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시낭송진흥회(한시진) 원문보기 글쓴이: 한시진
다시 보는 저항시인 이육사
민족시인 연재 3번째로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중에서 ‘어둠 속의 별’로 칭하는 남성적, 대륙적 기품을 가진 이육사 시인을 상재한다. 이육사는 시인이자 항일 투사로서 불굴의 의지와 웅장한 기상을 담은 시를 남겼다. ‘교목’ ‘청포도’ ‘광야’ ‘절정’ 등 그의 시혼은 시간의 간격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 있다.
이육사(1905~1944),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 활(活). 경북 안동에서 나고, 북경 군관 학교를 거쳐 북경 대학에서 공부했다. 1933년경부터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37년에는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 을 발간하기도 했다.
21세 때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이후 17회에 걸친 옥고를 치르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북경의 감옥에서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하였다. 그의 호 육사는 처음 투옥되었을 당시의 죄수 번호에서 음을 땄다고 한다. 그의 시풍은 불굴의 지사적 기개와 고도의 상징성
및 언어의 절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46년에 유고를 모은 ’육사 시집’이 간행되었다.
.
<이육사와 같이 문학 활동을 한 문학가/이육사문학관에서>
■ 시세계
이육사의 초기 작품에서는 삶의 소망과 고뇌에 찬 추상적인 노래를 했다. 그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교목(喬木)>, <황혼(黃昏)>, <호수(湖水)>와 같은 작품이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육사의 시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현상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제 암흑기에 이르러 반제국주의 저항의 의지를 가졌다. <절정(絶頂)>, <광야(曠野). <꽃> 등이 대표작이다.
<이육사 초기의 삶의 소망과 고뇌의 시>
번민과 고뇌를 통한 보다 균형 잡힌 삶을 위한 몸부림인 교목을 음미한다.
교목(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지키고자 하는 결의를 노래한 시. 간결하고도 강인한 어조를 띤 구절들이 이육사의 시에 특유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차라리, 아예, 차마’ 등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어휘들이 많이 보인다.
이 작품은 상당히 어려운 편에 속한다. 작품의 핵심인 ‘교목’ 에 대해 시인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해석의 실마리로 하여 풀어 나가면 차차 극복될 수 있다.
교목이란 ‘줄기가 곧고 굳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이다. 비유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바로 이런 의미로 시인은 교목을 노래한다. 이육사는 교목에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하여 투영하는 것이다. 교목’은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시점에서 시인이 자신의 태도를 표현하는 사물이다.
제1연에서 그는 교목에게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라고 명령형으로 말한다. 이때의 세월이란 견디어 내기 어려운 시련의 시대. 즉 이육사가 살았던 식민지의 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끊임없는 탄압과 시련 속에서 때때로 연약해지려는 자신을 준엄하게 채찍질하며 그는 도저히 굽힐 수 없는 의지를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라는 것은 차라리 생명을 포기하여 봄이 와도 꽃을 피울 수 없을지언정 우뚝한 의지를 버릴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가혹한 시대에 맞서 자신의 길을 굳게 지켜 가는 것은 물론 외롭고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안락함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남의 눈에 뜨이는 영예로움 따위와도 관계가 없다. 그 쓸쓸함을 이육사는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라는 간결한 구절로 암시한다. 그러나 이 괴로움 가운데서도 그가 굳게 지닌 신념, 이상을 따라 꿈길에 설레는 마음에는 뉘우침이 없다. 현실의 시련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에게 차라리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3연에 이르러 그의 의지는 가장 강인한 결의의 높이에 도달한다. 견디기 어렵도록 황량한 시대에 우뚝 서서 자신의 곧음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끝난다 해도(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그는 올곧은 기개를 내버리지 않고자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스스로의 삶조차도 서슴없이 버릴만한 결의를 지닌 이의 신념이다. 마침내 호수 속 깊이 자신이 거꾸러진다 해도 그때에는 차마 바람도 흔들지 못하리라는 마지막 행은 그와 같은 확신의 굳은 매듭이다.
