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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을 받든 소 / 박흥식
정든 소가 되고 싶다
한낮 한복판
술 뙤약에 익어 흩어지거나
발이 네 개나 되어서
한번씩 쓰러졌으면 좋겠다
바람이 불고
많은 것이 떠나갔고 다시
바람속에 나 있을 것이므로
들판을 오롯이 버티다가
미운 소가 되고 싶다
너무 많이 그리워했으니
어쩌면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을
사람을 많이 잃어버리고도
외롭지는 않게
미움을 받든 소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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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가겟집에
흙먼지 뒤집어쓴 시골길 가겟집
흐린 유리문을 열자
주둥이가 뻘겋구
싸하게 치어오르는 사이다 한병이 있었다구 한다
그래서 어디서 봤다구
예전에 어디서 살았냐구 서로 되받구 하면서
지폐 한장 건네구 받는다구 하다가
물큰 만져지는 게 있었다구 한다
30년 전 서울하구 왕십리의 번지수를 맞추구
신혼으로 살았던 문간방을 들춰내다가 말구
얼싸안았다구 한다 애들처럼 울었다구 한다
그래서 검주름진 눈물과
수척하게 떠받은 그날들이
귀멀구
늙은 염소 같은 두 사내에게 닥쳐왔다구 한다
그렇게 멀리멀리 잊혀졌던 격정이
버스보다 낮고 길보다 초라하게 내려앉은
시골길 가겟집에 남아서 살구 있었다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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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村에서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멀리 갈 곳도 산그늘이다
때론 철길 위에 앉아 있곤 했지만
그저 푸른 옷의 철도원
이렇게 비 오고 어둑한 날이면
철길을 따라 똑바로 집에 간다
떠나간 아내의 빨간 우산에
3년이 40년에 빗소리 소란하다
마당엔 비 연기 자옥이 깔리고
남겨뒀던 탁주 한배기
차가운 파문 속에서 뜨거움이 인다
날이 저물고
절 없는 지방과 오래 앉아
사방의 불길 걷잡을 수는 없다
제비 눈이 반짝이고
머리카락이 젖고 얼굴이 젖는다
이 다음은 또 턱에 어쩌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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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인다
불러 세우는 소리나 그림자 하나 없는
저만큼 산모롱을 자전거는 돌았다
굴러 오르느라 휘적이는 몸짓도
그를 휘감던 입김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감으면 산허리를 급히 쏟아내는 길
길을 따라 비좁은 하늘
오르고 내려가던 사람들의 길이 보인다
그를 따라 보인다
모양모양 양지에 나온 사람들과
사람들을 돌아앉은 쓸쓸함과
낯익은 이름들이 목구지로 퍼져서 울린다
눈을 감으면 보인다
언제나 허술하고 어줍으므로
그대를 사는 커다란 의미와는 달리
과도한 적막으로 산다는 거기와는 분명히 달리
여기엔 아직도 사람이 보인다
어제도 오늘도 돌부리 가득한 고샅길에도
너무도 잦고 지겨운 돌아오는 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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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항
손구락 잘린 문둥이들 건너가고
술상 위 궁뎅이 크게 하고
팔려갔던 계집애들의 납작한 포구
거기, 지나가는 자 하나
숙이 허벅지짝만한 한치 한마리를 사서
뜨거운 길바닥에 앉아
얼굴에 고추장 빨갛게 바르고 빨고
한낮의 하얀 소리
먹고 잘라먹고 남기고 일어서서 갔다
바다 건넌
붙이지도 못한 꽃도 없는 능소화 한 척
험한 초록만 잔뜩 짙었는데
어리고 대나무 짚고 홀로 베옷 입은
암표범 같은 계집아이
까만 번들거리는 볼때기로 지나가다
얇고 길고 붉은 입술로 똑바로 마주서서
흘기듯 눈꽁댕이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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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서
오랜 이 사람을 두고 헤어날 수 없는 거리로 운다
가는 게
오는 것 보다
남으리란, 지척 슬픈 말이리라
뒤뜰 가득 핀 수국이
네 종아리에 무심히 지는 걸 나는 그때 두고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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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
우르릉, 빗소리는 발목에 춥고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 한잔 생각나지?
아득했던 그 '행운의 편지' 번지듯
그에게서 받은 말 똑같게
술 생각 나게 하는 목소리가 나를 떠났다
- 어때?
들마루 노닥거리는 추위와
쓸쓸한 들판으론 탱자 가시울이 있는
하늘을 잦추르는 새떼가 있는
- 한잔할까?
홀로 재새는 한겨울 움막 속
콩깍지를 닮은 야만의 그리운 목소리들이
이 나라 겨울소 같은 사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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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궁기
전교생이 마흔아홉뿐인 포천분교
자전거길을 따라 운동장이 새로 녹으면
마흔아홉에서도 빠지고
일찌감치 서울의 기민함에서도 빠졌고
결혼에서도
휴일의 여정에서도 빠져버린 총각 선생님이
텅 빈 교무실에 곱상하게 나와 앉아
미루고 미뤄왔던 포천의 명물
막걸리맛이나 제대로 알아볼 참으로
손구락 휘휘 저어 목젖에 깊게 지를 때면
아부지의 텔레비에서 쫓겨나고
안마당 가구공장서 쫓겨나고
엄마의 막걸리집에서 쫓겨나
학교밖엔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창가에 봄햇살처럼 파안하게 몰려왔다가
저렇게 먹으면 취하는데
저렇게 먹으면 취할 텐데
키를 틀어 걱정들이 한창이다가
얼굴을 겹쳐놓구 웃구 들까불다가
자전거길은 그예 구불구불 얼어붙고
다시 심심하게 흩어지는 아이들의
발자국을 짜륵짜륵 따라오던 저물녘 살얼음도
이제는 오래 되어 재미를 잃었다는
거기는 포천하구두 머나먼 달 뜰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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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냥공장
젖은 눈썹을 내리깔고 엄마는 날 때렸다
사내애들을 바짝 욱여끌고
골목마다 함석짝을 두들기며
인천에 성냥공장......
