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의 변천
불경 역시 역사의 흐름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부처님 재세시는 기록문화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기가 어려웠고
부처님 사후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안팎의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다.
외부적 문제는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래의 힌두적 사고방식이었으며
내부적 문제는 부처님의 한치도 빈틈없는 완전한 진리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제자들의 일탈성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처님 사후 제자들이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힌두적 사고에 젖은 인도인들을 설득하고자 그들의 배경과 지식을 활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불법 속에 자연스레 힌두적 관념과 논리가 스며들게 되었다.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일이지만 부처님 재세시에도
법을 거역하는 제자들이 자주 나와 법을 훼손하는 일이 있었고
외도들과의 충돌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BC 485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비탄에 빠졌으나
일부 습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옴짝달싹 조차 할 수 없었던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탈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바닷다라는 제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비탄에 빠진 수행자들을 향해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드디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는 석존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수제자인 마하가섭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교단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왜곡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수행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경전정리 작업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제1회 불전결집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문자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경전은 단순히 구전으로 암송되었을 뿐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 회의는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지켜야할 계율(律)을, 아난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을 암송하면
참석했던 모든 제자들이 그 내용이 맞음을 만장일치로 승인하여
경으로 확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립된 율과 경의 내용이 입을 통해 계속 전승되다가
200년 뒤에 3차 팔리어 대결집의 모태가 된다.
2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약 100년 경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불교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으로
입에서 입으로 가르침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이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엄격한 교단과 새로운 지역의 개척교단 사이에
변질된 계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10가지 쟁점이 있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 수행자가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정오를 지나 식사를 하는 문제,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문제,
금,은 등을 보시받는 문제 등이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불교계에 논란이 되자
각지의 수행자 700여명이 바이샬리 거리에 모여 논쟁을 하여 기존 계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계율을 융통성있게 해석하여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신생 관용파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비구들간의 논쟁에서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어
10가지 쟁점 모두 법에 맞지 않는 '비사(非事)'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새로 대중부라는 파를 만들었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단은 불멸 후 200년(BC 280년) 경에
개혁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고
보수적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BC 180년) 경 분열이 시작되어 20개 부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들을 소승 20부라고도 하며 총칭하여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부른다.
이들은 각 부파별로 독자적인 이론 전개를 해가며 인도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각자 불교를 정밀화, 체계화시키며 인도전역에 불교를 전하게 된다.
(그 결정판이 AD 5세기 세친의 구사론임)
그들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만나 행한 질문과 답변 속에
관련된 사실과 이치를 모두 집어넣어 완벽한 문장과 체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조금의 흠도 없는 경전을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초기 경전의 내용이 나열적이며 관념적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제자들의 치밀한 노력 때문이다.
이와 같이 초기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벽한 교리를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번쇄한 교리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잡아함이나 법구경과 같이
원초적이고 간결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비달마적인 연구가 고조되어
그 내용이 학문적인 논서같은 것도 있다.
이를테면 팔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 ya)'에 속하는 《닛데사》는
같은 소부에 수록된 《숫타니파타 Suttanip ta》에 비해 매우 아비달마적인 주석이며
《파티삼비다맛가 Pa isa bhid magga》는 실천수행의 덕목을 정리하여 해설한 것인데
때에 따라서는 논장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초기 법음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BC 3세기의 팔리어 경전들도 이 정도일진데
북방으로 전래되어 한역 대장경의 원전이 된 AD 2세기
카니시카왕의 산스크리트 경전의 변천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BC 4세기 경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왕의 북서 인도 침입을 계기로
서북인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나타났는데 BC 3세기 아소카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 왕은 참혹한 살륙이 벌어지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는데
BC 235년 그는 필생의 사업으로
부처님 사후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經)과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律)과
부파불교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온 아비달마의 논(論)들을 한자리에 모아
경·율·논 3장(三藏)의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것을 바로 불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라고 불리워지는 3차 대결집이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남방 소승경전의 전범인 팔리어경전의 기초가 되는데
이때는 상좌부의 분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힌두교가 정식으로 나타나기 전이라
비록 아비다르마 연구로 많이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부처님의 비교적 원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복귀를 주장하며
브라만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을 제작(B.C.1 세기)하여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에 포괄하고 선진종교인 불교 이론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게 되는데
힌두교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불교속에도
부처님을 신앙으로 하는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북부에 생긴 중앙아시아 계통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은
예외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당시 위정가들에게 가장 차원높은 고급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가들도 자신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스님 500명을 선출하여
불전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4차 불전결집'이다.