여기서 거꾸러진다 함은 죽음 또는 죽음을 포함한 극한적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바람’ 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흔들림을 일으키는 외부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상징적 소재인 ‘교목’이 사전적 의미로는 ‘ 줄기가 곧고 굳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 임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줄기가 곧고 굳다는 그 특성이다. 그것은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절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람’이란 바로 이와 같은 굳셈을 흔들고 굽히려는 바깥의 힘이다. 우리는 그것을 당시 이육사가 겪었던 여러 형태의 유혹과 시련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외부적 힘에 굽히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스스로 파멸할지언정 흔들리지 않고자 하는 의연한 결의, 이것이 셋째 연에 담긴 그의 생각이다.
이렇게 볼 때 ‘교목’이라는 상징적 사물은 바로 이육사 자신이 어려운 시대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던 삶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시인이자 민족 운동가로서 자신의 생애와 시를 한 덩어리로 결합하고자 하였던 그의 의연한 모습이 여기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참고:金興圭 /현대시를 찾아서)
<이육사 사회와 역사의 시>
시 중에는 현실의 문제, 역사의 문제를 여느 작품보다 큰 비중을 두는 것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아름다운 이상적 전원의 삶을 노래한 작품에도 그 나름의 현실을 보는 태도와 행동이 깃들어 있지만, 일단 사회와 역사를 노래한 시라고 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소재 또는 주제를 명백하게 나타난 작품들이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 ▪ 절정▪ 광야 등이 그러한 시들이다.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칠월(七月)은
..... 이하 생략......
절 정(絶頂)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
이 시는 견디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을 넉넉한 관조(觀照)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강인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한 걸음의 물러섬도 허용되지 않는 극한의 긴장 속에서 한 사람의 투사가 자신이 서 있는 상황을 노래한 시이다.
제1, 2연에서 그가 놓은 외부적 상황의 모습은 점층적(漸層的)으로 더 날카로운 것으로 좁혀진다. 그 순서는 ‘북방-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 위’로 진행된다. 그러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에 서게끔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징적으로 ‘매운 계절의 채찍’이라 표현된다. 매운 계절이란 일차적으로 겨울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면 또 겨울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혹한 추위가 지배하는 시간이며, 모든 생명이 죽음 속에 묻히거나 활동이 정지되는 시련의 시기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우리는 그것이 일제하의 고통스런 시련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라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 1연은 이 냉혹한 고통의 시대에 이육사 자신이 겪어야 했던 방랑과 잠행(潛行)의 경험을 압축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날 만큼 높고 황량한 고원에 다다르고, 그중에서도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긴장된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 극한의 자리는 지리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그가 겪어야 했던 삶의 한 긴장된 국면을 뜻한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 극한적 상황은 너무나도 날카로운 것이기에 그로부터 비켜나거나 물러서는 일이 불가능하다. 또, 그 어떤 외부적 힘과 기대에 괴로움을 덜 수도 없다. 그것을 시인은 제3연의 단 두 줄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 대목에 보이는 바 무릎을 꿇는 행위는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인 힘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외로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는 일을 의미한다. 극한의 긴장과 괴로움 속에서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극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일도 불가능함을 이육사는 말한다. ‘서릿발 칼날’과 같은 위태로운 높이에 선 그에게는 한 발을 옮겨 디딜만한 여지조차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자신의 강인한 의지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가진 보통의 인내력을 넘는 이 극한적 긴장의 상황에서 그는 차라리 담담하게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순간 너그럽게 관조하기까지 하는 여유를 가진다. 이와 같이 관조의 순간에 겨울, 즉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상황은 그에게 싸늘하고 비정하면서도 황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강철과도 같은 차가움과 비정함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무지개의 환상적 빛깔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을 가진다.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자신의 생애를 던지면서 그는 그 고통을 차라리 아름답고 황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 다소 어려운 표현이 되겠지만 그와 같은 경지는 ‘비극적 황홀’(김종길 교수의 해석)이라는 말로 선명하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는 삭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배경으로 강인한 지사적(志士的) 의지를 노래한 작품이다. 웅장한 상상력과 남성적 어조 그리고 의연한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배경의 웅대함으로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규모가 크다는 것이 반드시 문학적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라고 하면 으fp 연약하고 섬세한 것을 연상하는 일반적 기대에 비추어 이와 같은 특징은 일단 주목할 만하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아득하게 넓은 평야, 시간적 배경은 천지가 처음 열리는 까마득한 태초에서부터 머나먼 미래에로 이어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나누어 보면, 제1 ~3연이 과거를, 제4연이 현재를, 제5연이 미래를 각각 노래하고 있다.
