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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紅巾賊-亂) 중국 중원(中原)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元)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漢)민족 왕조인 명(明)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종교적 농민반란. 그 중심세력은 백련(白蓮)·미륵(彌勒)교도로서 붉은 천조각으로 머리를 싸매어 동지의 표지로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이라고도 하였다. 원나라 조정의 압제하에서 허베이성[河北省]에 본거를 둔 비밀종교결사 백련교회의 두령 한산동(韓山童)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彌勒佛下生)의 설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여 허베이·허난[河南]·안후이[安徽] 등 각지에서 널리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때마침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허강 수리를 위하여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생긴 민심의 동요를 틈타서 ‘송나라 휘종(宋徽宗) 8세(世)의 손자’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적은 최초의 탄압으로 교주 한산동이 전사하였으나, 교도 유복통(劉福通) 등은 그의 아들 임아(林兒)를 받들고 안후이성을 빠져나와 그를 제위에 올려서 송국(宋國)을 세우고 원나라 타도의 격문을 사방에 띄웠다. 이를 계기로 후베이[湖北]의 서수휘(徐壽輝),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주원장(朱元璋) 등과, 허난지방의 농민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적의 세력은 일시 화북(華北)·화중(華中) 일대에 미쳤으나, 내부분열로 인하여 통일정권을 이룩하지 못한 채 원군(元軍)에게 쫓기고, 또 만주로 진출하여 2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격파당해 괴멸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원장만이 착실하게 지반을 닦아서 천하를 평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명나라를 세운다. 【고려 침입】 만주로 진출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쫓기게 된 홍건적은 퇴로(退路)를 한반도로 잡아 1359년(공민왕 8)에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해 12월 홍건적의 장군 모거경(毛居敬) 등은 4만의 무리를 이끌고 결빙된 압록강을 건너 일거에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철주(鐵州)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이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편장(偏將) 이방실(李芳實), 안주만호(安州萬戶) 안우(安佑)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다시 고려군의 추격을 받고 궤멸되어 겨우 잔병 300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 후 홍건적들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다시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10여 만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였다. 홍건적이 절령(岊嶺:자비령慈悲嶺)의 방책(防柵)을 깨뜨리고 개경(開京)으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민왕은 남으로 난을 피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이방실, 상원수 안우 등이 홍건적과 대적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여 개경은 이들의 손에 함락되었다. 홍건적은 이후 수개월 동안 개경을 중심으로 머물면서 잔학한 짓을 자행하고 그 일부는 인근의 주현(州縣)과 원주(原州)·안주(安州) 등지까지 침탈하였다. 이 해 12월 복주(福州:安東)에 다다른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으로써 총병관(摠兵官)을 삼아 홍건적 토벌의 명을 내렸다. 1362년 1월이 되자 총병관 정세운은 이방실·안우·김득배(金得培) 등 원수(元帥) 등과 함께 군을 수습,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개경을 수복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東北面)의 상만호(上萬戶)이던 이성계(李成桂)는 휘하의 2,000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목베는 등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중국 직례지(直隷地)에서 일어나 만주에 진출한 홍건적은 고려에 대한 2차의 침공으로 오히려 고려에 의해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려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