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파리]
페르 라셰즈, 죽은 자들의 마을,
파리에 처음 도착한 다음날, 나를 잠시 자기 집에 머물게 해준 친구의 학교 교장이 죽었다. 친구는 자크 르콕이라는 연극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교장은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세계 곳곳의 연극에 미친 청춘들을 불러들여 그들 속에 있던 연극혼을 끄집어내 주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연극 메서드를 전수했던 그가 하필 내가 파리 땅에 발을 딛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친구는 사막에서 길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해 했다. 왜 나의 새로운 출발은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하는 건지... 이 난해한 질문이 몸을 휘감으며 몇 날 며칠을 친구와 함께 침울해 했다. 그리고 살아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남자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파리 시청 건너편, 백화점 BHV 뒤편에 있던 빌레트 교회(Eglisodes Billetties, 1427년에 지어진 교회로 파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세시절의 교회)에서 치러진 장례미사엔 그 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연극인들, 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미사가 시작되었고, 숙연한 슬픔이 한 바퀴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공명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어둡고 무겁던 공기는 밝고 가벼운 빛에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죽은 자는 산 자들을 불러 모았고, 산 자들은 르콕이라는 남자에 얽힌 각자의 추억을, 그로 인해 시작된 모든 사람들의 인연을 환기하며, 그들의 삶과 오늘의 만남을 축복했다. 파리의 겨울답지 않게 청명했던 그날, 산자들의 얼굴에 옅게 번지던 투명한 환희가 어둠을 마침내 완전히 뒤덮는 것을 보았다. 이날은 파리에 대한 나의 첫 인상 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슬픔을 오래 가장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과 삶이 스쳐가며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고, 삶의 기쁨이 가식 없이 뿜어 나오도록 자리를 내어주며 조용히 사라져간 죽음의 그림자. 그들에겐 관습이 강요하는, 통곡을 기어이 뿜어내야 하는 연극이 필요치 않았다.
서로 다른 죽음의 무늬
그 후, 나는 파리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를 종종 들렀다. 오자마자 접했던 하나의 인상적인 죽음은 삶의 끝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내게 전했고, 나는 그 길을 따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나마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만나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싶었다.
페르 라셰즈, 얼핏 아기자기한 빵집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이름을 가진 이 공동묘지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나는 도무지 입을 다물 수없었다. 서울과 그 어느 한구석도 닮지 않은 도시가 파리지만, 공동묘지의 풍경은 다름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산 위에 또 다른 작은 산들이 봉긋봉긋 솟은 모양의 한국식 공동묘지를 처음 접했던 때가 열여섯이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말 그대로, 죽은 자들이 하나같이 잔디로 덮인 흙을 덮고 누워있던 그모습은 그대로 장관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제외하면 그 모든 봉분은 같은 모습이다. 각자의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지 않고, 흙에서 왔던것처럼 흙 속에 조용히 묻혀 사라져가는 데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않는다. 임금도, 백성도.
"그런데 여긴, 죽는 순간까지 예뻐야 하는 거야?" 이 말이 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망자의 삶이 누려온 색깔과 남겨진 자들의 망자에 대한 애틋함을 저마다의 미감을 담아 반영해야 하는 것이 이 나라 묘지의 사명인 듯 온 힘을 다해 망자의 살아생전 모습을, 그의 개성과 남달랐던 삶을 담아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같은 무덤은 하나도 없다. 그들의 삶이 모두 달랐던 것처럼, 어떤 무덤은 익살맞고, 어떤 무덤은 정갈하며,어떤 무덤은 심지어 포스트모던하다. 무덤을 꾸미는 것은 산자들의 몫이고, 사람이 죽고 무덤이 만들어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지극히 짧건만 죽은 자들의 개성과 미감을 담고 있는 묘지들이 자아내는 경이는, 그어떤 세상의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프랑스라는 사회의 인류학적인 미감을 드러내주는 가장 풍요롭고 흥미진진한 박물관이었다. 그것은 흡사 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같았다. 실제로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위패가 있는, 작은 집같은 형태의 무덤들도 종종 있었다.
연간 300만 명의 관람객들이 페르 라셰즈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이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 앞에 서기 위해서다. 에디트 피아프, 마리아 칼라스, 이브 몽땅, 마르셀 푸르스트, 도어스(Doors)의 리드싱어였던 짐 모리슨, 쇼팽, 이사도라 던컨, 오스카 와일드,발자크, 모딜리아니, 그리고 최근 이곳에 자리를 잡은 샤를리 에브도의 만화가 티그누스까지...