이때는 각 부파의 학문적 논의가 거의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대장경을 편찬했다.
이때 경장주석 10만송, 율장주석 10만송, 논장주석 10만송, 도합 30만송의 대주석을
동판에 새겨 큰 보탑 속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그 중 논장의 일부 주석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다르게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브라만적 전통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뜻이며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동양3국에서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크게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 기원 전후 경에
부파불교의 현학성과 귀족주의에 반발하면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때 상좌부의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고급종교가 되어있었고
승려들은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함만 누리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을 구원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는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자신들만의 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이들에 의해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박티 신앙의 영향으로 초기 경전에 없던 여러가지 형태의 보살과 부처가 나타나게 된다.
AD 3세기경 인도 불교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20여 종의 아비달마 승단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이 나타나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는 시대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외 불교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육파철학인 ① 산키아(Smkhya)학파
② 요가(Yoga)학파 ③ 니야야(Nyya)학파 ④ 바이세시카(Vaisesika)학파
⑤ 미만사(Mims)학파 ⑥ 베단타(Vedant)학파 등이 하나 둘씩 정비되어가면서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인도사회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 사상의 대가인 용수가 탄생하여
그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철학적으로 평정하고 불교를 대승적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를 공이라고 하였다.
자성이란 것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항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한다.
이에 비해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적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의미한다.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으로 환영에 불과하니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고통스럽던 꿈은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을
연기설로서 이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위상을 확립하였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사실에 관한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었지만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공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실체가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차이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후일 힌두교에서 불교를 자파의 일종으로 무리없이 수용하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밀교로 변하면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생각해 오던 많은 부분이 밀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제를 지내고 염불을 하고 다라니를 외우며 불상과 탑에 복을 비는 것 대부분이 밀교적 행태이다.
우리나라에 밀교가 성행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가 삼국시대(AD4세기∼8세기)로
오랜 역사(BC 5세기부터 AD 7세기)를 지닌 인도의 다양한 불교
(초기불교, 아비달마 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 밀교)가 동시에 밀려들면서
부처님을 신과 같이 생각하고 복을 비는 밀교가
원시신앙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삼국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의한 호국불교였으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 불교를 국교로 삼고 팔관회를 개최한 것이라든지,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십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것 등도
모두 밀교적 신앙의 발로였으며
당시 궁중의식들과 법회의식들도 모두 밀교식 의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폐불정책으로
많은 불교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밀교종인 신인종도 중도종(삼론법성종)에 합쳐지고 다시 총남종이 되었다가
결국 선종에 통합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밀교종파는 사라졌지만
불교 속에 녹아든 밀교의 형식과 관념은 계속되고 있으며
밀교의식과 기복신앙, 기도, 주문(다라니) 등이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인도에서 불교가 밀교화하여 소멸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처음 부처님은 인도사회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브라만제도의 어둠을 깨고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와 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선언하셨다.
그래서 우주의 실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주문이나 비밀의식에 대해 말법으로 금지했으며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기이한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체의 미신적인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과(파일제)를 받는다고 하셨으며
남방 팔리어 경전 소품에는 세속의 밀법들을 『축생의 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
밀교의 성립과 더불어 불교의 정식 교리가 되었으니
그 말법성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정법이 500년 밖에 가지 않는다는 말을 잘 증거해 준다 하겠다.
대승불교가 성하던 7세기 중반 인도에서는
힌두적 관념에 물든 불교도들이
주술적 방법을 통하여 범아일여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인도적 주술과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불교를 밀교라고 한다.
이들은 신을 숭배하고 주문과 의식을 통하여
초월적인 존재와 합일함으로써 해탈을 추구하려 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결국 우주관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브라만적 관념에 젖은 인도인들에게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불교의 진리성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똑같은 이슬람의 침략을 당했는데 힌두교는 살아남고 불교는 소멸한 이유는
불교의 정체성 상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밀교는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불교로 잡밀(雜密)이라고 하는데
병을 치료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중생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해 나타난 변형불교로서
다라니경과 제불보살을 신앙하는 일군의 밀교경전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밀교가 일어날 당시 대승불교가 성하였지만
이들은 비록 겉으로는 중생구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래도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종교였다.
그래서 무지한 중생들에게는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쉽게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주술과
신앙이 더 인기가 있어서 밀교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중기밀교란 7세기경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 『대일경』과 『금강정경』등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립된 밀교로서 초기의 조잡한 잡밀에 비추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다 하여 순밀(順密)이라고 한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밀교의 실천체계인 호마법, 공양법, 관정법 등이 설해져 있다.
