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강이 뒤채고 있다. 낮에는 무심한 듯 천연스럽던 강물이 밤이 되자 제법 일렁이며 흐른다.
다 큰 남자의 등줄기 같이 울룩불룩한 근육질을 들썩거리며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도 같다.
강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건 무엇일까.
아픔이나 그리움, 작은 기억마저 증폭시키는 밤의 신묘한 마성 때문일까. 나는 지금 양화나
루 선착장에 와 있다. 말이 선착장이지 강물 위에 떠 있는 배 모양의 휴게소다. 배 안쪽으
로 '아리수'라 하는, 예쁜 이름의 한식집이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이층에도 뭔가 하는 양식당이 있다. 여름날 저녁이면 나는 가끔 이곳
에 온다.
커피 맛이 그런 대로 괜찮은 데다 내가 좋아하는 한강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마구마구 쏘이는
게 좋다. 가로등 그림자가 줄줄이 얼비쳐진 강 저편 도로 쪽으로 자동차의 불빛이 뱀처럼 이
어진다. 강물도 불빛도 무심하게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은 누구의 의지일까. 검푸른 물살을 바
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내게 묻던 말이 생각난다. 푸른 비단이 나부끼듯 부드럽게 굽이치고 있
는 강물을 저만치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강과 바다 중 어느 쪽이 더 좋아?"
"강이요,"
"왜?"
"강은 지향점이 있으니까" 냉큼 대답을 하긴 했지만, 강이 꼭 바다를 그리며 흘러가고 있다고
는 생각지 않았다. 역사가 맹목이듯, 강물 또한 자연의 법칙에 따를 뿐, 지향점 따위는 없는
건지 모른다. 그냥 끝까지 내달려보는 것, 내친 김에 갈 데 까지 가보는 것, 그저 그뿐이 아닐
까. 삶이 그러하듯이. 가끔, 고인 물 같은 내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다.
비껴나는 새그림자와 스쳐 지나는 구름 따위밖에 비쳐내지 못하는 갇힌 물, 그 테두리가 답답
하게 느껴진다.
흘러가는 물이 고여 있는 물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더 먼 바다를,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싶다. 폭포를 지나고 여울목을 만나 요동치며 흐르고 싶다. 바윗돌을 돌고 장애물을 넘으며 신
나게 떠내려가고 싶다. 흐른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다는 뜻 아닌가. 모터보트 한 대가 선착장
한 귀퉁이에 비끌어 매어 있다. 거친 포말을 일으키며 강을 가르던 그 놈은 낮 동안의 열정
을 아직도 식히지 못하였는지 모선에 연신 몸뚱이를 부딪는다.
애써 본능을 잠재우려 해도 강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살거림과 발밑을 간질이는 잔물결
의 부추김을 참아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그렇듯 보채는 녀석 때문에 밧줄에 잇닿은 모선의 선미(船尾)는 생채기가 나고 멍
이 들어 있을 것이다. 흐르는 것은 흐르게 하고 떠나고 싶은 것은 떠나가게 하라. 강이 그렇
게 철벅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둠 속에서는 소리마저도 더 크게 살아나는가. 강물소리가 가슴
으로 퍼져 온다. 무릇 동체(動體)란 움직여야 하는 법. 사람도, 차도, 배도, 너무 오래 세워두
면 안 된다. 흐르는 물이어야 이끼가 끼지 않듯, 움직이는 것만이 녹슬지 않는다. 항구에 가만
히 정박해 둔 배가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는 배보다 더 빨리 상한다 하지 않던가. 아는 사람
의 사무실에서 '물 흐르듯이' 라고 쓴 장방형의 액자를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맞은
편 벽 중앙에 편액을 걸어둔 사무실 주인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이
물 흐르듯 사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즈음의 나는 묘하게도 '물 흐르듯이' 하는 그 말
에서 유유함보다는 역동성을 느낀다. 휘돌고 섞이고, 부딪치고 부대끼며, 소리 내어 흐르는
게 물의 본성일 듯싶은 것이다. 상류의 발랄함과 하류의 완만함을 지나 강은 마침내 바다
에 이를 것이다. 지친 제 몸을 풀어 헤쳐 사방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한 몸을 이루어 부풀어 오
를 것이다. 흐르려는 의지도, 지향점도 상실하고 이제껏 간직해 온 제 이름마저도 종국에는 잃
고 말 것이다. 개울과 폭포와 호수의 기억을 양양한 개펄에 파묻으며, 시퍼런 짠물 속으로 자
취 없이 침잠해 버릴 것이다. 흐르고 흘러가 강물이 만난 게 안식일지 평화일지, 또는 허무일
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강물의 끝에는 바다라는 새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도 바람은 불고 생
명이 꿈틀대고 해가 뜨고 달이 진다. 흐르고 흐른 시간의 켜들은 도대체 어디에 고여 있는 것
일까. 그 곳에도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이별이 있는 것일까. 알 수없는 시간의 늪을 향하
여 나 또한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