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찌지미’와 ‘꽃찌짐’에 얽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찌지미’와 ‘꽃찌짐’이라는 말이 있다. 표준어로는 ‘부침개’ 또는 ‘전(煎)’, 그리고 ‘화전(花煎)’이라는 말이다. ‘화전’이란 말은 우리말로 풀어 ‘꽃전’이라고도 한다.
‘찌지미’를 ‘찌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표준어 ‘지짐’의 ‘지’가 경상도식 억양으로 경음화(硬音化) 된 것이다. 때문에 ‘꽃찌짐’을 ‘꽃지짐’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찌지미’와 ‘찌짐’은 청소년(靑少年)들이 주로 부르는 말이고, 노인들은 ‘지지미’ 또는 ‘지짐’이라고 한다.
“니 오널 사돈양반 잔체집에 가머 ‘지지미’ 쫌 마이 가 와가주고 식구덜 논갈라 묵고, 건동에 혼차 사넌 건동할매 잩에도 한 봉다리 갖다 디래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 너 오늘 사돈양반 잔칫집에 가면, ‘부침개’ 좀 많이 갖고 와서 식구들끼리 나누어 먹고,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할머니한테도 한 봉지 가져다 드려라”는 말이다.
진달래 꽃찌짐
표준어 ‘지짐’은 빈대떡이나 파전처럼 재료들을 밀가루 푼 것에 섞어서 기름에 지져내는 음식물을 말한다. 그러나 ‘지짐’은 같은 표준어인 ‘지지미’ 또는 ‘지짐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이다.
‘지짐’은 반찬이나 술안주로 먹는 ‘전(煎)’이고, ‘지지미’ 또는 ‘지짐이’는 반찬으로서의 ‘찌개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지미(지짐이)’는 국물을 바특하게 하여 좀 짜게 끓인 찌개류의 총칭(總稱)으로 1940년을 전후하여 나온 조리서(調理書)에 자주 언급된 음식이다.
지지미(찌개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의하면 ‘지지미(지짐이)는 국과 찌개의 중간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잉어·민어·쏘가리·자가사리·게·병어·비웃 등의 어류(魚類)와 멧나물·무·호박 등의 채소로 ‘지짐이’를 끓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이르는 ‘찌지미’는 이러한 ‘지지미(지짐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침개’, 즉 ‘전(煎)’을 말하는데, 빈대떡·저냐·누름적·전병 따위와 같이 기름에 부쳐 조리하는 음식을 말한다.
오늘날의 ‘부침개’는 우리나라 사람조차 먹어보지 못한 것이 많을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代表的)인 우리나라의 ‘부침개’는 감자를 갈아서 만든 ‘감자전’, 각종 해산물(海産物)을 섞어 만든 ‘해물파전’, 부추를 넣고 만드는 ‘부추전’, 김치를 넣고 만드는 ‘김치전’ 등이 있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부침개’로는 녹두를 갈아서 부쳐 만든 ‘녹두빈대떡’이 있다.
부추전(정구지 지짐)
또 한 가지 대표적인 것으로 ‘꽃찌짐’이란 것이 있는데, ‘꽃찌짐’은 앞서 말한 대로 ‘화전(花煎)’을 말한다. ‘화전’은 봄에는 ‘진달래꽃’이나 개나리꽃, 벗 꽃을 넣어 만들고, 여름에는 장미꽃과 ‘맨드라미’로, 가을에는 국화꽃으로 만든다.
화전
화전(花煎)은 찹쌀 반죽에 ‘진달래’나 국화꽃 등 먹을 수 있는 꽃이라면 무엇이든 재료(材料)로 사용하여 기름에 납작하게 지진 ‘전(煎)’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煎)’이란 말도 표준어인 ‘부침개’를 말한다.
‘전(煎)’은 생선류·육류·채소류 등을 얇게 썰어 달걀과 밀가루를 풀어 묻힌 뒤 기름에 지져 만든 요리로 전유어·저냐·지짐개·간남이라고도 한다.
부침개
‘전(煎)’은 반찬용·제례용·술안주용 등으로 사용되며, 간장을 곁들이면 맛이 더욱 좋다. 재료는 쇠고기의 살코기, 간·양·천엽 같은 내장류(內臟類)와 지방분(脂肪分)이 없고 담백한 종류의 생선이 많이 쓰인다.
