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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미주 여행기
(들어가는 말)
나는 이번 40일간 미국과 캐나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 ‘한국 놈과 미국놈’이라는
논설문을 쓴 적이 있다. 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이 글을 써놓았는가? 이유가 있다.
왜 한국은 후진국이며 미국은 선진국인가에 대한 나름의 판단 기준을 세우고 싶었다.
왜 그들은 잘 살고 우리는 못 사는가 그 차이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작년 말부터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나라에 과연 정의가 살아 있는가
/ 이게 정말 나라인가? 라는 정치인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온 국민이 저항하는 촛불집회가
일어나서 급기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한 순간에 망가진 것이다. 이런 현실을 그냥 보고만 있으니 너무나 한심했다.
과연 얼굴을 재대로 들고 해외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망상에 빠졌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후보가
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 앞으로 정치를 잘 하는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현장에서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현실을 비교 분석하고 싶었다.
미국 뉴욕시티와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다양한 체험 여행기를 올린다.
이민 50년의 피어린 애환
(우리 집의 역사를 처음 공개한다)
캐나다에 사는 친동생의 이야기다. 6남매 중 둘째인 남동생은 대학을 들어갔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장남인 내가 대학 4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다음 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마저 기관지확장증으로
쓰러지셨다.
하루아침에 잘 살던 집안이 풍비박산 되었다. 7식구 대가족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며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은 집안 살림을
해야 했고 그 밑에 남동생 둘은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결국 남동생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대 후에 알바 직장을 구해 근근이 연명했지만 희망이 없었다.
그 때 캐나다에 이민 가신 고모부가 초청장을 보내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산가족이 된지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동생은 평생을 멀리 타국에서 돈을 벌고 매달 집에 돈을 부쳐 겨우 아래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또 지금은 막내 동생이 25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에서 같이 살고 있다.
동생 두 명이 캐나다로 이민 가서 이번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혈육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제는 70이 넘은 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더욱이 80대 후반에 들어선
고모부 내외의 안부도 직접 알고 싶은 마음이다. 연세가 많고 건강이 악화되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므로 마지막으로 찾아뵙고 싶었다.
동생은 건강하게 부지런히 잘 살고 있었다. 평생 경영하던 생업에서 은퇴한 후 5년 전에는
온타리오주 주의원으로 출마하기도 했고(나는 3개월간 동생 선거운동을 지원한 적이 있다)
토론토 한국일보사 전무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한인사회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한 달 동안 동생 집에서 머물면서 오랜만에 형제간의 정을 나누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토론토에서 2시간 거리인 런던에 사시는 고모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눈도 실명하고
걷지를 못하며 밥도 못 지어먹을 정도다. 고모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며 매일 80대
부부가 티격태격하고 산다. 물론 자식들이 여럿 있지만 각자도생으로 어쩌다가 와서
식사 한번 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고모부 댁에서 머물면서
잔디와 꽃이 무성하게 핀 정원을 깨끗하게 정리해드리고 왔다. 3년만에 처음이라고 좋아한다.
이주민 1세들의 현지생활
이민 1세들은 어찌 사는가? 그게 궁금하다. 이곳 북미주에 내 형제 친척이 10집은 된다.
처음 고모와 동생이 제일 먼저 이민 간 연유로 일가친척들이 줄줄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 거주하는 작은 어머니는 금년에 8순이 되어 8순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갔다. 사촌 여동생은 뉴욕한인교회 목사 사모고, 남동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로 재직한다.
나는 1주일간 캐나다에서 먼저 동생 집을 다 들러본 후 승용차로 미국 국경을 넘어
12시간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갔는데 뉴욕시티부터
러시아워에 걸려서 지체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지는 저녁에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
다음 날 8순 잔치는 가까운 한인촌에 있는 훌러싱 ‘산수갑산’ 에서 운영하는 리셉션 하우스
에서 치러졌다. 뷔페식 음식상과 무대가 있는 소극장 같은 연회장에서 20여명이 모여
예배시간, 동영상 관람, 성악과 거문고 연주회, 가족인사, 사진 촬영, 노래자랑과 합창으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여기 모인 12명이 우리 형제와 사촌 형제 조카 집안이다. 모두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로 다시 돌아온 후 고종사촌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마침 조카딸이 생일이라 친척을
초대하여 식사를 한다. 이곳은 토론토 다운타운 근처의 구급주택가에 위치하며 프랑스인
부인이 장만한 서양 음식이 가득 찬 거실에서 먹었다. 육류 해물 과일 크림 와인 등 음식
종류가 다양하고 처음 보는 것들이 많다.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합창하며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정원과 방을 오가며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즐긴다. 이 집은 완전히 서양 냄새가 났다.
