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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긴급토론: 하백녀 류화란?
김자 추천 0 조회 444 06.11.11 21:59 댓글 3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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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11.11 22:26

    첫댓글 출장 갔다 오셨군용^^,,, 보구 싶었는뎅,히히~~~~

  • 06.11.15 21:29

    건강하신 모습으로 뵈니 기쁩니다^^

  • 06.11.11 23:38

    아 출장 다녀오셨구나..저도 보고싶었어요..ㅎ

  • 06.11.12 00:42

    이미 '유화(柳花)'는 '하백녀(河伯女)' 즉, 하백의 딸로 일반 대중들이 알고 있다 하시니, 김자님의 그 파격적인 의견을 먼저 말씀 하시면 거기에 대해 질문들을 할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 기다림에....^^ 일단은 추측 하길 물의 신 이라는 '하백'은 강가 저지대의 '초기농경, 어업지역'의 정착인들의 우두머리 이고, 류화의 남편 즉.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내륙 건조, 산악 지역'의 유목 기마인(Nomad)들의 우두머리(의 아들)로 봅니다. 근세에 까지 그래왔듯 유목민들은 숫적으로 부족한 여자를 농경 정착민들 에게서 구하는(포로, 납치, 공출)것이 본능 이죠. 그리고 인종적으로는 하백 과 그의 부족을 '고아시아'계로 보고....

  • 06.11.12 00:52

    해모수와 그의 부족을 '천신'을 믿는 몽골계(퉁구스계)로 봅니다. 그리고 두 지도자의 장시간에 걸친 마술 대결로 사투를 벌였다는것으로 보았을때는 하백녀 류화는 하백의 딸이 아니고, 하백의 여자 즉, 처나, 애인, 궁녀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우리는 유교의 필터를 통해야만 그 이전을 볼수 있지만 그 당시는 유교의 모럴이 아예 없을 때 인지라 공주를 상대국 왕자 에게 시집 보내는데 장인,사위간에 그런 혈투를 벌였을까? 하는 추측 입니다. 고로 저는 유목민들이 태고적 부터 늘 행 해왔던 아주 본능적인 여자 구하기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

  • 06.11.12 01:08

    '요하' 인근의 이들도 몽골인들의 간섭을 피해 동토의 '흑룡강' 중류 까지도 이주 했죠. 참고로 古아시아 족의 대표적 종족인 '숙신,읍루' 이야기를 보면 "강가에 사는 이들은 그 모습이 물고기와 같다. 물 속에서의 움직임은 물고기와 같고 물 바깥에서는 물고기 껍질로 의복을 지어 입었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강상(江上)' 문화를 엿볼수 있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공 정부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며 흑룡강(아무르강)위에 선상가옥을 짓고 사는 이들의 후예들은 그들의 주 수입원인 점점 멸종 돼가는 철갑상어와 함께 멸종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을 물의 신 '하백(河伯)'의 후예들로 보고 있습니다. ^^

  • 작성자 06.11.12 12:05

    ^^존경하는 홀필렬님께서 이미 제 답을 그대로 옳기신 듯 합니다.^^ 저는 하백(河伯)을 사람 이름으로 보지 않고 류화 부인의 신분으로 해석해 봤습니다. 홀필렬님 말씀처럼 ... 하백의 여자...... 그렇다면 하백은 무슨 뜻인가.

  • 작성자 06.11.12 12:19

    제 특기(?)인 파자(破字)로 풀어보지요.... 하(河)는 물(水)+ 먹다(口)+ 못= 낚시 (丁)의 합성입니다.... 그리고 백(伯)은 사람(人)+ 흰(白)의 합성이지요... 이를 정리하면 '강가에서 낚시로 연명하는 하얀 사람...' 즉 백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 작성자 06.11.12 12:11

    언젠가 홀필렬님께서 올린 글 중/ 여진 여인이라는 내용의 글이 있었죠? 그 여인은 분명 백인에 가까웠지요? 저 또한 저의 친척이 백인에 가까운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고향이 함경도 함흥 분으로....... 잠깐 동안 느낀 생각을 정리한 글임을 이해하시고... 많은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 06.11.12 12:25

    ^^무척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군요. 당시는 모계 사회로... 여성이 가장(家長) 역할을 하던 시대임을 잊으면 안됩니다.이런 견지에서 저는 이름이 전하는 당시인들을 모두 남성으로 해석하는 걸 경계합니다. 분명 가정의 중심이 가장에게 있으니 어느어느 가정을 그릴 때 집안의 어른인 여성을 중심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하백을 류화 부인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추정도 갖고 있음을 밝힙니다.

