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1일 15:00 전주시 한국소리문학의 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사)대동사상기념사업회(이사장 : 신정일) 주최 제1회 공화주의자 정여립 학술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의 공화로 대동사상과 민주주의 새싹 세계최초 공화주의자 정여립 학술세미나입니다.
정철의 사주를 받은 1589년 송익필이 황해도에서 전라도 정여립을 고변했고 선조가 조작한 모반 사건으로 호남지방에서 1,000 여명이 죽었는데 3년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전라도 백성들이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한것은 선조의 배신으로 가족과 형제가 죽은 것과 별개로 나라를 구한다는 구국정신을 보면 선조에게 당한 호남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겠는가"는 말이 가슴에 뭉클했습니다.
기축옥사에서 저의 선조 대승공 19세 柳夢井께서 옥사하셨고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청계공 몽정선조의 큰조카 렴(濂)이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여 하동 노량 주룡포에서 전사하여 원종공훈으로 증 공조참판이 되십니다.
정철에게 엄밀히 말하면 宣祖에게 숙부 청계공을 잃었는데 그 宣祖 나라를 위해 의병을 모은 것입니다.
오늘 기축옥사에 전남에서 돌아가신 6문중 금호 나사침, 문헌공 곤재 정개청, 청계 류몽정, 만취당 이황종, 동암 이발, 정곡 조대중 등 후손과 함께 참여 했습니다
발표자 신정일(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이덕일(신한대학교 교수) 이해준(공주대 명예교수)
토론자 김동수(백제예술대 명예교수) 김병기(동국대명예교수) 김명옥(건국대 겸임교수)
정여립 선조에 대한 살풀이 춤 : 김연홍 주성용
세미나후 발표자 토론자와 동래정씨 종중임원과 한 컷(정성문님 사진제공)
학술 세미나 자료
동래정씨 축하 화환
전주시에 있는 정여립로 이정표
동래정씨 전북지역 화수회장 정상수님과 동래정씨 카패지기 정성문님을 만났습니다.
정성문님에게서 받은 숙제
대승공17세 류문옥(생원) 아들 덕윤(생원)
2남 덕수(문과) 전의이씨 수찬(修撰)의 사위 : 정성문님이 준 자료는 이효충(李效忠)의 사위
## 사위집안 족보 자료와 대조해 보면 장인 이름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다른분처럼 조부 아들까지 기록되 있으면 보명이나 아호를 써놓아 양쪽 집안에 기록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덕수선조 장인은 장인 이름만 있어 족보 편찬과정에서 선조 이름을 옮기면서 문화류씨 오류인지 더 확인해 봐야 합니다.
3남 덕용 4남 덕성
3남 덕용이 양자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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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여립 세미나 참석후 느낀 점
1. 광주민주화 운동과 정여립 대동사상
선조(宣祖)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혐오는 한양 민초들에 의해 경복궁이 불탄 것과 함께 함경도의 백성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의 두 왕자를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준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宣祖는 광해군의 형인 큰아들 임해군과 여섯째 아들 순화군을 함경도로 보내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겼으나 임해군과 순화군은 왕자에게 주안(酒案)을 제대로 접대하지 않는다며 지역 백성들을 매질하고 노략질하는 등 패악을 저질렸고 임해군과 순화군의 패악질에 견디다 못한 함경도 주민들(순왜 국경인(전주에 살다가 회령으로 유배감, 국세필조카)ㆍ국세필(회령부 아전) 등, 순왜는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왜군의 앞잡이가 된 백성)이 두 왕자를 포박해 왜군에게 넘겨버리는 사건(회령의 변고, 1592년 7월23일) 발생합니다.
의병들이 봉기한 명분은 어디까지나 임금과 나라를 지키기 위함인데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왕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했다면 어느 누가 흔쾌히 목숨을 바치겠이며 봉기해야할 명분 자체가 말살된 것이니 의병들이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쳐 전선을 확대하고 보급로를 차단해서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적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인데 전라도민은 宣祖에게 기축옥사에 그렇게 당하고도 전국적으로 가정 많은 의병 활동을 합니다.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는 기축옥사후 전라도 의병활동을 보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연상된다고 했습니다.(전두환 신군부에 맞선 광주민주화 운동)
2. 기축옥사를 기축사화로 하라
이는 사화와 옥사의 역사적 근거를 무시한 말로 집안잔치에서는 기축옥사라 할 수 있으나 대외적 활동에서 기축사화라하면 사학계에서 무식의 소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4대 사화인 무오사화(사초문제) 갑자사화(폐비 윤씨문제) 기묘사회(해빈홍씨) 을사사화(경빈박씨)는 모두 왕의 부인이나 어머니 할머니가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3대 옥사인 宣祖때 기축옥사(정여립 난) 광해때 계축옥사(칠서의 난) 숙종 때 갑술옥사(갑술환국사건)은 모두 왕 가족과 관련 없는 반란 사건입니다.
사학자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옥사로 분류해 놓은 것을 기축사화라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대동사상기념사업회"나 동래정씨 대종회에서 계속 기축사회라는 글과 논문을 발표하면 어느때인가에 기축사회로 병기될 것입니다.
3. 정여립 복권 문제
저의 선조 만암 류봉휘좌의정은 조선조에서 복권되지 못하고 대한제국에서 총리대신 이왕용이 융희2년 복권해 주었습니다. 정여립처럼 조선이 없는 나라인데 조선 왕에게 복권할 수 없으니 동래정씨 대종회가 주동이 되어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복권하면 됩니다. 성균관이나 향교가 어렵다면 "(사)대동사상기념사업회"에서 복권하면 되는데 반듯이 복권을 알리는 의식은 해야 합니다.