여기서 만난 ‘해밀턴’ 할머니는 연세가 90이 넘으셨다. 예전에 만나서 여러 번 밤늦게
고스톱 화투를 친 적이 있는데 얼마 전에 그만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하셨다고 한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걷기가 불편해서 부축을 받는다. 여기저기서 이민 1세대 어른을
만나면서 나는 남의 일이 아님을 절실히 느낀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앉았다
일어나기 힘들어 ‘아이고’ ‘아이고’하며 움직이기 싫어한다. 나이를 속일 수 없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한인교회의 교세와 현실
오늘은 주님을 모시는 주일이다. 아침 일찍 준비해서 맨 막내 동생이 다니는 ‘토론토
염광교회’를 찾아갔다. 1부 예배인데도 입구부터 많은 신도가 들어왔다.
장로님과 인사 후에 들어가니 커다란 예배당에 남녀 10명의 찬양대가 우렁찬 성가를
불러 환영했다. 예배순서는 경배와 찬양, 입례찬송, 기원, 교독, 영광송과 기도,
찬송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김인철 목사의 설교가 있었다. 오늘은 작은 개척교회에
재직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의 삶 기도의 삶’을 주제로 명 설교를 했다.
멀리 한국에서 왔다고 나를 소개를 하며 새 신자실로 불러 다과를 대접하였다.
대개 개신교 개척교회는 신도수가 50명이 넘어야 자급자족 운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는 300명이나 된단다. 원로목사 담임목사 부목사가 3명 후원선교사가
3명인 아주 잘 되는 교회다. 토론토에는 1000명이 넘는 대형교회가 큰빛교회,
영락교회, 소망교회 3군데나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가서 고교 동창 집에 있다가 주일이 되어 여동생 목사 집으로 돌아와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뉴욕 민족운동과 유학생의 거점이었던 ‘뉴욕한인교회’는
뉴욕의 중심부 맨하탄에 위치하고 있다. 1921년 3.1운동 2주년을 맞아 뉴욕 타운 홀에서
열린 한인연합대회에서 서재필 박사가 제안하여 세워진 감리교회며 그동안 60여명의
유학생 기숙사로 이용되었고 이승만대통령, 조병욱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산실 역할을 한 곳이다. 인근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교에 한국도서관을 창설하였고
교회 학생을 주축으로 ‘재미조선 문학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문화를 홍보하고
학생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건물이 노후하여 그 자리에 새로 신충중이고 미국교회를 임시로 빌려
예배를 보고 있다. 주일 예배순서는 예배기원, 교독문, 성가대 노래에 이어서 말씀 선포
“ 또 다른 탕자” 설교가 있었다. 땀이 줄 줄 나는 무더운 여름인데도 꽉 들어찬 신도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 인사하기 바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예배 후에 친교실에서
맛있는 빵과 음료를 먹으면서 떠날 줄 모르고 생기가 넘친다. 이 교회는 2017년 본당
건축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특별히 자연 보존부, 전도 선교부, 가족수양회를 두어
한마음 한 뜻으로 세계 만방에 주님의 은총을 전도하는 ‘ 창조세계 지키기’ 환경 캠페인을
열고 있었다.
캐나다의 동북부 스카보로 카운티 ‘엘스미어 로드’에 ‘성 토마스 모아’ 천주교 교구
성당이 있다. 나는 매일 아침에 조깅을 하며 달린다. 조깅에서 돌아오다가 발견한
이 성당을 주일날 찾아갔다. 주일은 8시반, 10시, 11시반, 저녁 8시 하루 네 번 미사가 있다.
건물이 납작한 단층으로 돌로 지어졌고 십자가에 입구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이곳은 변두리라서 외국인, 동양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성화가 걸린 성당은 엄숙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도가 한분 두분 들어오더니 금방 200여석을 꽉 채웠다.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총무, 성가대가 있으며 주일 오후 2시에는 스페인어 미사가
따로 있다.
천주교는 전 세계에서 동일한 시간에 똑 같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진행된다
. 조용하면서도 장엄한 미사가 끝나고 나와 보니 주변에 이 성당이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보인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신교와 구교의 신도수가 역전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예전과 달리 개신교는 맥을 못 추고 대신 로마 가톨릭이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오대호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
캐나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서 우리 한반도의 45배 크기다.
