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농다리
충북 진천지구로 역사탐방을 떠나다-종박물관,보탑사,농다리
2014년 4월12일 토요일
첫번째 탐방지는 진천 종 박물관
국내 유일의 종 박물관으로
한국 종의 연구, 수집, 전시, 보전은 물론
기획전시, 교육 및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한국 종의 예술적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고자 2005년 9월 개관되었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조사된 진천 석장리
고대 철생산 유적지가 있는 진천에 건립되어 더욱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진천 석장리는 한국 최초로 4세기대로 편년되는 고대제철로의 실례가
발견되었다는 점을 들 때 금속공예의 제작도 가능하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진천 인근 지역인 청주 운천동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범종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의 용두사지 철당간도 남아있다.
고대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제철로를 소유했던 진천에 금속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범종의 문화를 기리는 종박물관의 건립은 필연적 인연이라 말한다.
우리나라 범종의 상부
음통(音筒)은 잡음을 제거하는 역활을 하며,용뉴(龍金+丑)는
용머리와 휘어진 목으로 구성된 종을 매다는 고리이다.
일본과 중국은 하나의 몸체로 이어진 쌍용인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한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上帶)는 천판(天板)과 연결된 종신(鐘身)상부의 문양 띠이다.
시대에 따라 보상화무늬, 연당초무늬, 범자무늬등으로 장식했다.
연곽(蓮廓)과 연뢰(蓮蕾)는 연꽃봉오리 형태인 연뢰와 이를
감싸는 방형곽을 연곽이라고하며 연봉은 36개를 장식해 왔다.
윗사진은 상원사 동종의 복제품
上院寺 銅鐘
통일신라 725년(성덕왕24년), 높이 1,670mm, 구경 903mm, 국보 제36호
종신에는 주악천인상과 당좌를 번갈아 가며 새겼다.주악천인상은 종 좌우에
있으며 2구가 한쌍이 되어 나란히 구름위를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은 커다란 공후를 끌어안고 연주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천인상은 생황을
불고 있다.
천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개원 13년(725년,성덕왕 24년)에 주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月精寺略史에는 성덕왕때
산내 진여원(眞如院 : 신라 귀족자제 들의 교육원)에 봉안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움통 또는 명동(鳴洞)
우리나라 종은 지상에서 낮게 띄워 매달아 놓고 종구(鐘口) 아래쪽의 땅을
움푹파거나 독을 묻은 경우가 많다. 종을 첬을 때 울림소리가 종구에서
빠져나와 이곳에서 소리를 메아리처럼 반사시킴으로써 여운을 길게 하도록
고안된 시설로 보인다.
상대와 같은 문양인 하대(下帶)와 종의 입구인 鐘口도 보인다
종구에서 올려다 본 종의 상부의 내부 모습
우리나라 범종에만 보이는 독특한 양식의 하나로 음통의 내부가 비어 있고
하부에는 종의 몸체와 관통되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사진에 보이는 작은원 오른쪽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종을 치는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
당목과 직접 닿는 부분인 당좌는 종신의 하대 위에 종구의 밑에서 가장
불룩한 부분에 위치한다. 이 부분을 가격하면 가장 좋은 소리가 난다.
* 좋은 종소리란?
범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이다. 범종에서 좋은 소리는
첫째, 맑은 소리이다.
즉 잡음이 없고 귀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종의 여운(餘韻)이 길어야 하고,
셋째, 뚜렷한 맥놀이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세 요소는 종에 합금, 쇳물의 냉각 속도, 종의 형상, 두께 분포,
문양 배치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구리와 주석의 함량이 중요한데,
주석 함량이 12~18% 정도일 때 소리가 가장 좋다.
성덕대왕신종 공양자상
제1전시실로 들어가기 전 만나게 되는 이곳은 한국 종을 대표하는
성덕대왕신종의 모형과 함께
종을 완성한 후 거푸집을 떼어내는 형상을 띠로 둘러 종의 탄생을 알리고
벽면에는 종의 울림을 상징하는 곡선이 2층까지 전개되어 있다.
성덕대왕의 神鐘(속칭 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하여 제작했다.
하부의 종 구연부(口緣部)가 팔능(八陵)으로 되어 있는 점과 천판의 주변에는
견대(肩帶)장식이 있는데 다른 통일신라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종신에는 연꽃위에 무릎을 꿇고 불전에 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대부분의 신라종에는 주악천인상이 부조되어 있으나, 이 종에서
나타난 공양좌상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하는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성덕대왕 신종 복제품
성덕대왕 신종
통일신라 771년(혜공왕 7년),높이 3,750mm, 구경 2,270mm,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은
고대 종 가운데 최대의 범종이자 정교한 세부 장식과
아름다운 종소리를 간직한 한국 범종 최고의 걸작이다.