제3연까지의 부분에서는 광야의 원시적 순수성에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강물이 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까다로운 문제는 제1연의 마지막 행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의 해석이다. 일반적인 설은 이 구절을 일종의 수사적 의문(설의법)으로 보아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겠는가? 들리지 않았다’의 의미로 풀이하고, 이에 덧붙여 닭 우는 소리란 인간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고 할 때 제1연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적 상태의 광야를 말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들렸으랴’를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닭 우는 소리는 사람들의 생활과는 연상적 관계가 없는, 다만 어떤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소리로 이해된다. 나로서는 둘째 설이 더 그럴 법하다고 여기나, 그것만이 반드시 옳다고 단언할 만한 확신이 없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보든 이 대목이 신비롭고 웅대한 태초의 광야를 노래한 것이라는 점은 같다.
제2연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산맥들의 모습을 살아 있는 동물의 움직임처럼 인식하면서, 그것들이 차마 침범하지 못한 광야의 광활함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웅장한 터전에 마치 꽃이 피고 지듯 무수한 계절이 지나간 뒤 비로소 강물이 흐르고 길이 열렸다.
만물이 눈에 덮여 있는 가운데 이 넓은 광야에 매화의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게 풍겨 온다.(매화 향기에 봄을 결부시키고, 아득하다를 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조국 광복의 미래가 멀다’의 의미로 보는 통설은 그릇된 해석이다. 그럴 경우 ‘홀로’라는 말의 뜻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매화 향기는 만물이 눈 속에 굴복한 가운데 고고하게 피어 있는 강인한 의지의 상징이며, 이 부분의 ‘아득하다’는 ‘그윽하고 은은하다’의 의미이다.) 이 분위기는 앞 부문에서 전개되어 온 광야의 모습을 좀 더 숭고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 선 인물의 외로움을 암시하여 준다.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 더욱이 눈 덮인 겨울의 광야에 서서 무한한 과거의 시간과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고독한 것이면서 그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곧게 세우도록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매화를 추위 속에 피어나는 무서운 기개의 상징으로 여긴 전통적 연상이 관계되어 있다.
강인한 의지로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며 서 있는 이 자리에 ‘나’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일체의 생명이 용납되지 않는 냉혹한 시련의 상황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혼자서 뿌리는 씨앗이기에,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혹한 현실 상황)를 무릅쓰고 뿌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가난한 노래의 씨앗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광막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억센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내고자 하는 의연한 결의가 담기어 있다.
그러면 그가 뿌린 외로운 노래의 씨앗은 누가 거둘 것인가? 그것은 대체 싹이나 틀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냉혹한 시련만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기며 싸워야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성패(成敗)여부가 아니라 달리 선택할 길이 없는 그 필연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연에서 노래한다. -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여기에 보이는 ‘초인’을 ‘조국 광복’의 의미로 해석하는 통설은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조국 광복이 ‘천고’의 뒤에나 이루어진다고 그가 믿었단 말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한 고독한 투사가 자신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떠올려 본 아득한 미래의 비전이 아니었는가 한다. 그것을 산문적으로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이 싸늘한 상황에서 뿌리는 노래의 씨는 먼 미래의 어느 때보다 큰 힘을 가진 이에 의해 우렁찬 소리로 이어지리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의 사이에 서서 눈앞의 성패에 매어달리지 않고 스스로를 내어던지고자 하는 결의를 이와 같이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가장 강인한 순간에 전통적 유학자들이 보여 온 서릿발 같은 기품과 의연함을 연상케 하는 태도이다.
이육사는 시인이면서 항일 투사였고, 따라서 그의 시를 민족 해방 운동과 관련시켜서 이해하려는 접근 태도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미묘한 구절만 있으면 ‘조국 광복’등의 풀이를 마법의 열쇠처럼 들이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황하게 설명하고도 충분히는 말하지 못하였지만, 이 작품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 외로이 싸우며 살아갔던 한 사람의 투사가 어떤 고립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노래한 시이다. 그의 웅장한 상상력, 남성적 어조, 의연한 기품 등은 이와 같은 비극적 결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참고자료:金興圭(현대시를 찾아서).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