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지우(知己之友)
내게는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50년간 만화를 그려온 Y라고 하는 지우(知友)가 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흉허물이 없다. 서로가 지켜야할 에티켓이나 도리 같은 것은 벗어 던진지 오래다. 우리는 세속에서 관행처럼 굳어온 가식을 하거나 형식적인 도덕성에 구애받거나 부화뇌동(附和雷同) 없이 살아왔다. 어떠한 실수나 막말을 해도 성내거나 개의치 않을 만큼 막역한 사이다.
그의 집은 우리 아파트에서 한눈에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있다. 조그마한 집 두채다. 그는 배밭을 포함해서 2천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 배 밭 저편은 열대우림을 연상케 할 만큼 우거진 숲이 있다. 자연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으로 최적의 지대이다. 그의 집은 내가 사는데서 지호지간의 거리로 자세히 관찰하면 육안으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다. 그와 난 가끔 만난다. 그러나 없는 때도 있다. 떠돌아 다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리 약속을 정하지 않는다. 불현 듯 대포 생각이 나거나 멀리 전철을 타고 일상을 벗어나고 싶고 시간이 맞으면 만나 그때 목적지를 정한다.
우리는 60년대 후반 20대 때 만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연세대의 낙농(酪農) 전문교육기관에서 1년간 같이 공부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낙농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걸음마 단계 여서 거기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전무 한 상태였다. 그 후 나는 전공을 살려 30년간 낙농업에 종사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대로 그의 길을 갔다. 천부적인 재능을 덮기가 아쉬운지 아니면 직업을 바꾸기가 힘들었는지 한 우물을 파 오늘날 대한민국의 저명한 만화가가 된 것이다.
그는 10대 후반 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50년 동안 그리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아동 명랑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세월이 가면서 역사만화나 위인전 같은 만화로 패턴을 바꿨다. 그의 주요작품은 ‘맹꽁이서당’, ‘맹꽁이 인물열전’, ‘겨레의 인걸100인’ 등 역사 만화와 명랑만화인 ‘탐험대장 떡철이’, ‘두심이 표류기’, ‘요철발명왕’등 130여권의 만화책을 저술했다. 실로 우리나라 만화계를 발전시킨 개척자나 다름없는 인물인 것이다
91년대에 ‘겨레의 인걸 100인’이라는 만화책을 출간하여 문화관광부가 제정한 제1회 우수만화 저작상을 받았다. 그는 대단한 달변가다. 그가 만화 저작상을 받을 당시 KBS에 밤 11시에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11시에 만납시다’ 라는 한시간 짜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는 여기에 출현하여 진행자가 묻는 말에 탁월한 식견으로 거침없이 만화계의 전망과 소신을 피력하였다. 1994년 서울정도 600년 기념으로 2394년에 개봉예정인 타임캡슐에 ‘겨레의 인걸 100인’이 수장되었고 그의 만화우표가 발행되었으며 고교 검정문학교과서에 ‘메밀꽃 필 무렵’이 수록되었다.
그는 성균관대 한림원에서 7년간 한문과 중국고전을 공부한 한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만화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2년에 순천에 있는 국립순천대학교에서 만화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여 제자를 양성하고 후에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학계에서 은퇴하여 지금은 불암산이 바라다 보이는 별내 신도시의 어느 산자락에 기거, 자연을 벗 삼아 짬짬이 저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예술인이나 학자들은 소신이나 지론을 굽히지 않고 고집이세거나 기인이 많은 것처럼 그 또한 기인에 가깝다.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일을 한다. 배 밭 둔덕 밑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있기도 하고 배 밭에 피라미드을 세우겠다고 엉뚱한 설계까지 마쳤다.