  • 06.11.12 13:31

    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인것은 사실 입니다. 그래도 바깥일은 남자(전투, 사냥, 일벌, 일개미)들이 주로 했겠죠. 여자들은 자손 번식(노동력 생산, 여왕벌, 여왕개미)의 특권으로 특별 보호 대상 으로서의 신격화(?)까지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부여인들은 유목 과 농경을 함께 했다 합니다. 즉, 반도의 농경 기술이 北上 하고 대륙의 유목이 南下 해서 만나는 지역 에서의 자연스런 생활 형태 입니다. '류화'와 '해모수'와의 결합은 이런 즈음을 상징하는 역사(신화)적 표현 이라고 봅니다. 고대인들은 늘 북쪽을 하늘(天), 위(上)로 두었죠. 그이유는 이미 북극성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고인돌에 이미 북극성을 음각 해놨었죠. ^^

  • 06.11.12 13:46

    그래서 북쪽에서 내려온 해모수는 '天神(의 아들)'으로 표현 되고, 강(江)가의 저(低) 지대에서 농업 과 어업으로 살던 '하백'은 '水神'으로 표현 된것 같습니다. 후일 부여인들은 남쪽의 '고구려', 서쪽의 '오환,선비족', 동쪽의 '읍루족'들로 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하자 결국 요하와 압록강 중류에서 그 맹위를 떨치던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여 들어오죠. 아마 그것이 훗날 고구려가 엄청난 군량미(농업 생산)와 함께 다시 고대 부여의 땅인 '동 몽골' 과 동 부여와 읍루의 땅인 '흑수말갈' 지역 까지 확장 할수 있었던 원동력(당시로서의 구토 회복^^)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봅니다. ^^

  • 작성자 06.11.12 15:39

    ^^저는 모계사회의 특징을 일처다부(一妻多夫)로... 부계사회를 일부일처(一夫一妻)로 추정합니다. 따라서 유교사상 (一夫一妻) 을 바탕으로 고대를 해석하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처다부란? 한 여성을 중심으로 여러 남정네가 어울려 사는 형태로 주로 목축(사냥)을 하던 민족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는 생각입니다. 사냥은 짐승과 벌이는 싸움이 기본이지만... 사냥꾼끼리도 다툼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영역다툼이아먈로 그들이 목숨을 내던질 만큼 중요한 행위겠지요...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모계사회를 형성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일찌기 농사법을 깨달은 종족은 일부일처 즉 부계사회를 형성했겠지요.

  • 06.11.13 01:07

    그렇죠! 제가 위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유교적 필터를 통해서는 진정한 모습의 그 너머를 볼수가 없죠.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모계사회는 일처다부(一妻多夫), 부계사회는 일부일처(一夫一妻)로 비춰져 왔습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모계'에서 '부계'로 넘어 올 시기(짧은 기간은 아니었지만)에 나타난 유교가 '일부일처'를 강력히 주장한 이유는 '부계중심' 초기에는 남성의 힘에 의한 지나친'일부다처(一夫多妻)'가 있었기에 '동종(同一 精子)'의 번식으로 많은 혈통의 혼란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 그것을 느낀 '철학자(고대의 철학자는 곧 과학자 이기도 하죠)'들이 소위 엄격한 유교적 기준을 제창 했다고 생각 합니다. .....^^

  • 06.11.13 01:12

    우리 한민족 형성 과정 중 에서는 그 혼란의 전환 시기가 지역의 특성상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해모수'가 자기 구역을 넘어서 까지 다른 부족의 우두머리의 '딸 혹은 처'였을 '류화'를 범하여 '주몽'을 생산 할 정도 였으니까요. 반면에 고구려가 어딜봐도 남성적인 힘으로 세상을 호령 할수 있었던것은 유목민 들에게서 볼수 있는 '모계의 안정감'이 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후 신라, 고려, 이조 까지도 세계적으로도 '前無後無'한 한번 정권에 '기본이 500年'을 할수 있었던것도 각 정권 내부의 '모계의 안정감' 때문 이라고 생각 합니다. ^^

  • 06.11.13 01:22

    유목민의 특성인 '모계사상' 과 정착 농경민의 '부계 사상'이 잘 결합된 결과라서 그럴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 현재도 몽골 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 합니다. 즉, 여자를 꼭 지킵니다. 유목 선비족의 후예인 唐고종 과 '측천무후'의 관계, 唐현종 과 '양귀비'의 관계등이 유목민들의 습성을 잘 말해줍니다. 심지어 현재도 북한 사투리로 남편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조선족, 만주족들도 그렇게 사용 합니다. 전형적인 유목인들의 특성을 대변 해주는 것이죠. 씨앗을 심고 떠나는 자들 이란 말이죠. 반면에 정착 농경인들의 후예인 남한,일본인들은 남편을 '주인(主人 슈진)'이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 06.11.13 01:39

