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고래잡이 장생포
동해나 울산에 가면
고래를 잡았다는 장생포가 있다
고래등 같은 대궐집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동해에서의 고래잡이가 꼭 일제시대에서 시작된 것만
아닐것이다
유년시절
녹음이 짙은 들판 사이로
남풍이 부는 날이면 간간히 뱃고동 소리가 들렷는데
그 소리가 넘 신기해서 할매에게 물어보면
우리 할매는 마치 고래잡이를 한 어부처럼
고래에 대한 장대한 설명과 함께 마당 높이 걸쳐진
빨랫장대를 가리켰고
난, 그 이후로 고래가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줄 알았다
지금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를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기는 집안이라
우리할매가 장생포에 갈리도 고래잡이 구경을 했을리도 없다
단지 덕하장날이면 고래고기를 팔려오는 장사치들의 이야기를
훔쳐듣고선 꼬마손자에게 들려줬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시절엔
시골의 5일장이 명물였다
울산장을 시작으로 고살장 덕하장 남창장 목도장이 차례로 열렸는데
우리 중간고모는 덕하장터에서 보릿살을 팔았다
고모부가 시골부잣집의 머슴을 살았는데
기력이 점점 약해서 일년 머슴삭이 나락(벼)으로 스너섬(가마니)이 줄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보릿살장수를 시작했다는데
정확히 언제부터했는지는 내 기억에 없는걸로 보아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한것 같다
덕하에서 울산까지는 30리길이라
울산장날이면 촌로들은 덕하역의 탱자울타리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선 무임승차로 열차를 탔다
나두 엄마를 따라 몇번을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무임승차를 한 기억이 있는데
제국을 입은 역무원들이 차표 검사를 하기라도하면
일본순사보다 더 무서워서 오줌을 살뻔한 기억도 있었다
이 기차길이 바로 동해남부선으로
울산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며 중간에는 미역으로 유명한 기장,해돋이와
백사장으로 유명한 해운대를 지나간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간이역마다 서는 비둘기를 타고 부산까지 기차여행을 하노라면
서민들의 애환이 거기에 다 있기도했다
1970년대 초에 울산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고살장도 사라졌지만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생포 가는 길목에 있는 고살장은
무임승차할 기차도 없기에
10년 터울의 사촌형과 3살 위의 친형 그리고 나는
보리살을 실은 리어카를 몰고 20리길 고살장으로 갔다
신작로에는 간간히 제모시 트럭이 지나가면 온통 흙먼지가 날렸지만
낮선 풍경과 장터의 풍물들을 본다는 것은 항상 신기할 따름였고
고개를 어렵게 올라 내리막이 나오면
보릿살 가마니 위에 타고 신나게 달리는 재미가 솔솔햇다
돌아오는 빈수레에는 보릿살 대신에 어린 허송이 타는 건 당연했지만
덤으로 점보새우깡이나 밀가루 떡을 먹을수도 있었기에
고살장에 따라다니는 것은 크나큰 행운였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고래잡이 장생포를 지척에 두고도
구경 못했다는 것이~~
아마두 그시절 먹고사는 일이 젤 큰 일이여서 겠지...
몇년 전에
내 나이 사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장생포를 찾았다
이미 국제포경금지조약으로 인해
포경선은 초라하게 포구의 외진 곳에서 흉물이 되었고
고래고기를 팔던 식당들은
하얀 먼지를 덮어선채 깨어진 유리창은 굳게 닫힌지 오래였다
단지 고래가 그려진 낡은 간판이
이곳의 과거를 대변할 뿐였다
우리할매가 들어준 과거의 전설이 무너지는 순간였지...
** 국제고래포럼이 울산에서 열였고
흉물로 세월의 비를 맞고있는 포경선과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고래뼈 등으로 고래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최근 급급히 늘어나는 고래 매체수의 증가로
어망에 걸리는 고래가 시중에서 팔리는 경우가 많아
장생포의 과거명성이 점점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 휴가철에는
고향을 다녀오면서 어린애들에게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들려주고파서
장생포를 다녀왔다
다행히 포구의 오염된 바닷물은 옛 푸른빛으로 파도를 일으켰고
부족했지만 고래박물관은 짜임새가 있었다
아마도 우리애들이
고래에 대한 더 많은 정감을 얻었을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고향인 울산에 고래잡이 장생포가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도 생각하겠지
고래잡이의 전설은 언제다시 시작될지...
우리애들이 아빠의 나이가 될쯤엔
고개잡이가 과거의 전설이 아니였음~~~
우리할매가 들어준 고래의 전설을
우리애들이 대를 이어 들려줄수가 있을까~~~~~
첫댓글 지금부터라도 아빠시대의 전설 만드심은..할매의전설로 인해 나고목님 가슴속은 따뜻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