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을 간직한 순교자들 요람지
배론[舟論]이란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한 것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이며,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이곳의 옹기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적은 이른바 《백서(帛書)》를 작성했고, 이를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1751~1808,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 대였다. 1855년 초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집에 페레올(Ferr´el, 高, 1808~1853, 요셉) 주교 사후에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매스트르 신부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장주기는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현 가톨릭대학교가 그들의 전신으로 지목한, 격식을 갖춘 최초의 신학교였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약 5개월 간 배티에 가매장했다가 11월 초 이곳 배론으로 그 시신이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의 여파로 장주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두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3월 11일(음 1월 25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장주기는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배론 교우촌은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 배론 신학교(舟論神學校)
1855년 충청북도 제천(提川) 배론[舟論]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를 이르는 말로 초대교장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가 취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되었다. 1855년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다. 현재의 가톨릭대학교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다. ‘성 요셉 신학당’은 1866년 병인박해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 황사영 백서의 발견 입수 경위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넣어 근 백년동안 숨겨오다가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따로 간직해 두었다가 그의 친구인 천주교인 이건영(요셉)에게 넘겨주고 이씨는 민 주교께 바쳤던 것이었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민 주교는 1924년 이 백서의 실물 대사본 2백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때 교회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 부활이 보이는 날에는 (배론에서) <김영수> ▒
배 안처럼 아늑한 곳
햇살 모인 골짜기에는
아직도 옹기장이의 불 타고 있습니다
백서(帛書) 쓰던 토굴에는
여전 비장한 숨결 푸릅니다
영원한 젊음의 노래
그보다 질기고 긴 사랑 있을까요
생애는 쉬이 끊어지는 실바람이라지만
햇살은 영원 달리는 기도입니다
부활이 보이는 날에는
늘 눈물 어리는 법
바람소리 물소리 만나는 곳에서는
황홀히도 참회의 숲이 열립니다
일생에 누구 하나에라도 길 열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불빛일 수 있습니다
가슴에 작은 불 밝히면서
쓸쓸한 이웃 하나 깨울 수 있다면
깨워서 눈물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미소일 수 있습니다
■ 순교자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명문가 태생으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 푸르티에 (Pourthi, Jean Antoine) 신부 (1830∼1866)
푸르티에(한국명 : 신 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성 장주기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장주기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신학생 양성에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도록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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