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 아삭 상큼한 겉절이? 새콤하게 익은 김장 김치? 그대는 어떤 김치를 좋아하는가?"
나는 겉절이가 좋다. 밭으로 돌아 갈 것 같은 배추의 싱싱함과 아삭함, 맛있는 것은 죄다 넣은 듯한 매콤 달콤한 양념. 하지만 이런 나의 김치에 대한 기호는 진정한 한국인이 아닌 양 무시당하기도 한다.
"넌 어떻게 안 익은 김치를 좋아하니? 익어서 새콤하게 된 거 아니면 난 먹지도 않는다 야."
시어머님의 말씀이다. 지난 19년 동안 '너는 겉절이를 좋아하는구나.' 한 마디를 안 하신다. 이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쌓이니, 겉절이 따위를 좋아하며 익은 김치를 제대로 먹을 줄을 모르는 가짜 한국인으로 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확대해석이겠만 말이다.
전에 사회 초년생 때 동료 직원 한 명은 자기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회사 식당에서 김치를 아예 받아오지 않았다. 나도 별로 김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으레 먹는 음식이라고 했기에 꾸준하게 몇 년 동안 입에 대지 않는 그의 일관된 모습을 보며 잔잔한 충격을 받았다. 밥에 김치 하나만이라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우리 시어머니가 보면 기함할 노릇이다. 덕분에 곰곰 생각을 해보았다. 흠, 나도 김치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한번 안 먹어봐? 그리고는 식판에 받아오지 않는 것을 따라해 보았다. 비록 1개월 정도였지만 한국에서는 당장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환경이라 그런지 절박함이 없어 실천하기 쉬웠다. 이건 내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실험이기도 했다. 외국인이 김치를 기피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김치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에게 있다. 일종의 문화 권력이다.
어렸을 때 김치를 생각하며 떠오르는 것은 엄마가 배춧잎을 큰 다라이에 칼로 툭툭 쳐서 넣고 절이고, 양념하는 모습이다. 김장하는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경험했을 텐데 말이다. 힘든 일이라고 엄마가 열외를 시켜주신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십수 년 전에 엄마가 오른 팔에 골절상을 입고 큰 수술을 하시게 되어 대신 김장을 해본 적이 있다. 결혼한 지 그래도 몇 년 차였지만 내가 음식을 뭘 얼마나 해보았겠는가? 해 봤자 아이들 이유식, 오징어덮밥 정도 인터넷 레시피를 따라 더듬더듬 한 게 다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용기백배하여 엄마가 말씀하시고 그걸 따라하면 될 줄 알았다. 배추 30포기 정도는 할 수 있겠거니 했다. 엄마는 혼자서도 하시는데 난 엄마보다 힘이 세고 결혼 후 한 해도 빠짐 없이 김장을 해왔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생배추를 3층까지 끌어올려 겉의 잎을 떼고 가르고, 절이고, 뒤집고, 이미 거기서부터 멘탈이 나가기 시작했다. 허리는 이미 만신창이다. 갓이니 쪽파니 다듬어야 하는 재료들은 얼마나 많은가? 팔뚝보다 커다랗고 손으로 잡히지도 않는 무는 어찌나 무거운지.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무를 채 치고 양념 재료들을 넣어 훌훌 섞었다. 제법 김장의 모양새가 나긴 했지만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스칠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바지 츄리닝은 있는 대로 구겨지고 여기저기 빨간 양념이 묻었다. 이걸 엄마는 혼자 어떻게 하신 거지? 수심 년 김장 경력의 할매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뀔 일이다. 아, 남동생이나 남편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왔어야 했는데. 아뿔싸 평일의 김장이여.
시댁에서 김장할 때는 배추를 절이긴 했으나 무와 갓을 씻을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을 넣는 일은 찬찬히 오래 걸리긴 했지만, 가장 쉬운 일이로구나. 30포기에 달려든 나는 교만했고 결국 몸져누웠다.
어머님은 매년 김장 끝에 내년에는 네가 김장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 하셨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 말씀도 안 하신다. 매번 김장 때마다 가까이 살며 아이의 돌봄과 먹을 것을 챙김받으면서도 김장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누이 때문일까? 세대가 넘어가며 주변에서 김장을 더 이상 안하는 걸 보신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김장을 주도해서 직접 한다는 나와 비슷한 연령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전무하다. 다 해놓은 것을 받아온다는 사람도 많고, 김치 속 넣는 것 정도 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 학부모회 활동을 하며 김치 선정회를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공장 김치가 어찌나 맛있던지. 시식이 끝나고 봉지에 조금 담아 준 김치, 깍두기는 새로운 김치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겉절이와 비슷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인가? 공장 김치의 많은 문제를 뉴스를 통해 들었지만 학교에 납품하는 김치는 그래도 믿을만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업체를 검색하고 몇 가지 김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아직 결제하지는 않았으나.
올해도 시누이는 김치속 넣는 것을 한 시간 정도 하다가 아이의 주말 스케이트 클래스, 과학 클래스 라이딩을 해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이 장면도 이제 곧 안녕이다. 난 김장을 안 할 거니까.
첫댓글 와, 은중 샘. 진짜 용감하셨네요! 처음부터 홀홀단신 30포기 절이기에 도전하시다니!!!
나홀로 김장 스토리가 생생함 그 자체입니다. "아뿔싸, 평일의 김장이여" 👍👍👍
하하하 은중샘 완전 재밌어요. 그야말로 좌충우돌이네요. 김장... 할 이야기가 많죠. 할 이야기가 많은 시대도 얼마 안 남았을까요? 한 시대가 가네요~
김장 얘기는 정말 할 말이 많죠.
마지막에 난 김장을 안 할 거니까~ 하하하 뭔가 계속 남네요!
은중샘 글은 늘 그림처럼 묘사하시는 게 너무 신기해요. 생애 첫 홀로 김장에 만신창이 된 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네요..ㅋㅋ
생 김치보단 볶음 김치, 김치찌개를 좋아했는데, 이젠 뭐든 김치는 다 좋네요..^^;;
요즘 맛 좋은 김치 얼마나 많은데요. 저흰 사 먹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