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 이어 아시아경기대회(AG)에서도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12월 30일 베트남 호치민에서 만난 베트남 국가올림픽위원회(VIE) 관계자는 “2019년 열릴 예정인 제18회 베트남 하노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현재 VIE가 고려 중인 정식 종목들 가운데 야구는 포함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덧붙여 “야구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즐기는 스포츠가 아닌 만큼 ‘반드시 아시아경기대회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다시 한번 말하지만, ‘2019년 하노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남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약속하기 어렵다’는 답변밖엔 들려줄 말이 없다”고 털어놨다.
만약 2019년 하노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돤다면 몇몇 야구 강국이 수년간 진행해온 ‘야구의 국제화’는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 여기다 올림픽 정식 종목 복귀 가능성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특히나 한국 야구엔 여러모로 치명타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국, 일본, 타이완에선 최고 스포츠. 그 외 국가에선 찬밥인 야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를 정식 종목에서 제외하자’는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야구의 지역적 한계’였다. 한국, 일본, 타이완에선 야구가 가장 대중적이자 선진화한 스포츠였을지 모르나 이들 나라를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선 그야말로 ‘스포츠 해외 토픽’에서나 볼 법한 낯선 스포츠에 불과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출전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동남아시아만 해도 야구는 먼 나라 스포츠다. 야구를 즐기는 층이 극소수고, 제대로 된 협회나 대표팀을 찾기도 어렵다. ‘동남아시아의 강국’ 베트남에서조차 정식 야구장이 단 한 곳도 없는 상태다. 동남아 올림픽위원회(NOC) 관계자들이 “한국, 일본, 타이완 등 극소수 나라에서나 유행하는 야구를 왜 전체 아시안의 축제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 일본, 타이완을 제외한 다른 참가국의 메달 획득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한국, 일본, 타이완, 중국 등 이른바 ‘A그룹’으로 통하는 아시아의 야구 강국들과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몽골, 미얀마, 베트남, 파키스탄, 아프칸니스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포함된 ‘B그룹’의 실력 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B그룹은 잘해야 한국 고교 야구팀 수준이고, 이보다 전력이 약한 나라는 한국의 사회인 야구팀 2부리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B그룹 국가들은 “국제대회에 나가봤자 메달은 고사하고, 망신만 당할 게 뻔한데 왜 야구 종목에 출전하겠느냐”며 야구에 심드렁한 표정이다. 여기다 일부 국가는 “우리가 뭐하러 한국, 일본, 타이완의 들러리로 참가해야 하느냐”며 반감을 나타내기까지 한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내년에 열리는 ‘2014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퇴출당할 뻔했었다. 2009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아시아경기대회 종목 수가 너무 많다. 2010 광저우 대회 때 42개였던 종목을 2014 인천 대회에서부터 소폭 줄이자”며 “앞으로 올림픽 종목 28개와 추천 종목 7개 종목을 더해 35개 종목으로만 대회를 진행하자”고 결정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인천 조직위는 28개 올림픽 종목에 광저우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싹쓸이 한 바둑과 역시 금메달 3개를 딴 인라인 롤러, 당구 등을 계속 정식 종목으로 놔둘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OCA의 거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소프트볼 역시 OCA가 크리켓과 가라테 추가를 요구하는 통에 정식 종목에서 제외됐다.
야구도 소프트볼처럼 ‘정식 종목 제외’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히 박용성 전 대한체육회 회장과 최종준 체육회 사무총장 등 한국 체육 관계자들이 OCA를 설득한 통에 겨우 정식 종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체육회 관계자는 “박용성 전 회장은 프로야구 두산 구단주, 최 전 사무총장은 LG와 SK 단장을 역임한 바 있어 야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었다”며 “덕분에 야구가 인천 대회에서 퇴출되지 않고, 정식 종목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회 주최국 프리미엄도 ‘야구 생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06 도하 아시아경기대회, 2010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때도 그랬지만, 대회 주최국은 올림픽 28개 종목을 제외한 다른 종목의 정식 종목 채택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체육회 관계자는 “만약 인천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2014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면 야구는 정식 종목에서 빠졌을지 모른다”며 “인천 조직위가 주최국 프리미엄을 활용해 끝까지 야구를 고수하지 않았다면 다른 종목이 야구를 대신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퇴출, 현실화활 가능성 매우 높다.
문제는 2019년이다. 그해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지는 베트남 하노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도 야구 발전이 가장 더딘 나라다. 야구장은 고사하고, 정식 팀도 없다. 베트남인들 대부분이 야구 규칙은 둘째치고, 야구 자체를 모른다.