한편 ‘꽃찌짐’, 즉 ‘화전’에는 장미·진달래·봉선화 등의 꽃잎이 주로 쓰인다. ‘꽃찌짐’은 또 ‘꽃떡’, ‘꽃부꾸미’, ‘꽃지지미’, ‘꽃달임’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간식이나 별식으로 ‘조청(造淸 ; 묽게 고아서 굳어지지 않은 엿)’에 발라 먹는다.
‘화전’은 모양이 너무 예뻐서 음식이라기보다는 풍류(風流)와 눈의 호사(豪奢)를 위해 만든 음식으로도 보인다.
예쁜 꽃찌짐
‘화전’은 철마다 다른 꽃으로 만들 수 있어 계절(季節)을 느끼게 해주는 음식으로 봄에는 진달래나 하얀 배꽃으로 지지고, 여름에는 노란 ‘장미화’와 흰 ‘찔레꽃’으로, 가을에는 황국(黃菊)과 감국(甘菊) 꽃잎을 얹어 지지기도 한다.
꽃이 없는 겨울에는 미나리, 쑥잎, 대추, 석이 등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화전을 지져 먹었다. 그러나 이런 별식(別食)은 어디까지나 중산층(中産層) 이상의 가정에서나 만들어 먹을 수 있었고, 꽁보리밥과 갱죽으로 연명하는 서민가정에서는 그야말로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의 떡)에 불과했었다.
화전
부유한 중산층(中産層) 가정에서는 까마득하게 높게 보이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꽃찌짐’을 만들어 먹곤 했었다. 그러나 서민가정에서도 ‘화전놀이’까지는 못하더라도 ‘꽃찌짐’을 만들어 먹는 경우는 있었다.
모처럼 풍년이 들고, 소작료(小作料)가 오르지 않아 조금 여유가 생기면, 마당 한구석에 야외부엌을 만들어 조선 솥 ‘소디배이’를 뒤집어 불을 피우고, 남편과 자식들이 나뭇길에서 꺾어온 ‘참꽃’으로 ‘꽃찌짐’을 만들어 먹기는 했었다.
찌짐 만들기
물론 부잣집에서와 같은 찹쌀가루도, 꿀물이나 ‘조청(造淸)’은 없었지만, 멥쌀가루에 큼직한 ‘참꽃’을 얹어 들기름으로 지져내도 그 자체로 꿀맛이었다.
‘화전’은 ‘화전놀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화전놀이’는 고려(高麗) 시대 부터 행해진 전통적(傳統的)인 풍습이다. 특히 음력 3월3일은 ‘삼짇날’이라 하여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로 집안의 우환(憂患)을 없애고 소원성취를 비는 산제(山祭)를 올렸다.
산과 들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부녀자(婦女子)들이 개울가에 ‘번철’과 쌀가루를 들고 나가서 꽃을 따서 그 자리에서 ‘화전’을 지지고, ‘오미자’즙에 진달래를 띄운 ‘진달래 화채’ 등과 함께 먹으며 온몸으로 봄을 느끼며 하루를 즐겼다. 이 연례행사(年例行事)를 ‘화전놀이’라고 한다.
재경향우회 ‘정야’ 선배님께서 어릴 때 어른들이 ‘아기봉산’에서 ‘화전’을 만들어 먹고 놀이를 했다는 그 놀이가 바로 ‘화전놀이’다. 그 선배께서 그 놀이가 혹시 ‘호미씻이’와 관련이 있느냐고 했으나, 전혀 관련이 없다.
‘화전놀이’는 음력 3월 3일, 즉 ‘삼월삼짇날’ 놀이이고, ‘호미씻이(洗鋤宴)’는 힘든 농사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휴식기(休息期)에 들어가는 절기를 말하는데, 음력 7월 중순에 해당된다.
‘호미씻이(洗鋤宴)’는 논밭을 매던 호미를 씻어 두고 놀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풋굿·초연(草宴)·머슴날·농부날이라고도 한다. 여름농사가 거의 끝난 음력 7월 보름 무렵 호미를 씻어 걸어두고 날을 잡아 음식을 장만하여 산이나 계곡을 찾아 농악(農樂)을 울리면서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긴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농사(農事)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한해의 노고(勞苦)를 치하하고, 삿갓을 씌워 황소에 태워 이웃 머슴들이 에워싸고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돌아다니면, 그 머슴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거하게 대접하곤 했었다.
