시에 주셨다고 한다(행 26:15-18 참조). 그리스도인은 모두 섬기기 위하여 구원받는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부르심이어서, 그는 구원받자마자 곧 섬기기를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갓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당신은 구원받았으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가르침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새 신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정상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하셨고 바울에게도 매우 특별한 일을 맡기셨다. 바울은 회심과 동시에 사도로 부르심받아 그 사역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16하반절에서 바울이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은, 자신은 자신의 사도직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충족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지식과 사도직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었다. 그에게는 인간 교사들의 어떤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는 「회심 이후 즉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벌써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을 당황시킬만큼 매우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었다(행 9:19-22 참조).
사도행전 9장 23절은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모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헬라어에서 ”여러 날”이라는 구절은 2, 3년 동안의 긴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1)
1)emerai ikanai를 직역하면 '여러 날'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형용사 ikanai는 su-fficent, great, long등의 뜻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긴 기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며칠”이나 ”2, 3일”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역자 주.
갈라디아서 1장 17절과 사도행전 9장의 내용을 종합하여 바울의 노정을 유추해 볼 때, 바울은 회심 직후 다메섹에 잠시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전파한 후 곧장 아라비아[오늘날의 아라비아가 아니라 신약시대 당시의 나바티안 아라비아(Nabatean Arabia)로 알려진 지역]로 떠났다. 나바티안 아라비아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지역으로서, 다메섹도 그곳에 속해 있었으므로 바울은 아마도 다메섹을 벗어나 그 근처의 어떤 광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을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는 다메섹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되었는데,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 지적된 바와 같이 바울은 이 기간, 곧 회심 직후 다메섹 회당에서 처음 설교를 마치고 아라비아에 가서 머물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서 ”그 후 삼 년만에”라고 밝혔다.
삼 년만에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라비아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자신을 성찰(省察)하며 성령께로부터 교훈을 받는 일에 진력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일이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받은 핍박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32절을 보면, 아라비아의 왕 아레다2)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2)아레다 왕은 다메섹 동남 아라비아지방을 48년간이나 통치했던 아레다 4세를 가리킨다. 그의 수도는 페트라였고, 다메섹은 로마 황제 갈리굴라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였다. 그는 다메섹에 자신의 방백을 두어 다스리게 했는데, 아마도 바울은 이 아레다 왕의 통치 영역인 다메섹 근처의 어느 광야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역자 주.
아레다 왕은 바울이 그 삼 년동안 자신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다닌 일에 분격하였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다메섹에서의 핍박이 시작되었거나 점차 확대되었던 것 같다.
바울의 맹세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갈 1:18-20).
다메섹과 그 근방에서 삼 년을 지낸 후, 바울은 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18절). 거기서, 그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다(19절).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 보려 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자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울은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들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전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의 동생인 야고보를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야고보는 예수에 관해 베드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예수에 관해 개인적인 지식을 갖기 원했고, 그래서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시간을 같이 보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이 단지 l5일 뿐이었음을 강조하는 데 주목하라. 그가 굳이 그 기간을 명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임명에 근거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확언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15일이라는 기간은 사도적 교리를 가르침 받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바울은 그런 종류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다른 사도들의 위촉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과 사도의 신임장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라고 말하는데, 전형적인 유대의 풍습에 의할 때 이러한 방식은 「매우 극단적이며 최종적인 단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이같은 표현을 거짓되이 함부로 쓴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자초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었다.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을 향해 바울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유대의 풍습에 의할 때 최상급의 법정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그 권위를 변호함으로써 그것을 갈라디아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직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 1:21-24).
21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던 사실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의 고향 땅으로서, 그는 그곳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바울은 그곳 다소에 여러 해를 머물면서 교회들을 설립했었다.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그 지역에는 다른 사도들이 전혀 없었다.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등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바울이 가진 유일한 관계는 22-24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바울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었다. 그것은 전에 그토록 교회를 핍박하던 그가 이제는 놀랍게도 은혜를 전파하는 권능의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멧세지가 진리인 것을 인지(認知)했으며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대하여 주님께 찬양을 돌리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강력한 논증을 마무리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칠 권위를 가진 완전한 사도임을 주장하는 데 있어 그 근거로써 신적인 임명을 내세웠다. 실제로 그가 회심하게 된 배경 및 그의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그리고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그를 사도로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그 사실은 명백히 입증된다. 바울은 결코 그 어떤 사도의 문하에도 속해 있지 않았지만, 사도로서의 그의 지식과 권위는 다른 사도들의 것과 동일하였다.외곬의 바리새인이었던 그 사울은 이제 외곬의 사도인 바울로 탈바꿈되었다. 그를 변화시킨 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가르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