그의 집에는 개가 열네 마리나 있고 헛간으로 쓰는 비닐하우스 안에 고양이도 여러 마리가 있다. 모두 다 버림받은 개나 고양이들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우는 것이다. 그의 집 앞에 물웅덩이가 있어 올챙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가뭄에 물이 말라가자 올챙이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측은히 여겨 넓은 고무그릇에 그것들을 담아 울타리 안에다 갖다 놓았다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뱀이 와서 올챙이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고 생태계의 순환이라고 위로했다. 항상 반론을 펴던 그도 수긍이 가는지 말이 없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동물보호주의자다. 굳이 말한다면 동물 휴매니스트라고 할까. 모란장 같은 곳에 가면 좁은 철책우리 안에 축 늘어진 개들이 겹겹이 포개져 사람 눈을 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소주를 원하는 고객들의 주문을 받아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러한 애절한 개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 했다.
그 집 개들을 겨울이면 바람막이는 물론 개집 안에 연탄난로를 피워주고 사람들이 먹는 빵, 계란이나 메추리알, 닭고기, 돼지족발 등을 사다가 준다. 개와 고양이의 천국인 것이다. 누차 개나 고양이사료를 사다 주라 해도 사료도 주는데 잘 먹지를 않는 단다. 그러다가 영양결핍이 될 수 있다고 내말은 통 듣질 않는다. 개들의 입이 고급이 되어가니 이제 아무거나 먹겠는가.
나도 몇 십 년간 가축을 키워 동물의 질병이나 사육하는 노하우를 예를 들어가며 말해도 그에게는 우이독경이요, 마이동풍일 뿐이다. 개들을 집단사육하면 장염에 잘 걸린다. 장염이 걸리면 아무리 우수한 수의사라도 거의 살리지 못한다. 장염을 치료하느라 가축병원에 갖다 주는 돈만해도 한 번에 기백만 원이 된다고 한다. 어찌 그 모양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그래야 수의사들도 먹고살고 경제가 활성화 되니까 하고 자위해 본다.
그는 틈만 나면 흙을 파 나르거나 풀을 베거나 해, 성한 곳이 없이 몸이 아프다고 한다. 경작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다. 저작활동에 지쳐서 그렇게 자연 속에서 일이 하고 싶단다. 오죽하면 그에게 우둔한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이야기를 해도 그는 귓등으로 들을 뿐이다.
나는 이곳에 이사 오기 전 천 평이나 되는 터에서 젖소를 키우며 살았다. 앞마당에 잡초가 우거저도 뽑지 않았고 오히려 들에 나는 민들레꽃등을 캐다 심어 놓았고 논에서 메뚜기를 몇 마리 잡아다 풀밭에 풀어놓았더니 해마다 벌 떼처럼 번식해 가을이면 동네아이들이 잡아가곤 했다. 봄이 되면 찌르레기기가 어김없이 찾아와 기왓장 밑에 집을 짓고 족제비도 들락거렸다. 눈 쌓인 겨울에는 산비둘기와 까마귀 떼가 찾아와 우사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았다. 난 그렇게 짐승과 잡초 속에서 누구에게서 간섭을 받지 않고 젊음을 보냈다. 이곳에 이사 와서 새장 같은 집이 갑갑하고 무료하기도 하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분주했다. 그와 나는 공감되는 면이 있으면서도 한편 이렇게 인생관이 극명하게 다르다.
그는 때가되면 집을 떠나 방랑자처럼 돌아다니곤 한다. 언덕과 강을 건너고 그리고 산과 들판을 지나 어디론가 헤매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끊는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메주 밟듯이 누비고 다녔다. 그것도 촛불이 꺼지듯 조용하게 다닌게 아니라 요란한 발자국소리를 내며 다녔다. 70대의 고령인데도 그의 열정은 젊은이 보다 뜨겁다.
9월이 되었다. 나는 세월이 빨라 나이 들어가는 것이 아쉽지만 그는 매월 초 집필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작품을 완료하여 출판사에 보낸다. 서재에는 장식품 보다 그의 작품과 책으로 가득 차 있다. 니체가 피로서 글을 써야지 독자들을 감동시킨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활동이 끝나면 땅을 파 굴을 뚫거나 발길 닿는 대로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보헤미안 처럼 이리저리 떠다닌다. 마치 통나무 속에서 햇볕을 쫓아 굴리며 다니는 고대 희랍의 철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