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6월 19일 파스칼이 태어났다. 19세에 계산기를 발명한 놀라운 천재였지만 불과 39세에 타계했다. 18세에 즉위해 천하를 호령하던 중 39세 청년으로 별세한 광개토대왕과 거의 흡사한 연령 이력을 지녔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없애시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라고 새겨져 있다.
파스칼 묘비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드높은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지레짐작을 하면 성품이 매우 건방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는 아주 정반대였다. 파스칼은 매우 겸손해서 자신의 초상화도 그리지 못하게 했고, 묘지 앞 비석에 명문銘文을 새기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자死者의 마지막 부탁이 지켜지지 않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살아남은 자가 본인의 판단력 또는 가치관에 따라, 심지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경우마저 허다한 까닭이다. 결국 파스칼의 묘비에는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그는 여기 잠들었지만 《팡세》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헌사가 바쳐졌다.
‘근대 최고의 철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는 빼고 ‘파스칼, 그는 여기 잠들었지만 《팡세》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만 새겨졌더라면 좋았을 법하다. 파스칼 본인이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그런 글이 작성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사전에 알았던 것도 아니니 어쩔 도리도 없는 일이지만.
명문을 보면, 파스칼 묘비는 그의 사후 7년 이상 지난 뒤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다. 파스칼이 운명한 1662년에 견줘 《팡세》 출간 연도인 1669년은 7년 뒤늦다. 다시 350여 년이 더 흘렀다. 아직도 《팡세》를 읽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파스칼은 잠들었지만 《팡세》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팡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힘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방금 거론한 세 교훈은 《팡세》를 읽지 않아도 이미 낯익은 혜안이다. 워낙 널리 알려진 명언이니까.
《팡세》를 읽지 않으면 나의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젊은 파스칼의 ‘유언’과 만날 기회를 잃게 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혼자 조용히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아, 정말 가슴을 적시고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참된 가르침이다.
역시, 혼자 조용히 집에 머물면서 책을 읽고 글을 써야겠다.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70년짜리 인생을 한 번 살고, 책 읽는 사람은 5000년을 산다”라고 단언하지 않았나! 두보 시 <백학사 초가집을 지나며題柏學士茅屋>도 생각난다.
맑은 하늘 초가집 위에는 구름이 둥실둥실
晴雲滿戶團傾蓋
가을 물은 섬돌 가득 도랑으로 넘쳐나네
秋水浮階溜決渠
부귀는 반드시 부지런히 힘써야 얻는 것이고
富貴必從勤苦得
사람은 모름지기 책을 다섯 수레는 읽어야 하지
男兒須讀五車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