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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 놈아
김동원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 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김동원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 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 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 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 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 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보름달
―시선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답하여
김동원
여자 엉덩이만 한 둥근 보름달이 떴다
내 오늘, 법이산 위에서 그 엉덩이 밟고 올라
쑤―욱 구름장 위로 고개를 내밀면,
껄껄껄 시선 이백이
하늘 위서 손을 뻗는다
이렇게 우리는 초저녁 북극성에 걸터앉아
술상이 나오기 전
한 수 시를 짓고,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을 바라보며
눈앞에 귀찮게 아른거리는 우주선 파리채로 후리고,
참 고운 몸매의 샛별이
웃는 듯 상床을 받쳐 들고 나오면, 안주론
별자리 황소를 굽고
술은 북두칠성 국자로 알콜 성단星團에서 뜨고,
어린것들은 조랑말자리 별에 태워
성도星道를 한 바퀴 천천히
돌게 한다
그렇게 한밤중 거나하게 취하면,
우리 둘은 어깨를 끼고
은하수 강가에 배를 띄우는데,
이백은, 뱃머리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고
난, 취흥에 겨워, 저 이쁜 달 엉덩이를 힘껏
‘철썩’ 때린다
그러면, “으응” 하고 잠 덜 깬
웬 여자 볼멘소리가
방 한구석에 자늑자늑하다
황진이
김동원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생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김동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 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 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생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깍지
김동원
내 손을 낚아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꽃 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 버린 두 인연이 천 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바다와 시니피앙
바다의 입술은 위선적이다 // 라고 했다가, 바다란 말은 더 폭력적이다라고 고친다 // 미친놈! //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 비트겐슈타인이라고 // 썼다가, 바다는 언어를 가리고 언어로 핀다 // 다시 바다는, // 바다의 몸은 관점의 차이라고 썼다가 // 들뢰즈에게 들켜, 닮은 것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적는다(김동원,「시뮬라크르」전문)
시의 사유를 따라가다 생긴 질문은 크게 전통과 창조(novelty)의 문제로 수렴된다. 서구의 담론에 비해 전통 시론은 ‘떠도는 시적 사유의 힘’으로서 시귀(詩鬼)나 시마(詩魔) 또는 광기(狂氣)의 속성을 지닌다. 이는 나의 경우 깊은 병(病)의 체험에 기반한 새로운 전통의 방법론에 속한다. 내시를 서구 사조로서 낭만주의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낭만주의의 허구와 실재는 허와 실의 양분이 아니라, 허실(虛實)이 겹쳐 있거나 역립으로 존재한다. 바깥의 말과 사유, 주체의 허구와 실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근현대 시의 존재 방식은 기실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의 부정적 드러냄”이다. 또다른 문제 제기로는 황당무계와 광대무변이란 말은 모두 진위를 떠나 시적 사고와 상상의 지평을 전제로 하며, 그런 혼돈의 세계와 언어를 일컫는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미학적 윤리적 가치문제는 상대적 우위를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특정 텍스트의 작품 해석에 있어 독자의 창조적 역할이 작가의 의도만큼이나 중요하다면, 작가와 독자, 주관과 객관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소통-작용은 여전히 새로운 관심을 끈다. 로만 야우스의 수용이론이나 해롤드 블룸의 해석상의 오류는 작가의 시선으로서 독자, 독자의 지평으로서 작가 의식이 요청된다. 나는 어떤 시론의 체계와 구조보다는 시에 대한 직관과 통찰, 아포리아 중심의 글쓰기가 주된 관심사다. 그도 그럴 것이 시는 ‘불가능의 가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은의 말처럼, “시는 현실 없이도 불가능”하고, “현실 초월 없이도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 불가능성이야말로 시를 현실과 현실 너머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 있게” 한다.
모든 형상은 형상이 아니며, 실재하는 것은 모두 허상이다. ‘나는 그렇게 들었다 如是我聞’『금강경』)이상하게도‘바다’를 호명하는 순간, 이순(耳順)의 나의‘바다’는 사라지고 ‘아버지’가 보인다. 그럴 때면 생각의 주체는 언어가 아니라 항시‘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다와 죽은 아버지는 소리의 이미지로서 시니피앙과 소리의 관념적 의미로서 시니피에가 겹쳐 일어난다. 하여 바다-아버지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중층적이다. 훗날,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언어학자)의‘인간은 언어가 지배한다’는 글을 만났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언어’가 먼저 있고,‘세계’가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겐‘세계와 언어’가 한 몸이었다. 소쉬르의 등장은 말의 구조와 체계, 사물에 대한 관점,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마당의 개는 짖지만, 책 속의 개는 짖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이처럼 ‘사물과 언어는 필연적이지도 동일하지도 않은, 임의(자의)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그의 주장은 기존의 언어 문화를 전복시켰다. 또한‘무의식이 언어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무의식을 불러낸다’는 라깡(1901~1981, 프랑스 정신과의사)의 말 역시, 동일성의 시학을 해체한 일대 사건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언어를 ‘시를 실어나르는 도구-뗏목’쯤으로 여겼다. 지금도 시의 본체는 언어 이전의 세계가 진짜이고, 언어 이후는 시가 걸친 옷 정도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의 눈동자 속으로 신(神)을 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통해 언어 이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소쉬르의 말도 인정한다. 하여, 나는‘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 그 어디쯤이라고 우긴다. 시「바다와 시니피앙」은, 언어로써 언어를 뛰어넘는 ‘시의 본질’을 꿰뚫은 나의 시도이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김동원,「바다와 시니피앙」전문
그렇다. 네 살 때부터 내 무의식 속엔,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 자리로 인해 랑그(langue, 언어의 추상적 체계)가 거세된 파롤(parole, 개인적 발화), 혹은 시니피앙의 감각이 지배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 우리는 왜 불(남자/陽)의 서사보다, 물(여자/陰)의 서정을 추구해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비극과 결핍’의 상태로 흔적을 남기며, ‘묘사’보단 ‘압축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시상(詩想)을 촉발한다. 아침마다 본 일출은 생생(生生)의 변(變)과 역(易)이 우주의 이치임을 안다. 어린 내게 물결은 늘 새롭고 낯선 리듬의 반복이었다. 순간순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물안개는, 시적 모호성의 극치였다. 그 끝없는 반복과 변주의 바다는, 장자의 “나비”처럼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모를 환상을 심어주었다. 바다의 파토스는 사라진 것에 대한 내 서러움이나 그리움을 고통으로 잉태하였다. 하여 나는 라캉의 명제‘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를 지지한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될 때, 비로소 무(無)가 된다. 실재하는 대상은 이미지로도 언어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노자가『도덕경』1장에서“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이용주『노자 도덕경』)라고 설파한 것처럼, 바다는 언어가 침묵할 때 그 순간 시가 된다. 내게 있어 시의 바다, 바다의 시는 언어 이전도 이후도 아닌, 현의 지점이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어둠에 이어지는 또다른 어둠, 그것이 존존재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다.”(이용주, 같은 책)
오십천
김동원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 구름 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듦.