명문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이 부왕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대인 혜공왕(惠恭王) 7년(771년)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며, 이 종을 제작하는데 무려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무게는 18.9톤에 이르며 ‘에밀레종 설화’로 유명하다
1. 밀랍 녹이기
가마솥에 밀랍과 소기름을 적당히 배합하여 열을 가해 녹인다.
2. 문양 조각하기
상대, 하대, 연곽, 당좌 등의 문양을 정교하게 조각한 뒤 밀랍으로
문양을 찍어낸다.
3. 밀랍 원형 만들기
종 모양의 밀랍 외형 뒤에 문양을 뜬 조각을 붙여 밀랍 인형을 만든다.
4. 외형 바르기
밀랍 원형 위에 주물사(이암과 모래 등)를 여러 겹 바르고 응달에서
자연 건조시켜 외형을 완성시킨다.
5. 밀랍 녹이기
건조된 외형에 열을 가하여 내부에 있는 밀랍을 녹여 외형을 완성한다.
6. 내형 만들기
회전판에 진흙과 볏짚을 섞어 만든 벽돌을 쎃고 흙을 발라 내형을 완성한다.
7. 범종 고정하기
호 안에 있는 내형 위에 회형을 잘 맞추어 고정시킨다.
8. 쇳물 붓기
내, 외형의 조립이 끝나면 거푸집을 씌운 후 땅 속에 묻은 후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녹인 쇳물을 붓는다.
9.종의 탄생(Birth of Bell)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된 종은 표면의 문양도 아름답게 나와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리가
좋아야 한다. 종을 치고 난 뒤 파동이 4~5초 뒤에 나타나는 것이 가장 좋은 소리이다.
이것보다 빠르거나 늦으면 듣기에 거북하거나 시끄럽게 들린다.
해인사 홍치4년명 종(海印寺弘治四年銘鐘)
조선 성종22년 1491년, 높이 848mm,구경 570mm, 청동
종의 정상에는 두마리 용으로 된 용뉴가 있으며,음통은 없으나 천판가운데
일부러 만들어 놓은 구멍이 하나 있다. 상대는 없으며 중대는 3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어 종신의 가운데 부분에는 3條線을 두르고, 그 위를 화려한 당초문과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으며 3조선 아래 부분은 4좌의 雲龍紋으로 장식하였다.
연곽과 연곽사이에는 보살문이 4구 있는데,
화려한 寶冠을 쓰고 머리에는 頭光을 갖추었다.
주인마님의 모습인지 아니면 공주님의 모습을 한 西洋鐘인 Bell의
Ball은 그 여인의 치마속에 있구나.
하인이나 집사를 부르는 종인지? 아니면 사치품의 하나인지? 궁금하다.
생거진천대종각(生居鎭川大鐘閣)
興武大王 金庾信 誕生址ㆍ胎室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ㆍ태실
興武大王金庾信遺墟碑文
俗離山의 北走한 一支가 月川의 左右에 逶迤綿互(위이면호 :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하다가 京畿忠淸의 境上에 七賢山으로 聳起(용기)하고
南折하여 鎭川의 西에서 寶蓮山을 이루니 山勢가 周遭(주조)하고 窈窕昭朗
(요조소랑 : 아름답고 밝음))하여 진실로 一區의 勝地이며 山下의 桂陽
(계양 : 달과 해))은 특히 新羅統三元勳 金公庾信의 鍾毓地(종육지)로
著聞(저문 : 널리 소문남)하였다
新羅第二十六代眞平王時에 公의 父 舒玄이 그 妻 萬明으로 더불어 萬弩郡을
出守하니 萬弩(만노)는 지금 鎭川의 舊號라 在任中에 夫婦가 한가지 異夢을
得하고 懷姙한지 二十月에 公을 生하니 胞衣를 寶蓮山의 一岡에 藏하고 따로
吉祥山이라 名하였다.
