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서 온 버스기사 ‘씩씩한 금단씨’ [중앙일보]
광복절 보신각 타종하는 새터민의 희망가
“키가 1m50㎝인 제가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이렇게 큰 차를 몰고 있어 자랑스럽지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6623번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유금단(39·여)씨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6623번 등 9개 노선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풍양운수에는
버스기사가 300명 있다. 이 중 여성은 유씨를 포함해 4명뿐이다.
“이북에 살던 동네(함북)에서는 이런 버스 구경도 못 해 봤어요.
‘제가 버스 운전한다’고 하면 고향 사람들이 안 믿을 거예요.
북한에서는 운전직업 있으면 아주 중층(중산층)이거든요.”
유씨는 광복 63주년, 건국 60주년 기념일인 15일
여성우주인 이소연씨, 탤런트 이서진씨, 수영선수 조오련씨 등과 함께
서울 보신각 타종 인사로 선정됐다.
서울시는 “성실히 서울시민의 발 노릇을 하는
유씨를 통해 한국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새터민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고향은 한 시간여를 걸으면 두만강에 당도하는 함경북도 산골.
그곳에서 개·돼지를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사람 먹을 낱알도 없어 개·돼지에게는 인분을 끓여서 사료로 먹였다.
그러던 7년 전인 2001년 어느 날,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
만 8살이던 아들 영철이를 남겨두고 두만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친척을 찾아 무작정 떠났다.
당시 남편 박정남(46)씨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북한에서도 악명 높은 22호 교화소(교도소)에서
8년간 징역형을 살고 있었다.
“영철이한텐 ‘열흘이면 엄마가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마솥에다 감자떡 몇 개 안쳐 놓고 온 게 전부였지요.”
유씨는 끼니로 생무를 씹으며 중국 옌지에 찾아갔지만 친척은 없었다.
중국 공안의 눈길을 피해 숨어 지내다 보니 스무 날이 지났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행을 택해 2002년 6월 서울 땅을 밟았다.
정부가 새터민에게 지급하는 자그마한 영구임대주택이
그녀의 새 보금자리가 됐다.
그녀에게 남한에서 본 것 중 시내버스가 가장 신기했다.
“저걸 몰면서 여기 사람들 발 노릇을 하면 멋있는 인생을 살겠다 싶더라고요.”
시내버스 기사를 꿈으로 정했지만 운전면허 시험은 꽤 어려웠다.
필기시험을 12번 떨어지고 13번째에 붙어 2003년 12월 2종 수동 운전면허를 땄다.
한국에 온 지 18개월 만이었다.
고향에서는 ‘금단이가 중국에서 부잣집에 시집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2005년 초 출소한 남편은 ‘그럴 리 없다’며 아내를 찾아 국경을 넘었다.
서울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곧바로 한국에 들어와 아내를 만났다.
부부는 북에 놓고 온 영철이를 잊을 수 없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아들을 탈북시켜
2005년 10월 남한에서 온 가족이 상봉을 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남편은 진폐증을 심하게 걸린 탓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유씨는 낡은 1t 트럭을 사 트럭에서 땅콩·호두·해바라기씨를 구워 팔며 노점상을 했다.
그래도 시내버스 기사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지나가는 버스만 보면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버스 회사들을 찾아가 “제발 좀 써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럴 때마다 ‘운전 경력이 없어서 자격이 안 된다’는 이유로 퇴짜를 놨다.
억척스러운 유씨의 모습에 한 버스회사 관계자가
그녀에게 마을버스 기사 자리를 소개해줬다.
“중도에 포기하면 ‘적응 못한 탈북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결국 올 3월 1일 풍양운수에 특별채용됐다.
오전 4시쯤 출근해 오후 3시까지 버스를 모는 게 그녀의 일과다.
월 180만∼200만원의 봉급으로 월세 15만원,
관리비 25만원, 월 40만∼100만원의 남편 약값을 내고 나면
살림살이가 빠듯하다.
그래도 빚 한 푼 지지 않고 생활하고 있다는 게 유씨는 자랑스럽다.
“이만하면 금단이가 남한 와서 성공한 것 아니에요?
보신각 타종 때는 영철이도 꼭 데려갈 거예요.
” 통일 뒤의 소원을 묻자 유씨는
“버스 몰고 함북 고향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태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