화전놀이
본론으로 돌아간다. ‘진달래’로 만든 화전은 ‘두견화전(杜鵑花煎)’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두견화(杜鵑花)’는 중국에서 ‘진달래’를 이르는 말이다. 남상규가 부른 ‘고향에 찾아 와도’에 등장하는 언덕위의 ‘두견화’가 바로 ‘진달래’다.
고향에 찾아와도
작사 : 이재호
작곡 : 이재호
노래 : 남상규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맞춰 불던 내 동무여
흰 구름 종달새에 그려보던 청운의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실버들 향기 가슴에 안고
배 띄워 노래하던 내 동무여
흘러간 굽이굽이 적셔보던 야릇한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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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화’의 유래는 중국 촉(蜀)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전쟁에 패망하여 죽어 ‘두견새’가 되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이 새가 해마다 봄이 오면 나라 잃은 설움이 너무나 벅차올라 피눈물을 흘리며 산천(山川)을 날아다니는데, 그 눈물이 떨어져 피어 난 꽃이 바로 ‘진달래꽃’이라는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두견새’는 ‘두견이’라고도 하는데, ‘두견이’는 두견잇과의 여름새로 뻐꾸기와 비슷하나 작고, 몸빛은 푸르스름한 회색과 갈색을 띤다.
둥지를 틀지 않고 딴 새의 둥지에 알을 낳으며, 여름철 숲에서 많이 우는데 그 소리가 특이하다. 귀촉도, 두견, 두견새, 두우(杜宇), 망제(望帝), 망제혼, 불여귀(不如歸), 시조(時鳥)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두견새
‘화전’얘기로 돌아간다. 조선시대 궁중(宮中)에서는 궁녀들이 왕비와 함께 금원(禁苑 ; 창덕궁의 후원, 비원이라고도 함)에 나가서 ‘화전’을 부쳐 먹으며, 봄의 풍류(風流)를 즐기기도 했었다.
‘두견화전(杜鵑花煎)’은 봄꽃인 ‘참꽃’ 즉, 진달래로 만드는 것으로 떡으로도 볼 수 있고, ‘전’으로도 볼 수 있다. ‘떡’ 만드는 방식으로 빚어 ‘전’ 지지듯이 지져내기 때문이다.
두견화전
‘두견화전(杜鵑花煎)’ 즉 진달래 ‘꽃찌짐’은 디딜방아에 곱게 찧은 찹쌀가루를 ‘체’로 한번 쳐내어 익반죽(가루에 끓는 물을 쳐 가며 하는 반죽)을 한 후, 동그랗게 빚어서 기름에 지지다가 그 위에 ‘진달래꽃’을 잘 펴서 얹고, 마저 익힌 다음에 ‘조청’을 묻혀서 먹는다.
가을의 중양절(重陽節 ; 음력 9월 9일)에는 진달래 대신 국화꽃잎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가을이 되면 ‘삼짇날’과 비슷하게 국화꽃과 잎으로 만든 ‘국화전(菊花煎)’을 만들며 산이나 계곡(溪谷)을 찾아 단풍을 즐기기도 했고, 국화로 빚은 ‘국화주(菊花酒)’와 유자와 배로 만든 ‘유자화채’ 등과 함께 ‘화전’을 먹기도 했었다. 이 역시 가을철 ‘화전놀이’가 된다.
꽃찌짐 재료
‘삼짇날’처럼 음력 9월9일에 양이 겹치는 중양절(重陽節), 또는 중구일(重九日)이 되면, 이날은 ‘손’이 없다하여 우리들의 고향 경상북도에서는 무슨 일이든 마음 놓고 처리하면서 일부지방에서는 추석날 햇곡식이 없어서 못 지낸 차례(茶禮)를 지내기도 했었다.
‘화전’은 이렇듯 자연과 자신을 일치시키려 했던 옛 어른들의 자연관(自然觀)이 음식에 까지 나타난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는데, 혼례(婚禮)와 회갑(回甲) 등 경사스러운 날 큰상을 차릴 때 쓰는 장식용(裝飾用) 음식으로도 쓰였다.
잔칫날 음식을 높이 고여 ‘고배상(高排床)’을 차릴 때 갖은 ‘편(떡)’을 직사각형으로 크게 썰어 네모진 ‘편틀’에 차곡차곡 높이 괸 후 ‘화전’으로 ‘웃기’를 얹어 아름답게 장식(裝飾)하였다.
