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디 김(Nodie Dora Kim), 들어보셨나요?
저도 최근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관련하여 알게되었는데, 조금 더 살펴 보니, 우리 여성사에 기록될 만한 '의지의 여성'의 한 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인하대학교와도 관련이 깊구요...
1898년 출생하여 1905년 부모가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게되면서 같이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요, 하와이에서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한국 기독 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승만 박사의 주선으로, 오하이오 주의 우스터(Wooster)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게 됩니다.
노디 김의 딸의 회상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는 고등학교의 기숙사 비용을 댈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알아 봐 주었다고 하는데, 하와이에서 오하이오까지 가는 교통비는 노디 김 가족이 마련해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시 노디 김의 집안은 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후였고, 달리 그 돈을 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디 김은 달포를 매일같이 부두에 나가 미국 본토로 떠나는 여객선 앞에서 승객들에게 호소를 하였답니다. 베이비 시터 등 아르바이트로 배삯을 대신해 보겠다고 하였답니다.
마침내 한 대령(Colonel) 부부가 미 대륙 동부까지 갈 일이 있었는데, 이들이 노디 김의 사정을 듣고 배도 태워주고, 오하이오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여 1916년 노디 김은 오하이오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여 오하이오의 오벌린(Oberlin) 대학(오벌린 대학은 미국에서 흑인과 여성에게 최초로 문호를 개방한 대학으로 유명하며, 미국에서 전국으로 명성있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에 역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됩니다. 기숙사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해외 각 지역에서도 독립과 만세운동이 전개됩니다.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한국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엽니다. 회의 조직은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등 명망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였지만, 참여 대의원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노디 김은 바로 그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회의 석상의 공식 연설자로 나서 대한 독립의 당위성과 여성의 해방을 역설하고, 또 일본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안 채택을 주도하고, 대한 독립을 위해 미주 교민들이 매일 하루 세 번 기도를 올릴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 3.1독립 운동 사상 약관 20대의 여성이 세계를 향해 우리 독립과 인류 평등의 대의를 연설한 것은 이것이 아마 유일한 예가 아닐까 합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그 한국의회에 오벌린 대학의 교수 두 명이 초청 내빈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노디 김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노디 김은 미주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여성이며, 철저히 이승만 박사의 노선을 따르고 지지하였던 여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노디 김이 낳은 딸이 이승만의 아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딸의 회상에 따르면, 엄마(노디 김)가 미국 본토에 가 있을 때, 시카고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바로 이혼을 하였지만,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노디 김은 자신의 결혼 및 이혼 사실이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그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 취급받는 것이 싫었던 까닭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따라서 자기 딸을 '친한 친구의 딸'로 얘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디 김은 이후 재혼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였답니다.
하여튼 노디 김은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 부름을 받게 되고, 외자구매청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러다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노디 김은 195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한편 노디 김의 이력 중에 인하대학교 이사직도 있는데, 그것은 노디 김이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하와이에 와서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하와이의 한국 기독 학원의 교장을 역임한 데에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디 김은 이승만 박사가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에 한국 기독학원을 맡아 운영하였고, 그 후 한국 기독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 재산이 인하대학교 설립에 쓰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노디 김에 대한 가장 자세한 얘기는 역시 그의 딸의 회상이 아닐까 한데요, 그 내용은 Roberta Chang/Seonju Lee, When the Korean World in Hawaii Was Young : 1903-1940, 북코리아, 2012, 133-145쪽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