    저는 우리가 썩은 유교적 모럴에 지배당했다고 하는 이조 500년도 잘 살펴 보면 여자들의 세상 이었다고 봅니다. 이조의 왕들은 대체로 빈 껍데기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조비, 대비, 중전, 비, 빈, 정경부인 등의 여인들은 그 유교를 교묘히 이용 하여 아비 보다는 어미에게 하는'孝'가 훨씬 많았습니다. 아비들은 '忠'을 내밀면 '自繩自縛'격으로 아무말 못했죠. 현실적 으로는 남자는 일체 '곳간 과 부엌'에 못오게 하고 그 안에서 모든 역사를 다 만들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곳간 과 식당'의 열쇠를 쥐고 있는 者에게 큰 소리 칠수 있는 자는 없었죠.'河伯女 柳花'의 이야기가 멀리도 왔군요. ^^

  • 06.11.14 13:19

    河에 비해 작은 물줄기인 江은 물水에 장인工 즉, 물水는 뜻의 의미이고 장인工은 음의 의미로 알고 있었습니다.... 큰 물줄기를 가리켜 河라 하고..물水에 옳을 可...여기서 물水 또한 뜻을 따르고 可는 음을 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참 흥미로운 지적이군요.....언젠가 누군가에게 듣기로... 양자강은 공공공~~소리를내며 흐르고 황하는 커커커~~소리를내며 흐른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그리고 흔히 알기로 伯 또한 맏伯으로 그리고 叔은 아저씨 叔으로 백이,숙제에서 보듯이 동양에서는 큰아버지를 伯父 (백부)요, 작은아버지를 叔父(숙부)로 칭해왔지요....이런 내용이 공자님 살던때부터인데...점점 흥미로워지는군요...

  • 06.11.14 02:47

    보통의 한자를 '파자(破字)' 하면 기존의 그 뜻 과는 판이한 의미가 나오기도 하죠. 김자님의 '파자'는 초기 한자 생성 시기(옳을可 조차 口+丁으로 파자)의 의미를 내포 하고 있고, 나우님의 '파자'는 이미 오랫동안 사용하여 그 뜻이 정착된(맏伯, 아저씨叔 으로 볼때) 의미를 내포 하고 있는것 같군요. '파자'의 의미는 글자의 사용 용도, 사용 시기, 사용자에 따라 그 뜻은 천차 만별 일것 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이 성계'의 '문(물을 問)'자의 파자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웅지를 품고 있던 고려의 장군 성계의 휘하 장수가 소개한 '파자' 점쟁이 집을 찾았을때 성계의 바로 앞 초라해 보이는 손님이 책속에서 '問'자를 짚었다.....

  • 06.11.14 02:58

    그러자 점쟁이는 홱 돌아 앉으며 "네 놈은 평생 빌어 먹을 팔자다!" 라고 했다 이어 '성계'도 똑같은 '問'자를 짚었다. 그러자 점쟁이는 갑자기 옷 매무새를 고치고는 성계에게 큰 절을 하며 "장차 국왕이 되실 운세 이옵니다"라고 하여 놀란 성계가 "어떻게 똑같은 글자를 짚었는데 두가지 판이한 해석이 나오느냐?"고 호통을 치니 "아까 그 자의 '問'자는 남의 집 문(門) 앞에서 입(口)을 벌리고 있을 '問'자 이고, 장군의 '問'자는 장군의 좌우에 군신(君)들이 늘어서 있는 형상의 '問'자 이옵니다."라고 했다 한다. 이렇듯 破字는 그 해석의 여하에 따라 그 의미가 어마어마하게 달리 될수도 있죠. ^^

  • 06.11.14 03:18

    더불어 한가지 김자님의 '河伯' 중 '伯 = 人 + 白'의 하얀사람(백인)에 대해서는 만일 그것이 일반적인 백인(양키, Caucasian)을 뜻 하는것 이라면 '지정학적', '시기적' 해설이나 다른 회원들이 자료를 제공 해주시면 좋겠군요. 예를 들자면 십여 년전 중국의 '신강성(新彊省)' 사막에서 발견된 4,000年 前 금발의 백인 소녀의 미이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니면 사막 과 산악을 말타고 다니고 양 젖으로 만든 버터를 얼굴에 바르고 다녀 새카매진 유목녀가 아닌 물가의 다소곳한(?) 농경 정착녀(된장녀:순수한 의미 ^^)를 의미 하시는것 인지요? ^^

