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야학(孤雲野鶴)
외로운 구름과 들의 학, 속세를 떠난 은사
번거로운 세상사를 잊고 초야에 묻혀 悠悠自適(유유자적)하는 것은 대부분
선비들의 만년의 희망이었다.
처음부터 은거를 택한 사람도 있고, 修身齊家(수신제가)한 뒤 세상을 이끌려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낙향을 택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아마도 중국 전설시대의 許由巢父(허유소보)까지 올라갈 듯싶다.
堯(요)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潁川(영천)에서 귀를 씻고,
소에게도 그 강물을 먹일 수 없다고 했던 은자들이다.
폭군 紂王(주왕)이라도 멸할 수 없다며 반대한 伯夷叔齊(백이숙제)는
首陽隱士(수양은사)가 됐다.
난세를 피해 숨었던 竹林七賢(죽림칠현), 울타리에서 국화를 꺾었던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의
陶淵明(도연명), 매화와 학을 벗 삼았던 梅妻鶴子(매처학자)의 林逋(임포, 逋는 도망갈 포) 등도
이름났다.
이런 명사들 말고도 은자를 나타낸 말에는 그림 같은 묘사가 많다. 몇 가지만 보자.
山棲谷飮(산서곡음)은 산속에 살면서 계곡의 물을 마시고,
巖居川觀(암거천관)은 바위굴에 살며 냇물의 흐름을 바라보는 은사이며,
前園後圃(전원후포)는 앞에는 동산이요 뒤로는 가꾸는 밭이 있는 풍경을 즐긴다.
양가죽으로 된 갖옷을 입고 물고기를 낚는 羊裘垂釣(양구수조, 裘는 갖옷 구)의 태공도 있다.
여기에 외로이 떠 있는 구름(孤雲)과 무리에서 벗어나 들에 있는 학(野鶴)이란 뜻의 성어는
속세를 떠나 한가로이 숨어 지내는 선비를 이른다.
明(명)의 洪自誠(홍자성)이 쓴 경구집 ‘菜根譚(채근담)’에 있는 실려 있다.
後集(후집) 106장의 내용이다.
‘산중에 살면 가슴 속이 맑고 시원하니, 대하는 것마다 모두 아름다운 생각이 든다
(山居胸次淸洒 觸物皆有佳思/ 산거흉차청쇄 촉물개유가사).
외로운 구름과 들의 학을 보면 속세를 초월한 듯하고
(見孤雲野鶴 而起超絶之想/ 견고운야학 이기초절지상),
계곡에 흐르는 샘을 보면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듯하다
(遇石澗流泉 而動澡雪之思/ 우석간류천 이동조설지사).’
洒는 시원할 쇄, 灑(쇄)와 같다.
澡雪(조설)은 마음의 때를 깨끗하게 한다는 뜻.
唐(당)나라의 전설적인 寒山(한산)의 다른 묘사도 좋다.
‘초야에 사는 오막살이집 아무도 찾는 이 없네(茅棟埜人居 門前車馬疎/ 모동야인거 문전거마소),
깊은 숲속 새들이 모여들고 너른 시내엔 물고기들 노니네
(林幽偏聚鳥 谿闊本藏魚/ 임유편취조 계활본장어)
.’ 埜는 들 야, 野(야)의 古字(고자), 谿는 시내 계, 溪(계)와 같다.
우리의 선조들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한 선비들이 많았고,
초가삼간 지어 달과 청풍과 함께 산다며 풍류를 노래했다.
오늘날의 가요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거나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이라도
지어 여생을 즐기는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소수이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 밀려 귀향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다
생활에 쫓기면 외로운 구름이나 하늘을 나는 학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라 안타깝다.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