저의 생각은 단종은 복권되었기에 광해군 복권을 주장하는데 광해군주 숭모회에서 관심이 없습니다. 광해가 왕위에 있었다면 청나라에 항복하지 않앗을 것만 가지고도 복권 이유가 됩니다.
정여립을 복권 시켜 달라는 질문에 신정일 이사장은 우리가 복권 시키면 된다고 답변했는데 저의 생각은 삼태사로 일컫는 고창성 성주 김선평, 고창성 장군 권행과 장정필에게 왕건은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했는데 성종2년(983년)에 국가나 왕의 주도가 아닌 안동 府司에 공신묘(功臣廟)를 창건하고 모신 것처럼 선례가 있기에 동래정씨대종회에서 신원(伸寃) 의식을 하면 복권(復權) 된다고 봅니다.
시호를 받을 수 없으니 종중에서 호나 000공을 정할 위원회를 만들어 신정일 이사장님과 협의해서 홍보하면 정여립공 보다는 더 듣기 좋은 호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불교국가인 고려초에는 호나 시호 개념이 없었고 조선조처럼 사망하면 바로 조정에서 시호를 내리지 않고 후대에 후학들에 의해 내린 시호가 있습니다.
조선조에서 희생되신분들은 제자가 많으면 제자들이 탄원하여 복권이 빨리 되고 그 분 향사를 위한 서원이 있은데 정여립처럼 제자가 당시 없었으니 현재 제자들이나 그 사상을 따르는 분들이 중심이 되어 복권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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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2019, 신정일 지음, 유철상 발행,상상출판)의 35쪽에 선산부사(문화류씨 족보는 홍주목사) 류덕수(검한성공후) 족보는 위에 있기에 생략하고 다음에 참봉 류종지(좌상공후, 곡성 옥과 류팽로 장군과 같은 집안임) 족보
류팽로(柳彭老,1554년~1592년, 대승공19세)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당시 고경명 휘하의 장수가 되어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십니다.
[주-1] 류종지(柳宗智) : 1546(명종1)~1589(선조22).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호는 조계(潮溪)이며, 조식의 문인이다. 좌상공후 류성(柳誠)의 아들이다. 참봉(叅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축사화(己丑士禍) 때 정여립(鄭汝立)의 당(黨)으로 지목되어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하(杖下)에 운명하였다. 『조계실기』 2권 1책이 전한다.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에 대각서원(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44호) 배향인물은 하항 손천우 김대명 하응도 이정 류종지 하수일 이다.
증조인 인동부사 류형(柳泂) 때 진주로 이사와 정착하게 되었다.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기축옥사, 즉 鄭汝立謀叛 사건에도 이들이 연루되었는데, 이것은 이들을 질시하는 자들의 모함때문이었다. 정여립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조사중이던 宣祖 22년 12월에 전라도 유생 丁巖壽 등이 상소하였다. 그는 李山海, 李潑, 鄭彦信, 鄭人弘, 鄭介淸 등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 비난하면서, 류종지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그런데 류종지의 아들인 류이영 등이 上言을 해서 당시 모반사건의 추국을 총괄하고 있던 鄭澈이 최영경을 엮어 넣기 위해 자신의 하수인을 시켜 먼저 최영경과 가장 친밀한 류종지를 얽어 넣었다고 하여 그 억울함을 호소하였던 것을 보면, 류종지는 애초부터 최영경을 미워하던 서인측의 술책으로 희생당했다는 느낌이 든다.
류종지는 이런 모함으로 인해 진주옥에 갇혔다가 서울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이에 항거하다가 12월 22일 44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최영경도 그 뒤 서울로 끌려가 조사 받다가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남명학파 문인들이 받은 타격은 심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남명학파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조정에서 남명학파 문인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기축옥사 때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인물에 대한 신원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최영경도 선조 27년(1594)에 신원되고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류종지는 남명학파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숭앙을 받았다. 그래서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긴 했지만 광해군대에 와서 신원되었고, 그 뒤 백여 년쯤 지난 1710년대 말에 大覺書院에 추향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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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류씨를 포함하여 성씨를 柳로 표기하신 분은 2007년 대법원 성씨표기 예규 개정으로 "류"로 표기하고 있으며 각종자료에 의한 관직명이 승차하여 관직명이 변경된 경우 최종 관직을 표기 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35쪽에 장령 류몽정으로, 21쪽에는 남원부사 류몽정으로 표기되어 있고 268쪽 정개청 글에서 "대동야승"을 근거로 하셨는데 국역대동야승Ⅳ 446쪽에 "목사 류몽정"(황혁의 정곤재 행장) 453쪽 허묵의 곤재전에 "주목 류몽정"이라 나오는데 집안 어른들 말에 의하면 광주목사 교지는 받았으나 역적으로 몰려 광주목사에 부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청계공 류몽정 선조를 황혁이나 허묵 같은 대학자들이 타의에 의해 광주목사에 부임하지 못했기에 글에서 광주 목사라 칭한 듯합니다.
저의 묘비를 보면 광주목사 류몽정으로 된 점을 참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래정씨 문중이 정도전의 봉화정씨와 교류가 있는지 문의해 본 이유가 차원부 일족이 처가 서얼인 정도전에 의해 죽었다고 하지만 봉화정씨대종회는 차씨들의 조작이라 하기에 더 알아 보기 위함이였습니다
첫댓글 정철이 자기 정적 제거를 위해 진주에 살고 있는 류종지를 죽였고 전주 박찬 외손 류덕수도 죽였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