1804년 처음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가 문을 열었던 해에는 겨우 13명의 망자가 이곳에 들어왔다. 새로 문 연 공동묘지가 명성을 얻게 하기위해 당시 파리 시가 사용한 방법은 스타 마케팅, 당시로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최고의 인기인, 우화작가 라퐁텐과 희곡작가이자 연출가, 배우였던 몰리에르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해온다. 그리고 그들의 스타 마케팅은 적중했다. 1817년 이 두 사람의 묘가 이장된 후, 페르 라셰즈에 묻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로 증가, 1830년엔 3만3천 개의 묘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된다. 지금 페르 라셰즈는 바티칸시국의면적에 육박하는 44헥타의 면적에 백만 명의 망자들이 머물고 있다.
.파리 코뮌의 기억
한때 이곳은 격렬한 투쟁의 장이기도 했다. 1871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구성하면서, 프로이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과 왕당파들의 기득권 고수를 위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굴욕과 역사적 후퇴를 받아들일 수 없던 파리 시민들이 시민정부를 구성한 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 1789년 혁명주의자들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는 이들은 무상교육, 야간작업 폐지 등 당시로선 급진적인 조치들을 두 달간 취해가며 프랑스는 물론 유럽 곳곳의 시민계급에게 다시 한 번 혁명의 기운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베르사이유로 도망갔던 귀족들과 정부군은 두달 만에 반격을 시작했다. 1871년 5월21일 시작된 반격은 5월 27일에 이르러 페르 라셰즈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이어진다. 시민군들은 페르 라셰즈의 묘 사이에 숨어 정부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수백 명의 시민군들이 정부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고, 그 흔적은 페르 라셰즈 안에 있는 파리 코뮌 병사들의 벽(Murdes Federes)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다음날 뱅센 성에서의 격전을 끝으로 두 달간의 파리 코뮌 역사는 막을 내린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시민군은 2만 명이 사망하고, 3만8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7천 명 이상이 추방당하는, 전무후무한 피의 한 주가 그렇게 흘러갔다.
예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묻히다
페르 라셰즈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묘는 미국의 록그룹 도어스의 리드 싱어였던 짐 모리슨의 무덤이다. 베트남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60~70년대, 반항하는 히피들의 영웅이었던 그는 공연 중에 성기를 드러내놓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미국에서 실형을 살았고, 자신을 감금했던 미국을 떠나, 자유의 땅(!) 프랑스를 찾아와 휴가를 즐기던 중 마약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1971).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짐 모리슨이 누구인지를 내게 알려준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짐 모리슨이 사라진 지 십이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의 노래는 아직도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오디오 주위에 풍긴다. 그가 당장이라도 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릴 것 같다. 짐 모리슨은 절대 전설 따위가 아니다. 전설이라는 왕관으로도 그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짐 모리슨의 묘를 찾는 관람객들은 금기를 거부하는 광란의 콘서트를 펼치던 그를 위로하기 위해 거침없는 퍼포먼스를 그의 무덤 앞에서 펼쳐왔다. 그 앞에서 마약을 피거나 낙서를 하는 건 물론이고, 성행위를 벌이는 커플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급기야 시당국은 짐 모리슨 묘 주변에 철창을 둘러씌우게 되었다. 선동가들이 남겨놓은 진동이 그들의 사후에도 여전히 도발적 충동을 전파하는 현상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동성애로 영국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추방당해 프랑스로 건너와 죽음을 맞은(1900년) 그의 묘도 1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그를 연모하는 수많은 추모객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그들의 과도한 애정표현이 급기야 투명한 칸막이를 그의 무덤가에 둘러싸게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 쉼 없이 진한 키스자국을 남겨놓고 있다. 어쩐지 페르 라셰즈에서 만은 스캔들과 멀리한 채 고요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내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묘는 이사도라 던컨의 그것이다. 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며, 그남자의 차에 올라타 새로운 모험을 향해 몸을 던지던 그녀는 긴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감기며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화장되었고, 그녀의 재가 된 육신은 납골당에 간단한 명패 하나만을 표식으로 남겼다.
이탈리아 출신 비운의 화가 모딜리아니, 폴란드 출신 작곡가 쇼팽까지 놀랍게도 방문객들을 불러들이는 숱한 묘들의 주인은 외국에서파리에 뼈를 묻으러 온 예술가들이다. 쇼팽의 묘 앞에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국기가 나란히 꽂혀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불살라 예술을 남겼다. 우리에게 시대와 국적에 상관없이 간절한 연모를 품게 만드는 이들은 오직 예술가뿐이다. 미국에서, 아일랜드에서, 이탈리아에서 그들은 바다를 넘고 산을 넘어 파리로, 그들의 영혼을 불사르고 뼈와 살을 묻으러 왔나 보다.
어느 누구도 정치인, 군인, 기업인의 묘에 꽃을 바치러 오지 않는다. 관광객들을 이끌고 다니며 페르 라셰즈를 안내하는 나이든 가이드는 연거푸 말한다. 아직 죽지 않은 당신들, 언제 당신들의 차례가 올지 모른다.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누리라 우리가 예술인들의 무덤을 찾는 것, 그들이야 말로 인생을 가장 풍요롭게, 창조하며 사랑하며 살았던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