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차량에 치어
증언자 : 안병복(남)/김금난 (어머니)
생년월일 : 1960. 10. 17.(당시 나이 20세)
직 업 : 재봉사(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당시 재봉사였던 안병복 씨는 5월 21일 계림동으로 가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 김금난 씨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광주에 큰일이 났소!
우리 병복이는 계림동 어느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면서 착실히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10시경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는 병복이를 본 작은방 할머니께서, '빨리 들어오시오!'하니까 작은집에 갔다 온다면서 나갔다고 한다. 작은집은 계림동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갔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어서 사망한 것 같다.
그날 나는 63세의 늙은이였지만 백대환의 어머니 박순례 씨 등과 경주 불국사 여행중이었다. 2박 3일의 여행경로 중 순천에 오니 사람들이, '광주에 큰일났소! 광주로 들어갈 수 없소!'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그때서야 큰일났나보다 하면서 타고다니던 차를 화순탄광에 감춰두고 그곳에서 잤다.
다음날 화순에서 너릿재터널까지 걸어오는 중에 보니 용달차가 부서져 있었고 신작로에 피가 있었다. 너릿재터널을 넘어 광주 쪽으로 통하는 지원동 입구에서 얼굴에 복면을 하고 총을 멘 사람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화순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앞차가 먼저 나가면서 군인이 없다는 표시를 하자 뒤차에 더 많은 시민군을 태우고 화순 쪽으로 달려갔다. 차량 속에서 젊은이가, "도청 앞으로 모입시다!" 하는 구호를 외치며 사라져갔다. 계속 걸어오는데 간혹 총소리도 들렸다. 광주상고 앞쯤 왔을 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무작정 남의 집에 뛰어들어가 몸을 도사리고 있는데 총알이 지붕 위로 슁슁 날아다녔다.
그리고 천일버스 종점 근처에는 유인물도 뿌려졌다. 나는 글을 읽지 못하여 볼 수 없었지만 총기소지자는 자수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병복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림동 작은집에 간다고 나갔을 뿐 아니라 학생들만 잡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던지라 거의 염려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닷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학동 큰집에 전화를 해보니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병복이 친구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따로 연락해 수소문할 길이 없었다.
도청 안 시체들 속에
전혀 소식을 몰라 걱정하고 있는데 군에서 근무중이던 셋째 아들 병선이가 어느 날 연락을 해왔다. 신문에 난 광주사태의 사망자 명단에 안병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꼭 동생 같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둘째 아들 병원이가 도청으로 가보았다. 정말로 우리 병복이가 죽어 있었다. 병원이가 시체를 찾아서 관에 넣었다. 우리 아들 관에는 '열사'라는 글씨가 박혀져 있었고 큰 태극기가 덮어져 있었다. 관은 빨간색 페인트가 칠해진 좋은 것이었다.
5월 25일이었다. 병복이가 들어 있는 관을 도청 사무실 입구에 두었다. 둘째 아들이 그날 밤을 거기서 보냈고, 둘째 며느리가 노잣돈 5천 원과 손에다 250원을 쥐어줬다. 제사도 지냈다.
5월 26일 도청으로 시체를 확인하러 갔더니 주위에 1백구도 넘게 태극기로 덮힌 관이 있었다. 학운동에서 세 식구가 몰살한 시체도 거기 있었다. 남자는 머리가 깨져 있었고 어깨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부인과 어린 아들도 죽어 있었는데 미처 입관을 해놓지 않아서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를 보고도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미확인 사상자도 보았다. 몸뚱이가 동강난 사람도 있었는데 얼굴을 알 수가 없어서 신발과 바지만 진열해 놓고 찾아가라고 했다.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
그날은 병복이 아버지가 도청에서 밤을 새웠다. 27일 새벽에 빨리 피신하라고 하는 말과 함께 도청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복이 아버지는 집으로 간다고 상무관을 빠져나왔는데, 65세나 된 노인이라 눈이 어두워 송정리 쪽으로 잘못 빠져나가버렸다.
그때 많은 군인 차들이 비아 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화물차 같은 것에 뭔가를 잔뜩 싣고 가는데 얇은 것으로 덮어진 트럭 포장이 펄렁펄렁해서 보니 시체들이 가득 실려 있더라고 했다. 그 시체를 실은 차가 두서너 대 지나간 부터는 시내 쪽에서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군인들이 어딜 가냐고 물어, "난 유동 쪽인데 삼각동을 가야 한다."고 했더니 계림동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새벽에 총소리를 듣고 쌍초상이 난 줄로만 알았다. 병복이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오후에 시체를 찾으러 다시 도청으로 갔는데, 도청 앞에는 임자 없는 시체가 많이 있었다. 다음날 서방 삼거리로 나오라 해서 거기로 갔는데, 시체들 옆에 새끼줄을 쳐놓고 못 들어가게 했다. 시체를 용달차에 싣고 기름종이 같은 포장만 덮은 채 망월동으로 싣고 갔다.
우리 가족은 보안대 차를 타고 망월동까지 갔다. 당시에 장례비 30만 원이 나오고 동사무소에서는 쌀 두 가마니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시에서 주는 4백만 원도 받았다. 1983년에는 1천만 원의 지급비를 받았다.
나는 처음부터 유족회에 가입하여 활동해 오고 있다. 유족회원에 대한 탄압은 심해 1981년에 1주기 기념 추모제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나주경찰서까지 연행된 적이 있었다. (조사.정리 서삼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