하루에 한갑 두갑......
어쩌구 노래하며 목청 돋운 뜻은
사기공장엘 간다거나
나가 논다는 것은 아녔는데
포대기끈 같은 걸루
대나무 속청 같은 걸루
언니의 피가 배이도록
젖은 눈썹을 내리깔고 그 노래는 날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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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레 민박집
이슬 내린 뜰팡서
촉촉이 젖어서 자던 신발들이 좋다
모래와 발바닥과 강물이 간지럽다
숙취 하나 없다
아침부터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이 바람
바람의 살
그 살결의 허릿매가 저리게 좋다
돌아갈 곳을 가로막는
파꽃 같은 이 집 돌아온 따님이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부끄러운 부엌
그 앞을 종일 햇살로 어정대서 좋다
병 주둥이 붕붕 울리며 철겹게 논다
그렇게 노는 게 좋다 한다
안 떠나는 게 좋아서 아흐레 민박집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바람의 속살이 잠을 설쳐서
마냥 이 집이 마음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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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별이었다면
우리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 아니고
시린 저 하늘 끝 눈물겹게도 챙챙한 설움이었다면
울긋불긋한 가을날
추수를 끝낸 논바닥에 흩어져 시끌벅적하게 놀아도 좋은 참새떼였더라면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먼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면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어차피 반짝이거나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꽃 피거나 꽃 지거나
여러 숱한 터울에도 고스라한 씨앗의 씨앗으로 보듬을 수 있었다면
별이었다면
아, 우리가 결코 사람이 아니고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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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넘는 샘물
밤새 읍내의 술독을 뒤지고 온
이 집의 도깨비들이
떨어진 닭털 속에
몽당비 속에
도라지 뿌리 속에 잠자고 있다
수국이 제 머리 위에 벙근 꽃 하나를 가리킨다
거기 있는 것 다 들켰다
주인 잃은 옷가지를 샘물에 구겨넣으면
가랭이가 후다닥, 튀어나가고
바람도 없이
곳곳의 이파리 팔랑 뒤집히고 칭얼거린다
목소리에도 살림에도
네가 남긴 벼랑 곳곳에 내 마음이 타는
마음속의 빈집
네가 가꿔논 작은 꽃밭 속에서
목 타는 손 하나가 샘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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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노래하면 눈물이 난다
경미도 울고
꽃례도 울고
잔칫집에 삼촌도 운다
입술 갈라지고
뜰에 있더니
뒷동산
꽃례의 노래에
무릎을 세우고
경미가 울고
삼촌이 돌아서 있고
뒷담으로 꽃잎이 분다
노래하면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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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안
소 없이 소 같은 놈이
아이들을 소낙비로 몰고 다닌다
들콩처럼 아이들을 까불러서
내놓기를 중어른들 골목길이다
도망갈까 물어보고 잡혀준다
엉덩일 뒤집고 매맞으며 웃는다
맞으면서 웃고 웃으면서 또 맞고
파출소도 빙그러니 웃고만 간다
이웃의 참새떼도 몰려서 와
하교길로 난 조붓한 골목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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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강바람
네 고운 아내는 파라솔 아래 앉아
낯선 햇볕의 화장을 고치고 있었고
너는 두 아이에게 무얼 자꾸만 가리켜 일렀다
나는 아직 아내도 아이도 없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는 곳이 달라지더니 말씨가 바뀌었고
말 따라 생각하는 것도 달라진 것 같았다
그래도 넌 고향의 산과 물이 제일이라고 거듭했고
나는 순진하게도 네가 없었던 때의 여러 일들과
그 사람들 소식을 또 일일이 얘기한 것만 같다
나는 이제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쭈글쭈글하다
모가지까지 꼬깃꼬깃 검어진데다
담배잎마냥 너른 와이셔츠 깃은 촌스럽기까지 했다
네가 떠난 길엔 마른 흙이 일고
나는 미루나무 서늘한 강바람인 것 같았다
사람 사는 생각으로 땅을 보고 가야 할라는가보다
면내를 피해 고샅을 구불구불 지나
함석문과 몇발짝 흙마당과 새고 있는 수돗물과
뜰팡과 누렁이와 마루와 베개도 밀어버리고
그 무슨 생각을 한참을 더 해야 할라는가보다
보 끝에 나가 철썩이며 놀던 너의 아이들
알 슬러 나온 놈들처럼 천정에 늘러붙은 그 아이들
너무나 잘 생기고 늠름하고 부러운 아이들이었다
방문을 닫고 베개와 이불을 끌어 몸뚱일 묻는다
오토바이를 시끄럽게 몰아세우며
길용이와 금환이가 소주짝을 풀어야 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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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아흐레 민박집> 1999.창작과비평사
* 박흥식 : 1956년 충북 옥천 출생. 1992년 자유문학에 시 <소의 눈> 등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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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려주셔서요.
참으로 정이 넘치는 한가한 풍경이 넘 좋아요. "소" 왜이리 가깝뇨?.... 강바람,노래, 샘물, 미루나무. 하니 그냥 그대로 서정시입니다. 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