‘화전’ 만드는 법은 우리의 옛 조리서(調理書)인 장씨부인이 쓴 ‘음식디미방’과 빙허강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와 있다.
화전 만들기
‘음식디미방’의 전화법(煎花法)에는 ‘찹쌀가루에 거피(去皮)한 메밀가루를 조금 넣고 두견화, 장미화, ‘출단화(黜壇花)’의 꽃을 많이 넣고, 눅게 말아 끓는 기름에 뚝뚝 떠 넣어 바삭바삭하게 지져서 한 김 나갈 때 꿀을 얹어 써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출단화’란 ‘황매화(黃梅花)’를 말하는데, 이는 ‘황매화’가 단(壇)에서 쫓겨났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국의 당나라 황제들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물의 명, 즉 수명(水命)을 받았다는 뜻에서 황색(黃色)을 꺼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唐)의 황제들은 궁궐이나 사찰에 심었던 황색의 황매화를 제단에서 모두 없앴는데, 이런 뜻에서 황매화를 ‘출단화(黜壇花)’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규합총서’의 ‘꽃전’에는 “냉수에 반죽하면 빛이 누르고 기름이 많이 드니 소금물을 끓여 더운 김에 반죽하여 가루를 쥐어 치쳐 헤어지지 않을 만치 반반한 접시에 국화(菊花) 모양으로 빚고, 밤소를 넣어 족집게로 가는 살을 박아 써라. 진달래와 장미(薔薇)는 많이 넣어야 좋고, 국화는 너무 많이 들면 쓰다. 국화송이는 푸른 꼭지 없이 하고, 가루를 묻혀 지져도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달래 ‘화전’은 영양학적(營養學的)으로도 우수하여 봄철 춘곤증(春困症)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 진달래꽃은 ‘플라보노이드’와 ‘폴리페놀’ 등 항산화 물질이 들어 있어 우리 몸에 활력(活力)을 주고, 피부노화 방지 등 젊음을 유지해 주는데 도움을 주며, 찹쌀가루는 비타민 B6가 풍부하여 계절의 변화로 오는 우리 몸의 스트레스를 예방해 준다.
영양가 높은 화전
이토록 보기 좋고 영양가(營養價) 높은 ‘화전’은 홍석모(洪錫謨)가 160년 전쯤의 서울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에도 삼짇날의 절식(節食)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나 노래가사 등에도 등장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음식으로 부각되어 왔다.
평안부사(平安府使)로 부임하다 개성 장단의 ‘황진이’ 무덤을 찾아 술과 시조(時調) 한 수로 제(祭)를 올렸다 해서 벼슬에서 파직(罷職) 당한 백호 임제(白胡 林悌 1549~1587)가 읊은 시조에는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의 ‘화전’ 풍습이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개울가 큰 돌 위에 솥뚜껑 걸어 놓고
흰가루 참기름에 꽃전 부쳐 집어 드니
가득한 봄볕 향기가 뱃속까지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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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종이 글을 쓰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우리 가곡(歌曲) ‘화전놀이’에도 ‘진달래 꽃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화전놀이’가 전국에서 성행(盛行)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전놀이
작사 박경종
작곡 김동진
진달래 꽃피는 봄이 오면은
나는야 언니 따라 화전놀이 간다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를 깔고
진달래 꽃전을 같이 지진다.
달님처럼 둥그런 진달래 꽃전은
송화가루 냄새보다 더 구수하여
나는야 언니하고 같이 먹으면
뻐꾸기도 달라고 울며 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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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찌짐’ 즉, ‘꽃지짐’은 김상옥의 사향(思鄕)에서도 어머니의 솜씨와 그리움으로 묘사(描寫)되고 있다. 향토색 짙은 소재와 다양한 감각적 심상(心想)으로 고향의 정경을 묘사하는 이 시조에서 작가는 관념적(觀念的)인 고향노래가 아니라 묘사에 의한 선명(鮮明)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운 그의 고향을 그려내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사향(思鄕)
김상옥(金相沃)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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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놀이’에서는 ‘화전가(花煎歌)’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화전가’는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봄날의 ‘화전놀이’를 즐기면서 나누는 기쁨과 애환(哀歡)을 담은 당대에 유행한 노래의 한 유형이다. 옛적 경상도(慶尙道)에서 구전(口傳)되어 오던 화전가 한 가지를 소개한다.