  • 06.11.14 10:33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김자님의 '백인(하얀 사람)'은 김자님의 외숙모님 혹은 나의 여진 여인 (흰 얼굴에 큰 눈, 높은 코...)으로만 생각 하고 있습니다. ^^

  • 작성자 06.11.18 21:41

    ^^어려서 읽은 책 중에 이지란(퉁두란)에 관한 내용입니다. 원체 오래된 일이라 확실하진 않으나 여진 추장인 퉁두란의 생김새를 백인 비슷하게 해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 내용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혹시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의 용모에 관한 기록이 있으면 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06.11.19 02:39

    저도 야사로만 그렇게 들었는데, 제가 예전에 알던 '퉁두란 李氏' 여성은 피부가 하얗고 광대뼈는 나왔으며 콧날은 비교적 날카로와 전형적인 한국적인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격은 느긋하고, 힘은 남자 같이 아주 쌔고, 술도 잘 마시는 외형이나 체력이나 성격적으로 특이한 여성 이었습니다. ^^

  • 06.11.14 06:32

    ^^ 세분의 아름다운 대화가 너무 보기 좋군요^^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어요^^ 계속 이렇게 삼태극 까페를 아름답고 평화롭게 지켜 주세요^^ 꾸부정~~~~~^^

  • 06.11.14 23:21

    김자님, 홀필렬님!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주몽이 강을 건너면서 '나는 해모수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모두 사실인가요?

  • 06.11.14 23:57

    녜! 그때 제가 '주몽'의 옆에서 분명히 들었습니다! 당시 '바이칼' 동남 연안에 살던 '브르야트(Buriat)'인들(저는 이들을 '부여인'의 땅에 남아 있는 그 후손들로 믿어오고 있습니다.) 의 사투리로 하는 그 소리를 나의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어때요? 이제는 산 증인이 있으니까 믿을만 하세요?^^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 기도하니 홍해의 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사히 건넬수 있었다."는 잘 믿는데 "내가 하백의 외손자라니 수많은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에 떠 다리를 만들어 무사히 도강을 하였다."라는 말은 잘 안믿는게 우리들 입니다.^^ 주체성의 문제 이지요.^^ [부르야트 - 부르야(트) - 부르야 - 부르여 - 불여 - 부여]

  • 작성자 06.11.16 21:11

    ^^ 저도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홀필렬님/^^

  • 06.11.26 16:20

    살아있는 증인이 있다면, 저는 감히 믿겠습니다. 게다가, 사학계가 인정해 준다면, 설득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구 대한국민에게고함)

  • 06.11.27 01:21

    역사에는 살아있는 증인이 없겠죠. 살아있는 증인이 있는 시기는 역사로 분류 하지 않고 '현실'로 구분 합니다. '사학계'의 인정 이요? 현재의 사학계 에서는 이 카페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거의 전부를 인정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몽의 '어별도강설(魚鱉渡江說)'은 그야말로 미신적, 비현실적, 신화적, 동화적, 거짓말로만 생각 하지만, 모세가 그 무리를 이끌고 이집트 군사의 추격을 피해 홍해에 도달해서 하늘에 기도하니 물이 갈려 홍해를 도보로 건넜다는 설은 믿고 있는게 많은 한국인의 현실 입니다. 모세는 이미 죽고 없는데도 말입니다. ^^

  • 06.11.29 23:38

    홀필렬 님이 말하는 문제는 역사는 승자만이 쓴다는 잘못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제 홍보글을 보세요. '역사는 승자만이 쓴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계십니까? 역사는 더 이상 승자의 것이 아닙니다. 후손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cafe.daum.net/mookto' 인조 반정이나 논문 조작 파문 등도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 06.11.28 02:07

    저는 님의 생각 처럼 '승자 만이 쓰는 역사'를 인정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곳에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제 말씀을 너무 확대 해석 하지 않으시면 고맙 겠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사회 현상을 말씀 드렸을 뿐 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을 말씀 드릴 뿐 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인들께 물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모세가 홍해를 걸어서 건넌것은 믿지만 주몽의 '어별도강설'은 미신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불가사의'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단지 그것을 말씀 드릴 뿐 입니다. ^^

  • 작성자 06.11.27 19:55

    ^^ 존경하는 홀필렬님의 말마따나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의문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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