대일경은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 있다는
순수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내는 태장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금강정경』은 대일경을 보다 체계화되고 세밀하게 발전시킨 것으로서
법의 성품을 금강성이라 하여 금강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성적 열락과도 결부시키고 있다.
이들은 만다라(법도), 무드라(수인), 만트라(주문)라는 형식을 통하여
깨달음과 법계, 불 보살의 세계를 복잡하게 조합하여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화는 그 교의나 의례, 존상에 있어서
기존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 불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금강정경을 기초로 한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성적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좌도밀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좌도밀교는 여성과의 성적 의례를 근간으로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 본래의 관념과,
성적 의례를 통해 느끼는 환희가 깨달음의 경지와 유사하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성적행위를 도입한 금강승을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대일경의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밀교라고 한 것이다.
금강성에 기반을 둔 좌도밀교는 처음부터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인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밀교는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도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그 특징도 힌두교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13세기초 힌두교의 압박과 이슬람교의 공격을 받자 인도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아래 여러 가지 주술과 의례를 중시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의식이 호마법(護摩法) 이다.
호마는 제를 지낼 때 불을 피우고, 그 속에 공물을 태우는 의식으로
베다 이래로 전통적인 브라만교 주술의식이었는데
힌두교에서 이어받은 것을 다시 밀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밀교의 핵심은 주문에 있다.
주문은 정신을 통일하고 삼매에 드는 수단으로서 요가행법에서 널리 사용된 것인데
불법이 약해짐에 따라 이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밀교에서 주된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우주의 신비한 힘을 받게 되어
인간의 힘이 무한자재에 이르게 되는데
일념으로 "옴 마니 반메훔"을 외우면 마음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금강소복괴산불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의식 때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이런 밀교의 영향인데
천수경의 여러 진언들과 반야심경의 주문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진언은 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로서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며 범어를 원문 그대로 외운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기 전에 먼저 주문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주문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비법이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게 되면 삶이 어두워지고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온갖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환상에 빠뜨리고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 말법의 공통된 특징인 것이다.
세 번째 밀교의 특징은 신앙적 요소이다.
부처님의 법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다.
왜냐면 완전한 신(조물주)은 완전한 이치를 통해 지은대로 주시기 때문에
각 사람이 주체적 입장에서 좋은 원인을 짓는 것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밝은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초기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의지하여 진리를 깨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고 변질되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붓다가 중생 구원을 위한 신의 화신으로 변하게 됨으로서
불교가 실천의 종교에서 믿음의 종교로 변하게 된다.
즉 힌두적인 인도에서 자리잡기 위해서
불교는 인도민중의 토속적인 신앙과 기복적인 욕구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힌두신들을 받아들여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때 불교에 들어온 힌두신으로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등이 있다.
제석천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인드라(Indra) 신이 된다.
범천(梵天, Brahman)은 브라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 이외에 절에서 많이 보는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금강역사(Vajradhara)는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인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받아들였다.
팔부중도 불법을 수호하는 8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대 제자와 함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밀교 시대(7∼8 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이 나타나는데
예배형식이 확립되면서 이들에 대한 신앙과 가피력이 대중성을 띠어 보편화된다.
특히 관음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된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와록까떼쉬와라로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나 형태에 따라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마두(馬頭) 등의 이름을 가진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그외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Maitreya),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 라는 힌두신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될 사건은 굽따 왕조 후기(AD 500년경)에
힌두교 내에서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는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킨 좋은 사례로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인도사람들은 비슈누 신과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관음보살과의 차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교와 유사하게 됨으로써 힌두교의 한 종파로 정착하여
인도사회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도사회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모두
역사적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 왔으며
성자들의 원 가르침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자들은 기존에 전해져 내려오던 사고와 관념의 허황됨을 깨닫고
사실에 근거하여 바른 이치대로 살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는 성자들이 버려야 할 것으로 가르친
힌두교의 관념적인 공사상과 유대교의 맹목적 영적 신앙을 다시 받아들여
다시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미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은 기존 종교를 통해서는 인간성의 고양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영적 오염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성장과 내세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진실을 밝히고 인간의 참된 삶을 회복해 밝은 세상과 인간완성으로 나아가려는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흐리고 인간성을 왜곡하는 곳이 되었으니
말세의 대표적 징표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학과 이성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인간성을 덜 망치고 삶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지나친 권위와 절대성을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자들의 진정한 관심이 인간의 축복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에 기준을 두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참된 진실과 진리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진실의 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