화전가
가소롭다 가소롭다 여자일신 가소롭다.
규중에 깊이 묻힌 여자유행 같을소냐.
우리 동류 서로 만나 한번 놀기 어렵거던
무심하신 남자들아 우리말 좀 들어 보소
팔자 좋은 남자들이 부럽고도 애달프다.
규중 안 여자라도 이리 놀 줄 알건마는
남자놀음 열 가지에 한 가지도 못하오니
가소로운 여자신세 어리고도 어린 마음
그 아니 애달픈가 애달고도 애달도다.
규중이 깊다 한들 몇 길이나 깊었던고.
십리출입 오리출입 마음대로 어이하리
친구고 사군자와 봉제사 접빈객에
규중의 여자일신 조심되기 그지없고
명주길삼 삼베 길삼 길삼방적 골몰하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어느 여가 놀잔 말고
애달픈 규중심처 화전 가서 풀어보자.
백백홍홍 가진 교태 만화방창 시절이라
놀아 보세 놀아 보세 화전하며 놀아보세
남촌북촌 상하촌에 면면이도 모여보세
장장춘일 긴긴해에 하는 말이 화전공론
여자동류 서로 만나 만단개유 하는 말이
백년광음 헛쁜 인생 아니 놀고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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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화전놀이와 관련한 가슴 아픈 사연(事緣) 한 가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부터 경상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화전가’에는 ‘덴동어미 화전가(花煎歌)’라는 노래가사가 전해 내려온다.
옛적 우리네 여인들의 애달픈 사연이자 장편 서사가사(敍事歌詞)인 ‘덴동어미 화전가(花煎歌)’에 등장하는 주요내용과 주인공 ‘덴동어미’를 가사와 연결하여 간략하게 소개한다.
진달래 화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어느 봄날,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어느 마을에 한 무리의 여인들이 인근 산에 올랐다. 해마다 단 하루,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이 중세(中世)의 여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집밖에서의 놀이, ‘화전놀이’가 벌어진 것이다. 이 하루의 유흥(遊興)을 위해서 여인들의 준비도 만만찮았다.
화전 만들기
여인네들은 놀이에 필요한 물품(物品)들을 추렴하는데, 여기에는 물론 ‘화전’을 부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름과 쌀가루가 중심이었다. 물품의 추렴이 끝나면 여인네들은 다투어 몸단장을 하고 모여든다. ‘열일곱 청춘과녀(靑春寡女)’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들었고, 건넛집 ‘덴동어미’는 엿판을 이고 따라나섰다.
여인들은 꽃구경에, ‘화전(花煎)’을 부쳐 먹고 글을 외고 노래도 하며 즐겁게 논다. 이 때 열네 살에 시집 와서 열일곱에 홀로 된 청춘과부(靑春寡婦)가 자신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에 ‘덴동어미’가 나서서 그녀를 위로(慰勞)하며 자신의 기구한 한평생을 털어 놓는다.
화전놀이
('화전'을 빚어놓고, 자신이 지은 시를 교대로 낭송하고 있다)
‘덴동어미’는 네 번이나 혼인(婚姻)을 했으나, 네 번 모두 남편을 잃은 여인이다. 거듭되는 상부(喪夫), 아무리 애써도 끝나지 않는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點綴)되는 ‘덴동어미’의 삶은 ‘화전가’의 4·4조 가락에 맞추어 듣는 이들에게 서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화전가’의 가사는 후미에 게재한다.
‘덴동어미’는 경상도 순흥의 아전(衙前) 임이방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열여섯에 예천(醴泉) 장이방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가(媤家)는 부유했고, 잘난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예고 없던 불행이 그녀에게 들이닥쳤다.
결혼한 이듬해 단오(端午) 날, 친정에 가서 부부가 같이 그네를 타다가 줄이 끊어지면서 남편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남편의 급사(急死) 앞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덴동어미’를 보다 못한 시집에서는 친가(親家)와 의논하여 그녀를 개가(改嫁)시킨다.
