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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일 합천에서 만나 황매산 산행을 한 뒤에 경주로 온 친구들은 밤 늦게까지 마신 술에 모두들 늦잠을 잤다. 나도 느지막하게 그들이 숙박한 불국사 사조리조트에 갔다. 동아국제마라톤한다고 오전에 시내 길이 다 막혀서 그걸 피해서 가느라 늦었다. 이제 불국사를 중심으로 경주를 좀 둘러보고 토함산에 올랐다가 시내로 들어가려고 한다. 사조리조트에 가니 그들은 벌써 식사하고 온천욕도 다 마친 상태였다.
불국사 사조리조트는 나하고 절친한 후배가 주방장으로 있다. 할인할 수 있고 만만하기도 해 내게 손님이 오면 늘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어제 역전의 용사들이 술에 절어 숙박지를 나서고 있다.
그리고는 바로 불국사로 왔다. 정문 쪽은 걷는 코스가 길어 뒷문으로 왔다.
불국사다. 한국인이라면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고 그 내용도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 특히 우리 경주사람들은 더욱 그렇겠지. 새삼 경주 이야기를 한다면 식상하겠지만 나의 지인들이 경주사람들만은 아니라 대충 정리해 본다.
불국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그 뒤로도 여러 번 축조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에 목조 건물 전체가 타버리고, 점차로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신라 시대의 찬란하던 옛 모습과는 다르다고 보면 된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시대 법흥왕(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새로운 사찰의 건립 소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사찰 건립 후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는 바,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문무왕(670)때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여기서 가르쳤다고 하며, 그 후 경덕왕 (751)때 드디어 김대성(金大城)이 크게 개수하면서 오늘날 불국사에 상징물로 알려진 탑과 성교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앞에 다보탑(국보20호)이 보이고 뒤는 석가탑(국보21호)이다. 안다고? 그럼! 그건 어린아이도 안다.
불국사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은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하였고, 그 앞에 석등(石燈)이 있으며, 다시 그 앞의 동서에 각각 석탑 1기가 서 있다. 동쪽 다보탑(多寶塔 : 국보 20호)의 기묘하고 정밀한 형태는 유례가 드물고, 서쪽 석가탑(釋迦塔 : 국보 21호)은 예로부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축조를 맡은 백제의 석공(石工)의 아내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찾아와서 탑이 완성되어 영지(影池)에 그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지니고 있어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다보탑은 과거불인 다보여래를 구현한 탑이다.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東方寶淨世界)의 교주이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불로서, 영원히 살아 있는 본체로서의 부처인 법신불이다. 보살로 있을 때에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뒤에 시방 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이 솟아 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 하고 서원 했던 것이다. 과연 석가여래가 영산(靈山)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땅속에서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났고, 그 탑 가운데서 소리가 나와 석가여래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였던 것이다.
어려운가? 나는 기독교 교회 집사지만 불교사상에 더 관심이 많다.
석가탑이다. 사람들은 현존하는 탑 중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가장 균형과 조화미가 뛰어난 최고의 탑이라고 평가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동서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불국사 대웅전 앞뜰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상주하고 있는 영산도량(靈山道場)이 된다. 영산정토에서의 법회는 엄숙하여 그 모임이 아직까지도 흩어지지 않고 석가여래의 설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국사 대웅전 앞뜰은 지금도 석가여래의 설법과 다보여래의 증명이 계속되고 있는 영산법회의 장소가 되어 있는 셈이다. 실로 이 두 탑은 〈묘법연화경〉의 내용과 결합됨으로써, 말하자면 그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드러냄으로써 종교적 의미가 현실로 연장될 수 있는 탑인 것이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석가모니는 열반을 앞둔 최후의 설법에서 제자들에게 자신 스스로와 법에만 의지하여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법이 곧 비로전에 봉안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는 원래 산스크리트어 “바이로차나”가 어원으로 편일체처(遍一切處), 광명편조(光明遍照)로 번역된다. 즉 모든 곳에 두루 광명이 비춘다는 뜻이다. 불교는 법을 신앙하고 의지하는 종교이다. 심지어 지존인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일시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잠시 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 과거의 무한한 세월 속에서 성불을 하고 인간을 교화해 온 부처가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이라 한다. 이 때의 법신은 진리 자체의 몸으로서 법과 의미를 같이하는 것이다.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가 깃든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법을 설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를 구현한 곳이 바로 비로전이며 이곳이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이 될 경우에는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 줄여서 대광전(大光殿)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이라 일컫는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인데, 관세음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고난의 소리를 들으시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를 건져 주시는 분이다. 또 세상의 어느 곳에도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원륭하게 통하시는 교화의 주인이시다 하여 원통교주(圓通敎主)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음전을 원통전이라고도 한다.
관음전에서 바로 대웅전, 무설전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린 마당이다.
불국사를 이 포커스로 봐야 정석이다. 가장 불국사다운 전경을 배경으로 촬영한다.
불국사 관광을 마치고 어제와 같이 또 두패로 갈라진다. 토함산 등산조와 석굴암 관광조로.........토함산 등산조(강대춘,전종성,김경배)는 이 길로 토함산에 올랐다가 반대편 추령재로 떨어지려고 하고, 석굴암 관광조(문성호,김형철,김단미)는 승용차로 석굴암에 올라 관광을 하고 다시 내려와 반대편에 있는 추령재로 와서 우리를 픽업할 것이다.
