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했지만
사람들의 죄악은 끝나지 않았다.
바빌론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는
폐허 속에 남은 사람들을 모아
어떻게든 다시 살아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다랴를 왕족 출신 이스마엘이 살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을 찾아오던 사람들까지
무참하게 죽인다.
그토록 처참하게 나라가 망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과 욕망을 좇아
서로를 죽이고 있다.
이 사건으로 남은 유다인들은
또 하나의 선택 앞에 놓인다.
바빌론이 임명한 총독과 군인들이 죽었으니
바빌론의 보복이 두렵다.
이집트로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유다에 남을 것인가.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했다.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라.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빌론 왕을 두려워하지 마라.”
문제는 이 말씀을 실제로 따르는 일이었다.
2.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눈앞에는 바빌론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이 있다.
내 감각도, 감정도, 상황 판단도
빨리 이집트로 도망가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볍게 읽을 수 없다.
사람은 상황과 감각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유용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가끔 인간의 감각은
너무나 확실하게 틀린 것을 맞다고 느끼게 한다.
공군 조종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조종사는 공간정위 상실에 빠질 수 있다.
비행기가 기울거나 심지어 뒤집혀 있는데도
자신은 정상적으로 비행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때 원칙은 분명하다.
내 감각을 믿지 말고 계기를 믿어라.
몸의 감각은 정상이라고 외치지만
계기가 기울었다고 말한다면
자기 감각에 반역해야 한다.
신앙도 그렇다.
눈앞의 상황과 위협,
내 감정과 경험과 관성이
하나의 방향을 너무나 확실하게 가리킬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반대편을 가리킨다면
감각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야 한다.
물론 이것을 말처럼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절망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절망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럼에도 감각이 언제나 진실의 최종 판정자는 아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절망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믿음은
감각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감각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붙잡는 일이다.
3.
유다 사람들은 이미 한 번
비슷한 선택 앞에 섰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당장의 감각으로는 패배이고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장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비슷한 선택 앞에 선다.
42장에서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43장에서 태도가 돌변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
무서운 장면이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이미 결정한 뜻을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기를 원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한다.
먼저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답 안으로 끌어들인다.
하나님께서 내 감각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
‘하나님이라면 그럴 리 없다.’고 한다.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내 생각을 맞추어야 한다.
4.
그러나 여기에서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갈림길에서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고 선택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몫이다.
누군가 대신 선택해 줄 수 없다.
목회자도, 교회도,
어떤 권위자도
내 영혼의 마지막 선택권을 대신 행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목소리를 분별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신앙생활의 여러 항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삶과 선택을 지탱하는 생명의 토대이다.
하나님과 깊이 사귈수록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알아가고,
그만큼 내 욕망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별할 힘도 생긴다.
5.
유다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은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다.
43장에서는 아직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정도로 부정한다.
그런데 44장에 가면 훨씬 노골적이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메시지라며 전하는 말에
전혀 개의치 않겠소.
우리는 하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치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치는 일을 계속할 것이오.”
(44:15~18 취지)
놀라운 변화이다.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대놓고 거부한다.
그리고 현실을 해석하는 인지체계마저 뒤틀린다.
자신들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을
하나님을 버린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늘 여왕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닥쳤다고 해석한다.
인지부조화이다.
잘못된 선택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대한 해석까지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선택은 무섭다.
하나의 잘못된 선택이
즉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할 기회가 계속 찾아오는데도
그때마다 자기 욕망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까지 바꾸기 시작하면
사람은 점점 자신이 처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한다.
마침내 괴물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6.
하나님은 그들을 오랫동안 설득하셨다.
말씀하셨고,
경고하셨고,
기회를 주셨고,
돌아오라고 반복해서 호소하셨다.
그러나 이제 말로 하는 설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에 이른다.
징계가 남는다.
대학살과 기근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징계를 받으며 돌이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폐허 속에서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역사는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며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느 쪽에 설 것인가?
내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
세상의 대세가 가리키는 방향,
당장 안전해 보이는 방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다를 때
나는 무엇을 계기로 삼을 것인가?
하나님의 역사에는
구경꾼으로 남고 싶지 않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선택하고,
때로는 내 감각에 반역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