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듯 파란하늘에 한 폭의 그림처럼 밀려드는 새털구름의 향연이 아름다운 전율을 선사한다. 따스한 가을의 햇살이 가득한 거제의 해벽을 찾아가는 길에 방해꾼이라면 바람뿐이다. 그런데 그 바람의 정도가 좀 심하다. 섬사나이들도 고개를 흔드는 강풍은 포구 밖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상선을 흔들 정도다. 당연히 수평선 끝에서 밀려들어온 거대한 파도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를 뒤덮는다.
특별기획 <산이 있는 섬>의 첫 테이프를 끊는 거제도 취재에는 특별히 거제도내 산악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해오던 ‘우정알파인클럽’의 정예 멤버들이 동행하기로 했다. 거제도 옥포에 위치해 있는 대우조선해양(주)의 직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우정알파인클럽은 1999년 통영시 광도면 쌍사바위 개척을 시작으로 거제시 일운면 망치리의 애바위 개척과 거제도 지형의 축을 이루고 있는 거제지맥을 완성시킨 왕성한 활동력의 산악회다.
거제시산악연맹(회장 김만승)에서 전무이사로 봉사하고 있는 김상철(47세) 회장을 비롯해 이명용(41세) 전 사무국장, 박유재(39세) 사무국장, 김권호(36세) 총무, 송광록(29세) 기술팀장, 김성주(28세), 임준철(41세) 회원 등 이날 취재에 동행한 회원들은 해마다 거제시산악연맹이 주관하는 거제시민등반대회, 스포츠클라이밍대회와 장애인 등반대회 등 거제시산악연맹의 ‘산악봉사 프로젝트’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주역들이다.
거대한 바다를 품고 있는 작은 바위 옥명 해벽에 도착하자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파란 하늘로 향해 정수리를 치켜세운 수직의 벽에는 등반 시 활용할 볼트나 확보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인즉, 어느 날 확보용으로 박아 놓은 볼트에서 흘러나온 녹물이 자연환경을 훼손했다며 고발장을 낸 환경단체와 마찰이 있어 볼트를 제거했다는 설명이다. 자연 훼손의 주범은 오히려 의식 없이 온 바닷가를 설치고 다니는 몇 낚시꾼들과 행락객들인데, 이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치우는데 이골이 날 정도로 환경보호에 앞장섰던 자신들을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고 가니 홧김에 뽑아버린 것이란다.
벽 위로 올라가 슬링을 이용하여 톱 로프를 설치한 후 등반에 들어갔다. 등반은 가늘게 형성된 크랙을 따라 오른다. 작지만 고난이도의 근력과 기술을 요하는 스포츠형 루트들이다. 옥명해벽의 좌측 섹터에 해당하는 삼각뿔 형태의 작은 벽에는 세 개의 길이 있는데, 중앙의 5.10급 루트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5.9급과 5.11급의 루트가 하나씩 개척되어 있었다.
등반길이가 채 10미터도 안되니 요즘추세로 하면 볼더(boulder)라 해도 무리는 없을듯하지만 그냥 오르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니 반드시 로프를 사용해야할 것 같다. 이명용 회원의 몸 풀이가 끝나자 차례대로 벽에 붙는다. 흩날리는 머리에 빨간색 두건을 두른 김 회장도 벽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의 항해를 시도한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우정알파인클럽 회원들이 바위 오르기 삼매경! 그 중력을 거부하려는 우주적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바람은 자신의 기세를 꺾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몰아쓰려는 역사(力士)의 표호처럼 파도에 기(氣)를 세우고 해벽을 향해 돌진한다. 태풍 같은 큰 바람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곳에도 간간히 거대한 파도가 내 던지는 바닷물 벼락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옆이 아닌 위에서 쏟아지는 벼락이니 대책이 없는 듯하다. 바닷물에 흠뻑 젖기를 여러 차례, 취재진은 일정을 악간 앞당겨 일운면 망치리에 있는 애바위로 등반지를 바꾸기로 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거제의 벽은 애바위와 옥명해벽
거제도에서 자란 바다장어로 바람에 빼앗긴 기운을 충전한 취재진은 일명 ‘달뜬 바위’라 불리는 애바위를 향해 차를 몰았다. 거제의 절경 해금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애바위는 거제도 남쪽의 절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어프로치는 구조라 해수욕장을 지나 왼쪽 갈림길을 따라 2킬로미터쯤 가다 고갯마루에 있는 작은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애바위 표지판을 따라서 10분쯤 오르니 절리 현상이 뚜렷한 검은색 벽이 나타났다. 수직의 벽에 간혹 오버행 턱이 형성되어 있다.
2001년 개척된 애바위 루트들은 대부분 50여 미터를 넘어선다. 때문에 두 피치로 나누어 정상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첫피치가 끝나는 25미터 지점에는 자연스럽게 테라스가 형성되어 있다. 벽 중앙에 위치한 우정(5.10b)길을 중심으로 우벽과 좌벽에는 총 11개의 루트들이 개척되어 있으며, 대부분 완력과 기술을 요하는 페이스등반 루트들이다.
여기서도 날쌔게 등반준비를 끝낸 이명용씨가 먼저 땡초(5.11a)에 붙었다. 옥명 해벽과는 비교가 안 되는 높이에 품까지 너르니 모두들 오름짓을 시작한다. 김상철회장과 송광록씨가 실버B(5.8)와 우정(5.10b)에서 ‘출발’을 외쳤다. 90도에서 110도에 이르는 수직의 벽이지만 절리 현상으로 갈라진 바위틈이 잡기와 딛기가 양호한 홀드들을 제공하니 대부분의 루트들이 5.8에서 5.10급의 난이도를 보인다. 초중급 클라이머들에게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첫 피치를 오르니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구조라 해수욕장에서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해안가에는 파도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이 선명한 선을 그으니, 내도와 외도 등 거제의 절경들이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어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다. 벽에 확보한 상태에서도 서 있기가 불편할 정도다. 벽을 오르랴, 바람 때문에 무너지는 균형을 유지하랴, 참으로 수난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모두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하니 천상 바위꾼들이다.
모두들 한 피치씩 등반을 마칠 즈음 가을의 짧아진 해가 서쪽 수평선을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애바위의 중앙벽에도 그늘이 든다. 취재진은 서둘러 촬영을 마치기로 했다. 두 번째 피치 등반을 마친 이명용씨를 제외하곤 첫 피치에서 등반을 접었다. 그리고 정상으로 올라갔던 이명용씨 조가 하강을 마치자 산이 있는 섬 거제도에서의 등반 취재가 막을 내렸다.
거제의 산 사나이들의 도전과 애환이 서려 있는 옥명해벽과 애바위를 취재한 하루는 뜻 깊은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거제는 세계 제일의 조선소 대우해양(주)을 비롯해 삼성중공업 등 굴지의 조선소들이 즐비한 해양대국 대한민국의 심장이 아닌가. 여기서 묵묵히 산악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는 이들의 꿈은 그러기에 이미 거제의 산과 벽을 넘어서 알피니즘의 고향인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넘나들고 있었다.
옥포의 한 횟집, 가을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쏟아내는 열정의 소리를 들으면서 거친 바위를 항해하는 바위꾼들의 선택과 집중의 힘에 동감을 한다. 척박한 땅에서 세계 제일을 일구어낸 역사(役事)에 동참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거제의 산과 바위에서 세계를 꿈꾸는 그들의 선진적 의식이야말로 그 알피니즘의 신봉자들로서 가장 소중한 꿈의 원천인 것이리라.
진정한 글로벌리즘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개척할 세계를 바라다보는 앞선 시각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