엄청나게 큰 땅에 인구는 3000만명 정도다. 가장 잘 사는 나라요 누구든지 이민가고
싶어 하는 나라다. 북쪽은 동토의 땅이므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미국과 국경을 이루는
온타리오주 남쪽 오대호 부근에 집중해서 산다. 10개주와 2개의 직할 군주로 구성되어 있다
.
원래 영국령이었던 캐나다는 1867년 영국 국회가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을 만들어 연방
정부가 최초로 세워져 금년이 건국 150주년이 된다. 형식상 수반은 영국 총독이지만
실제로는 캐나다 수상과 내각이 지배하며 연방의회는 임명제인 상원과 선출제인 하원으로
양원제를 두고 있다.
캐나다에는 유명한 오대호가 있는데 서쪽부터 슈피어리어호, 미시간호, 휴런호, 에리호,
온타리오호가 차례로 분포되어 있다. 호수가 너무 커서 바다와 같이 파도가 친다.
이번에도 여기를 몇 군데 가보았다.
동생집 근처에 있는 온타리오 호수의 ‘길드우드 파크웨이’ 공원을 시내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중도에 버스를 갈아타고 30분 만에 호숫가에서 내려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어서 해변을 찾았다. 날씨가 쾌청해 햇볕이 내리 쬐고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러기 떼가 일렬로 떼 지어 날아가고 주변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산책길이다. 가까운 곳에 ‘길드파크 엔드 가든스’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웨스트 사이드’
여관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 한참 공사 중이며 뒤에 있는 정원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집 주인이 수집해온 각종 건축물의 기둥이 많이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호수의 풍경이 아름다워 주민들의 휴양지로서 별장이 가득하다.
토론토 남서쪽 대안에 있는 나이아가라( Niagara Falls)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막내 동생이 벌링톤에서 승용차를 몰아 2시간만에 폭포 앞에 도착했다. ‘에리’ 호수에서 흐르는 물이
고트 섬에 부딪치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관이다. 미국 쪽 폭포가 있고 그보다 크고
웅장한 캐나다 쪽 폭포가 보인다.
우리는 ‘테이블 룩 하우스’ 근처 전망대에서 구경하다가 맥도날드 가게에서 간단히 토스트와
음료수로 요기를 한 후 천천히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으며 감상했다. 날씨가 좋아서 폭포수는
하늘 높이 치솟아 물안개가 자욱하다.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30분 동안 걷다가 ‘퀸 빅토리아’ 공원을 지나 배를 타고 폭포수 밑으로 가서 구경하는
보트투어를 선택했다. 유람선 선착장에서 티켓을 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물론 여기서 나누어주는 붉은 색 비옷을 입고 미국 폭포수 앞을 지나 캐나다 폭포 아래서 50여명의
승객들은 물세례를 맞으며 비명을 질렀고 갑자기 배가 흔들려서 옆 사람과 충돌했다.
여름철 시원하게 피서를 즐기고 30분만에 돌아왔다. 나의 나이아가라 여행은 이번이 3번째 구경이다.
캐나다의 국립공원 보존 관리
그 후에 캐나다 사람도 많이 못 가보았다는 숨은 보석 터버모리(Tobermory)를 갔다.
벌링톤에는 90% 비가 온다는 소식이라 여기를 빠져나가기로 하고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
. 서북방향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산은 하나도 안 보이고 평야지대다. 차로 4시간 거리다.
툭 튀어나온 브루스 반도의 땅 끝에 있는 ‘터버모리’는 최근에 유엔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만큼 희귀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현재 캐나다의 국립 해양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우리는 조지안 베이(만)에 있는 브루스반도 국립공원의 일부를 구경하러 관광안내소에
들러 자문을 받았다. 여기서 추천해준 최고의 비경 ‘인디언 헤드 코브’를 찾아 좁은 산책길로
들어섰다. 곧 전망대가 나와서 4층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이 부근 등대와 호수,
울창한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작은 섬들이 예쁘게 누워있고 작은 배들이 지나간다.
이 곳은 평일 날은 관광객이 적어서 ‘호스 레이크’를 지나 간신히 목적지를 찾았다.
바닷가에 해식동굴과 책바위와 너른 마당바위가 펼쳐진 곳에 오니 사람들이 많이 놀고 있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의 풍경은 탄성을 자아내고 물놀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바위가 석회암지대라서 구멍이 뚫린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브루스 트레일 코스는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총 27킬로가 이어진다고 한다.
캐나다의 국립공원은 어디를 가든지 자연 그대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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