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동양하숙(서정시학)
신원철
1957년 경북 상주출생. 2003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나무의 손끝』, 『노천탁자의 기억』, 『닥터존슨』 저서 『20세기 영미시인 순례:죽은 영웅의 시대를 노래 함』 외. 강원대 글로벌학부 영어과 교수,
백화점 주차장 앞에서
90도 허리를 굽히는 아들아
아서라
창창한 너의 미래를
누가 그리 낮추라고 하더냐
네 꿈은 훤칠하고
얼굴은 달 같은 이상
눈빛은 별보다 반짝이건만
허리를 굽히는 젊음아
그렇게까지 숙이는 건 아니라네
어쩔 수 없다고?
그래도 중심을 꺾는 건 아니라니까
아비도 주먹 앞에 고개를 꺾고
탈바가지처럼
때로 비굴하게 웃으며
살아왔다만
-「각도」 전문
자존심을 굽히며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비애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그것에 책임지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그리고 그들을 이러한 삶에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풍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꺾는 건 아니라니까”라는 한 마디의 조언을 잊지 않음으로써 어른으로서의 자신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들고 풍자의 칼끝을 자신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능함과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력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따뜻하지만 처절한 슬픔이 배어 있는 요즘 시쳇말로 ‘웃픈’ 현실을 보여주는 중층의 풍자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책은 써봤자 팔리지도 않고
학생들도 수업을 외면하고
돈 안 된다며 대학에서는 자꾸 줄이라고 하고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리던
문학, 역사, 철학에 투자한 일생
백발이 되고 머리가 벗겨질 때까지
혼자 좋아서 했다만
지금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철학전공 학장
고인돌을 찾아 전국을 헤매는 고고학전공 학장
분노를 안주삼아 마시던 속을 달래며
대구 계산동 숨은 밥상에
깔끔하게 차려진 고들빼기, 씀바귀, 달래무침 나물반찬들
고기는 없다
막걸리 잔과 가지런한 접시들 사이로
젓가락이 바빠지는
한옥식당의 툇마루 밑 작은 정원에
소당하게 피어난 빨간 맨드라미.
-「인문학 밥상」 전문
돈 안 되는 인문학에 대한 대학과 사회의 무시와 외면에 분노하며 자신이 평생 추구하던 학문을 토로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인문대학장 모임에서의 소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들의 어깨는 늘어지고 기댈 것은 술상의 안주처럼 놓여있는 분노밖에 없지만, 그들이 꺼내놓은 학문세계의 다채로움을 시인은 맛있는 식사를 하듯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이 “소담하게 핀 빨간 맨드라미”처럼 희망이고 아름다움임을 잊지 않고자 한다. 분노를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이 정신승리는 바로 풍자의 정신에서 온다. 이것이 신원철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이다.
-황정산, 시집해설 「역사와 현실을 가로지르는 풍자의 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