토함산은 호국의 진산으로 예로부터 신성시 되어온 산이다. 신라의 영산으로 일명 동악이라 불리었으며, 서악 선도산, 남악 고위산(이것이 유명한 경주남산, 한국100명산에 든다), 북악 소금강산(현재 우리집 대문 앞이 산 들머리이다), 중악 남산(고위산과 같이 경주남산이다)과 더불어 신라 5악이다. 신라의 4대 임금인 석탈해왕이 죽은 후 동악의 산이 되었다고 한다. 석탈해왕은 토해왕이라고도 했는데 토함산의 이름은 동악의 산이 된 데에서 유래된 듯하다.
경주에서 단석산(낙동정맥 상에 있는 산으로 해발 829m이다) 다음으로 가장 큰 산(745m)으로서 울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추령재를 지나 기림사와 죽어서 동해의 큰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동해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있는 동해로 바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대덕산(남한에서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나타나 잡혔다는.......)과 노천박물관으로 불리는 남산과 마주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만호봉을 지나 보문관광단지에 이른다.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 이외에도 무덤에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괘능,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절한 전설이 담긴 영지못 등 주변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일출이 일품인 정상은 신년 일출산행지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조금 오르다 보면 우측에 청마시비가 나온다.
한국 문학의 시문학계에서 미당 서정주 선생과 함께 양대 산맥인 청마 유치환 선생은 경주와 인연이 깊다. 그는 한 세월을 경주에 계셨는데 그것은 경주고등학교와 경주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경주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있을 때에 많은 제자들이 그의 영향으로 문학계로 향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지금 미국에 계시는 나의 사촌형 김영진 형도 그들중의 하나이다.
청마선생은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어제의 과음으로 힘이 들지만 우리는 한번도 쉬지 않고 50분만에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한다. 복장도 제대로 못 갖추고...........나는 구두를 신고 올랐다. 어제 황매산행 때 사용했던 등반 장비들은 차에 넣어둔 채 경주여고에 세워두었는데 오늘 마라톤으로 차량이 통제되는 바람에 차를 가져오지 못했다.
차로 몰고 올라와도 우리보다 늦은 석굴암 관광조의 김형철이가 타종을 경험해 본다.
여기가 석굴암 앞 마당이다.
석굴암(국보 제24호)은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이다. <삼국유사〉중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석굴암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굴암의 불상이 얼마나 귀중한 문화유산이냐 하면, 국민들의 여론에 국보1호가 석굴암이 되어야지 왜 남대문이 되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석굴암은 우리나라 문화유적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우리 경주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기에................
석굴암 입구에서 우리 등반조는 좌측으로 토함산을 오른다.
토함산 오르는 길
불국사에서 3.6km올라 왔다. 곧 정상이 나올 것이다.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5명산 중의 하나로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또한 소나무, 참나무 숲으로 덮여 녹음이 짙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굴암이 나타나는데 이 길은 산허리를 따라 돌아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관광객들이 이용한 길이다.(우리가 중학교 때 경주 수학여행 와서 새벽에 올랐던 그 길이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이 산이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산이 바닷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맨 뒤에 뾰족, 뾰족 두 봉우리 우측에 둥근 봉우리가 유명한 함월산이다. 함월산은 명찰 기림사를 품고 있는 산으로 토함산-함월산-문무대왕수중릉과의 지리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함월은 가을의 단풍이 좋아 가을만 되면 우리가 즐겨 찾는 산이다.
정상이다. 나는 늘 오는 곳이지만 그들은 이곳이 생소할 것이다. 오기가 쉽지도 않은 곳이고............
하산은 올라온 쪽과 반대쪽으로 내려간다. 우리는 토함기맥(일명 호미기맥: 낙동정맥 백운산에서 갈라져 나와 경주 토함산을 지나 장기곶까지 나아가는 산줄기)을 따라 추령재로 내려간다. 추령재는 경주에서 동해바닷가 감포로 넘어가는 령으로 가을 단풍이 죽이는 지역이다.
토함산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포수우물 갈림길. 여기서 추령재는 2.6km 남았다. 이제부터 가파른 길을 내려서야만 할 것이다.
이제 가팔라진다.
이제 추령이 1.5km 남았다.
뒤돌아보니 토함산이 벌써 저 멀리 보인다. 우리는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종성은 또 하나의 산을 취했다. 늦게 산을 안 종성의 산 탐색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오히려 식어가던 나까지 다시 불 붙게 만들고 있다.
이제 추령재 직전. 몸살로 고생하던 김경배의 산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약을 먹으면서도 줄곧 따라 붙인다.
추령재에 있는 백년찻집. 등산로는 이 백년찻집 뒤로 나 있다.
추령.........이라는 이정표가 넝쿨에 가려져 있다.
이곳이 추령재이다. 경주에서 동해바다 감포항으로 넘어가는 령으로 소위 토함기맥(호미기맥)이 지난다. 지금은 밑으로 터널이 뚫려 한가한 길이 되었다.
추령재에 있는 백년찻집.
서울 친구들이 못 먹어보는 음식인 아구지리.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조건 데려와서 시켜 먹인다. 새로운 것을 먹어 봐야지 자꾸 먹던 것을 먹으면 무슨 재미가 있담?
경주 동천동의 이가아구촌에서 시킨 아구지리. 아구를 푹 삶아 낸 맑은 국으로 경주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서부동 감포일출식당이나 동천동 은정에 비하면 못하지만 그런대로 먹을만은 하다. 이 아구지리로 배를 채운 뒤 서울친구들은 경주를 떠난다. 다음달에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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