말귀
김동원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환상곡
김동원
우리는 푸른 바람에 손을 넣고 있었네
그는 시간을 잡는다고 했네
어디로 간 걸까, 그 얼굴들은
감쪽같이 어둠에 스며들었네
트럼펫을 불어라!
노을 지는 서쪽 바다에 서서
남자여, 미쳐버려라!
춤추고, 노래하고, 취하라, 여자여!
물 위에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네
피아노에 칸나가 핀다고 했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네
그 저녁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네
시검詩劍
김동원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 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칸나
김동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돌아보면 부서져 버릴 사랑
칸나, 칸나, 칸나
불이 붙어 다 타 버리라지, 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빨강, 미쳐 버리라지, 뭐
칸나, 칸나, 칸나
붉은 라인은 왜 그리 외로운 거야
꽃대에 젖어 빗물은 흐르는데,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세월처歲月處
김동원
좀 들어 보라 카이. 의미 그거 다 쓸데없는 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이가. 바람 불면 꽃 쪽으로 달빛 나오면 댓잎으로, 간들간들 사운대다 가는 게 인생 아이가. 그래, 그기라니까. 말도 안 되는 기 말 되는 기라니까. 그래, 그래, 반쯤 술에 취해 그렇게 놀다 서산으로 번지는 기라. 한 백 년 서로 얽히고설키고 뜯어먹다 가는 기라. 좀, 좀 들어 보라 카이. 안 보이는 거 보이도록 하는 기 시詩 아이가.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 거 연놈들 이치 아이가. 쓱 쓱 허공에 썼다가, 쓱 쓱 쓱 지우는 거, 그게, 오고 가는 세월처歲月處 아이가!
꼽추 누이
김동원
천천히 노을빛이 바뀌는 게 다 보였죠
누이는 그 곱사등에 혹등고래를 숨기고 살았죠
나만 보면 까까머리를 쓸어주며
하얀 알사탕을 한 개씩 쥐여 주었죠
밤마다 어느 바다로 가야 할지 몰라
그 누이는 물이 우는 소리를 내었죠
해무海霧가 밀려와 그녀를 감싸기 전까지,
곱사등은 붉은 해를 품고 살았죠
흰 눈이 무너져 내리던 겨울 수평선 위에
누이는 깜박깜박 밤 등댓불 너머
죽어서 슬픈 초승달이 되었죠
작부酌婦
김동원
술집 작부 치마폭에 싸인 것맨키로, 볼또그리 취한 강구항 밤 야경. 어판장 뒷골목마다 그 옛날 홍등가에는 야화夜花가 피어 흥청망청했지. 속초로 울릉도로 고깃배 타다 뭍에 내리면, 낮부터 술판에 젓가락 장단에 홍도야를 불렀지. 작부 년 분 냄새에 불뚝불뚝 아랫도리 힘은 뻗쳐, 그 어부들 주장군柱將軍 명태 대가리만 했네. 소주 막걸리에 떡이 되면, 영순 아버지 마누라 새끼들 까맣게 잊어먹고 곱사춤을 추었지. 연분홍 치마저고리 입은 작부 엉덩이는 얼마나 컸던지, 고래 등만 했네. 아니, 아니 밤바다 보름달만 했네. 그 겨울 폭설에 대구 명태 방어 잡아 번 돈, 구삥에 도리짓고땡에, 그년들 치마폭에 다 녹아들었지. 새벽 오줌 누러 나와 어둑어둑한 방파제 파도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면, 그때서야 동해에 밥 찾으러 나간 아비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얼굴이 등댓불처럼 눈앞에 깜박깜박 비추는 거라.

첫댓글 김지선 재능시낭송협회장님, 정지홍 행사부장님, 이은경 소프라노님, 김석근 대금 연주자님, 금강 스님, 이수진 김병철 김명희 서지행 김정옥 이정아 시낭송가님 모두 감읍합니다. 이한숙 음향 선생님, 황미향 선생님, 문순덕 홍보간사님 / 그외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올립니다. - 김동원 절
김동원 선생님의 大作들을 줄 세워 모아 놓아
한꺼번에 훑어가며 공부하기 참 좋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