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고픈 저녁|김성춘
바하를 들으며 외 4편
안경알을 닦으며 바하를 듣는다.
나무들의 귀가 겨울 쪽으로 굽어 있다.
우리들의 슬픔이 닿지 않는 곳
하늘의 빈터에서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어 죽은 가지마다
촛불을 달고 있다.
성聖 마태수난곡의 일악구一樂句
만 리 밖 종소리가 일어선다.
나무들의 귀가 가라앉는다
금세기今世紀의 평화처럼 눈은 내려서
나무들의 귀를 적시고
이웃집 그대의 쉰 목소리도 적신다.
불빛 사이로
단화음이 잠들고
누군가 죽어서
지하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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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 경주 대릉원에서
대릉원은 여백이다
왕들이 떠나고
나도 어느 날 곧 그렇게 떠나겠지만
오늘은 살아서
그로테스크한 폐허 속을 걸어간다
그로테스크한 하루 속을 걸어간다
포플라 나무 위 저 까치 부부
왕들과 함께 산책 중이다
무덤이 말한다
삶은 노루꼬리보다 짧은 여행이라고
오늘은 잠시
아름다운 푸른색 섬광이 빛나는 별*에 와서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걷는다
살아서 걷는 이 사소한 즐거움
삶은 아주 짧은 천국이라고
포플라 나무 가지 위 저 까치 부부도
잘 안다
왕릉 옆 흰 구절초도
잘 안다
* 소련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동안 우주선을 타고 지구 궤도 한 바퀴를 도는 데 성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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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오리 기차
해질 무렵, 10량짜리 kTx 기차가 산 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방죽길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렸다
아파트 방죽길을 걷다 벼가 시퍼런 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갈숲 사이로
음악 같은 들오리 한 쌍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목과
허공의 손을 잡고 헤엄치는 들오리 한 쌍의 눈을 오래 바라보
았다
눈이 깊었다
70대 노부부 같은 황혼
들오리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10량짜리 삶이 지나가는 소리가 벼 포기마다 싱싱했다
나는 잘 못 산 시행착오 앞에서
고아처럼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괴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구름 아래 시간들
들판의 먼 아지랑이 같은,
구름 아래 슬픈 음악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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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짙은 눈썹으로 밤새가 운다
어린 별들의 몸이 뜨겁다
별의 열 손가락 끝, 새의 맨발이 만져진다
울음은 언제나 뜨겁고 슬픔보다 깊다
내 발목에 초사흘 달, 푹푹 빠진다
달이 잎사귀에 푸른 음악 묻어난다
별의 몸은 부서지지 않고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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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경주, 천관녀
-이승훈 시인 風으로
경주는 가랑비 천관사도 가랑비 당신도 가랑비, 가랑비 내리는
오후 폐사지 찾아 떠나네 가랑비 젖는 경주가 좋아 저 혼자 젖고
있는 폐사지가 좋아 사천왕사 지나 눈물 같은 절 중생사 지나 먹
구름 지나 모래바람 지나 떠나간 천관녀 찾아 나 떠나네 저 혼자
울고 있는 천관사, 천관녀는 울면서 어디로 떠났나 칼로 애마를 친
유신도 정신을 잃고 어디로 떠났나, 풀잎 같은 그리운 새들 모두
어디로 갔나, 폐사지에는 봄에도 하얀 눈발 날리고 흰 눈발 속에
당신의 흰 맨발, 가랑비 속에 떠 오르고 자꾸만 자꾸만 울고 싶어
지는 아아 경주의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