정상평 전 탐라대 감독이 2000년부터 베트남에 야구의 꽃을 피우려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2011년 가까스로 사상 첫 베트남 국가대표팀이 조직되고, 그해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했을 뿐이다.
그것도 허구연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장이 몇몇 기업의 도움을 이끌어내고 자비를 보태 유니폼과 야구 장비 일체를 공급해주지 않았다면 ‘꿈’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특히나 허 위원장은 하나은행으로부터 지원금 2억 원을 받아 호치민에 정식 야구장을 짓는 등 베트남 야구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베트남 체육계는 “허 위원장과 정 감독이 없었다면 베트남 야구는 태동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두 이에게 감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씨앗이 뿌려진 베트남 야구에 비상이 걸렸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퇴출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치민 야구장 건설 진행 사항을 파악하려고 바쁜 연말 스케줄을 모두 미룬 채 베트남을 찾은 허 위원장은 기자와 함께 VIE 관계자로부터 ‘하노이 대회 야구 퇴출’ 소식을 들은 뒤 깜짝 놀랐다.
허 위원장은 “VIE의 계획이 현실화해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되면 야구는 그야말로 몇몇 나라의 공놀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올림픽에서 야구가 퇴출된 뒤 급격하게 야구 열기가 식은 중국의 예에서 보듯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제외되면 한국, 일본, 타이완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메달이 걸린 종목도 아닌데 야구를 왜 하느냐’며 가뜩이나 부족한 야구 지원을 대폭 줄일 게 분명하다”고 걱정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허 위원장은 야구의 아시아경기대회 퇴출이 한국, 미국, 일본 등이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야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복귀’에도 악재로 작용할까 걱정했다. 허 위원장은 “아시아에서마저 외면당하는 야구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다시 정식 종목으로 채택할 이유나 명분이 없다”며 “한국, 미국, 일본이 주도하는 ‘야구의 국제화’ 노력에도 제동이 걸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허 위원장은 “한국 야구가 걱정된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되고서 우리 선수들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아시아경기대회가 유일하다. 그러나 만일 하노이 대회에서 야구가 또 다시 제외된다면 사실상 야구 선수들의 병역 혜택 기회는 전무하게 된다. 여기다 하노이 대회에 자극 받아 이후 대회에서도 야구를 채택하지 않을 수 있다. 가뜩이나 경찰청 야구단의 해체 가능성이 대두되는 요즘, 병역 혜택 기회가 모두 사라진다면 유망주들이 계속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곤 상무밖에 없다.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퇴출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사안이다.” 허 위원장은 사견을 전제로 VIE 관계자에게 야구의 국제적 위상과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 등을 30분 넘게 설명하며 야구의 정식 종목 존속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 덕분인지 야구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VIE 관계자는 허 위원장의 설명을 듣고서 “전향적으로 (야구 존속을) 검토하자는 뜻을 윗선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VIE의 방침이 바뀌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제외가 현실화하는데도 아시아 야구 강국들의 반응이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야구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일본은 야구의 아시아경기대회 퇴출과 관련해 별다른 반응이 없다. 일본 내 아시아경기대회 관심도가 무척 낮을뿐만아니라 역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주로 사회인 야구 선수로 조직된 아마추어 팀을 보냈기 때문이다.
타이완은 야구 퇴출과 관련해 한국과 공동 대응을 취할 순 있겠으나, 국제적 위상과 외교력이 제한돼 OCA에서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올림픽 메달 종목 육성’에만 올인하는 중국 역시 야구가 올림픽에서 퇴출된 뒤 관심도가 크게 떨어진 터라, VIE의 방침에 별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 종목 퇴출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OCA 회원국은 사실상 한국이 유일한 셈이다.
허 위원장은 “베트남이 야구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야구가 제외될 확률이 대단히 높다”며 “야구의 국제화와 올림픽 정식 종목 복귀,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베트남에 야구 꽃을 피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퇴출이 현실화하고 있지만, 한국 야구계의 정보망은 어둡기만 하다. 허 위원장이 수차례 자비를 들여 베트남을 찾아 현지 야구계를 지원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퇴출 방안’은 한국 야구계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진행됐을 것이다.
허 위원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한야구협회 윤정현 전무이사는 “종합 대책을 강구해 야구가 계속 아시아경기대회 정식 종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베트남 현지 체육계는 “내년이나 2015년에 하노이 대회의 정식 종목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야구의 운명이 결정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