양가 모두 중인(中人) 계층이라 수절(守節)할 일은 없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상주(尙州) 이이방의 아들 이승발의 후취(後娶)가 되었다. 시집은 넉넉했고 부부간 금슬(琴瑟)도 좋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불행은 그녀를 비켜가지 않았다. 삼년 만에 포(逋 : 아전이 공금을 집어 쓴 빚)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졸지에 중인계급에서 하층빈민(下層貧民)으로 전락한 내외는 이 고장 저 고장을 돌아다니며, 유리걸식(遊離乞食)하다가 우리들의 고향 경주(慶州)까지 내려와 주막집에서 사환(使喚)으로 일하면서 억척으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돈놀이를 하여 삼년 만에 거금(巨金)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준비하고 있는데, 역병(疫病)이 돌아 남편은 물론 돈을 빌려간 사람들조차 모두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덴동어미’는 혼절(昏絶)해 버린다.
두견화전
다시 밥을 빌며 떠돌던 ‘덴동어미’는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을 거쳐 울산(蔚山)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행상(行商)을 하는 황도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머슴살이로 번 돈으로 참깨무역을 하다 배가 난파(難破)하여 빈털터리가 된 사람이었다. 둘은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혼인(婚姻)도 ‘덴동어미’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내외는 밥을 빌어먹으면서 사기짐을 지고 도부행상(到付行商 ;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했지만, 둘 중 하나가 늘 질병(疾病)에 시달려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끝내 그녀는 어느 주막집에서 산사태로 다시 남편을 잃게 된다.
스스로 자진(自盡)하려다가 주막집 주인 아낙의 만류로 목숨을 부지한 ‘덴동어미’는 다시 엿장수 조서방과 함께 살게 된다. 그녀는 살림을 하고 조서방은 울산(蔚山)과 경주(慶州) 지방 오일장을 다니며 엿을 팔았다.
외동읍(外東邑)과 불국동(佛國洞)에 소재하는 ‘입실장’과 ‘불국장’에도 들렸을 것이다.
찌짐용 참꽃
그리고 몇 해 만에 태기(胎氣)가 있어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지극정성(至極精誠)을 쏟았으나, 그 기쁨도 잠깐, 다시 불행은 그녀의 삶을 덮쳐왔다.
‘엿’을 고다가 집에 불이 난 것이다. 아이를 구하려고 안방으로 뛰어든 남편은 불길에 목숨을 잃고, 아이는 간신히 구했지만 중화상(重火傷)을 입어 불구(不具)가 되었다.
이 사고가 그 여자를 ‘덴동어미’로 부르게 된 연유(緣由)가 되었다. ‘불에 덴 아이의 어미’라는 뜻이다.
네 명의 남편을 잃고 아이 하나마저 성히 기르지 못하게 된 ‘덴동어미’는 고향인 순흥(順興)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노년의 이 여인은 해마다 ‘화전놀이’가 벌어지면, 엿 한 고리를 이고 동네마다 찾아다니며, 아낙들의 ‘화전놀이’에 끼어 신명나게 놀이를 주도(主導)하는 이른바 오락(娛樂)프로 리더가 되었다.
경상도(慶尙道) 일원을 돌아다니며 배우고 익힌 춤 솜씨와 노래솜씨가 일품(逸品)이었고, 네 번이나 상부(喪夫)를 당한 기구한 운명을 통해 터득한 인생살이의 굴곡(屈曲)이 많은 아낙들의 애환(哀歡)을 달래주는 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마다 한 보따리씩 이고 간 ‘엿’을 거뜬히 처분(處分)하여 손쉽게 생활비(生活費)를 마련하기도 했고, 한 보따리나 되는 ‘찌지미’를 얻어 와 며칠씩 끼니를 때우기도 했었다.
‘지지미’에는 옷을 만들고 이불을 만드는 천도 있다. 천의 표면이 요철(凹凸)을 이루면서 까끌까끌하고 가벼운 것이 특징(特徵)인데, 몸에 달라붙지 않아 여름철 아이들의 옷이나 홑이불 감으로 인기가 높다.
아이들의 지지미 옷
앞서 예고(豫告)한 대로 ‘덴동어미 화전가’를 수록하기는 하는데, 가사의 길이가 너무 길어 읽기가 불가능할 것이므로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배경음악(背景音樂)으로는 가사에 진달래 ‘꽃찌짐’의 재료인 ‘진달래’의 별칭(別稱) ‘두견화’가 등장하는 남상규의 ‘고향에 찾아 와도’를 게재하여 감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