公이 幼로부터 岐嶷異常(기억이상 :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하였음은
十五歲에 花郞으로 추대되었음이 이를 證하거니와 그 大器의 完成이 많이
庭闈間(부모 또는 가정에서)의 提撕陶甄(제시도견 : 후진을 가르치고
만물을 만듬)에 由하였음은 斬馬巷(참마항 : 문밖에서 말을 벤 고사)의 一事에서
이를 想見할 것이다
대저 公 一生性德의 基礎는 實로 萬弩에서 奠定(전정 : 정해진)된 것으로서 他日
中嶽에 護國의 大願을 立하고 月生에 伏敵의 神劒을 得하여 金春秋로 더불어
內外相應 苦心戮力(육력 : 서로 힘을 합쳐)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次第로
剗平(잔평 : 깎아 평평하게 하다)하고 드디어 震邦統一의 大業을 成就하여
生하연 太大角干의 極位에 躋(제 : 오르고)하고 死하연 一人臣으로
興武大王의 封榮을 受하게 된 根源일진데 그가 三國爭覇의 要衝인 萬弩에 稟生하여
일찍부터 이 일대의 風土利病에 慣熟하여 그를 善導利用함에 由한 것도 적다
못하리니 後의 公을 相慕하는 者 이 嶽降(악강 : 산아래)의 此地를 靈視하려 함이
無以한 것이 아니다
論者가 或 新羅의 統三에 唐의 兵威를 假한 것이 民族觀念上 如何하랴를
難하지마는 본디 民族觀念은 西洋 第十五世紀 以降의 社會的 産物로서
東洋古代에는 그 語句조차 發見되지 않는 것이니 저 唐의 創業平難에 여러번
突厥回紇의 外兵을 借用하였음이 唐의 帝業의 疵類가 되지 않고 西洋中世紀의
國家發展에 예사로 各國傭兵을 援用하였다 해서 그 것을 貶薄할 수 없는 것처럼
後世의 民族主義的 標準으로써 古代의 自國至上的 國民倫理를 逆推함은 결코
평론이 아니다
하물며 三國頡頏(힐항 : 서로 우열을 다투는 일)의 全局에 있어서
百濟의 成忠과 高句麗의 蓋蘇文을 合倂하고도 有餘하다할 人格幹局이 진실로
公이 이룬 三國의 統一이 新羅의 手에 委任됨에는 特殊한 歷史的 意義가 賦存해
있음이요 더욱 新羅以降으로 公의 胎室을 祀典에 列하고 誕生地에 祠宇를 立하여
香火가 綿綿하며 매양 國民生活에 分裂과 混亂이 있을제면 公에 對한 思念嘆仰이
油然(구름이 성하게 이는 모양)히 興起됨은 다 偶然한 일이 아니다
光復以後에 道門의 人士가 鄕土觀念뿐아니라 國民精神的 要求로 부터 萬弩의
古蹟을 闡揚하기에 注力하매 더욱 統一된 國土의 兩斷을 悲痛하는 此際에
公의 誕生舊基에 樵蘇를 申禁하고 碑板을 高樹하여서 국민의 歷史的 感省에
金鍼을 痛施하려하니 그 意에 感치아니하며 그 誠이 格치 아니하랴
統一 一念이 千秋에 相照하나니 此碑 此記가 한갓 一片述古의 文에 그칠 것이 아니다
一千九百五十三年 四月 日 六堂 崔南善 撰
時菴 裵吉基 書
한자逶迤(구불구불할 위,비스듬할 이), 聳(솟을 용), 周遭(에워 쌈), 胞衣(태),
岐嶷기억(어릴때 부터 재능이 뛰어남), 提撕陶甄(제사도견 :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며
도공이 도기를 만든다),
剗平(잔평 : 깎아 평평하게 하다), 躋(오를제), 樵蘇(초소 : 초목을 베는 일), 紇(명주실 흘),
頡頏(힐항 : 서로 우열을 다투는 일), 幹局(혹은 幹才 :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재간),
申禁(경계하고 금하다), 鍾毓地(종육지 : 태어나서 자란 땅)
보탑사로 이동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도로명주소:도로명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보탑사
고려시대의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연곡리 절터에 자리잡은 절이다.
근래에 삼국시대 목탑 건축의 전통을 잇는 웅장한 삼층목탑을 지어
시선을 모으고 있다.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로 부르는 데 비해 우리나라 탑의
주류는 석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처음 전래되던 4세기에서
6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은 누각 형식의 다층 목탑들이 지어졌다. 그중 가장
대단한 것이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이었으나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지금까지 남은 목탑 형식의 건축으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나
보은 법주사 팔상전을 들 수 있다. 그나마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원한 것이고 쌍봉사 대웅전도 1984년에 실화로 잃어 복원한 것이다.
쌍봉사 대웅전이나 법주사 팔상전은 겉에서 보면 다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에서
위까지 모두 트인 통층 구조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보탑사 목탑은 1층에서
3층까지 사람이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겉모습은 탑이지만
내부는 각 층마다 법당인 다층집으로, 황룡사 구층목탑 이래 1300년 만에 사람이
오를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이다.
백팔번뇌의 의미를 담아 높이 108척, 즉 32.7m 규모로 지었고
상륜부까지 포함하면 전체 높이는 42.7m에 이른다. 전통기법대로 금속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목재를 짜맞추어 3년에 걸쳐 지었으며 공사에 참가한
대목은 앞으로 천 년을 장담하며 정성들여 지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탑사앞 느티나무,수령이 327년
보탑사 앞 주차장에서 바라 본 목탑과 범종각,법고각
보련산 보탑사 사천왕문과 현판
진천의 보탑사는 천년 사찰이 아니지만 3가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 건축의 아름다움, 불자의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보련사 자락의 소나무 숲과 수백년 된 느티나무, 그리고 사찰로 들어가는 길목의
논과 밭과 호수와 숲은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의 때를 벗겨준다.
무겁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된다.
봄에는 꽃들이 노래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춤을 추며,
가을에는 단풍이 그림을 그리고, 겨울에는 설경으로 합장한다.
*충북일보 변광섭글에서 일부발췌
좌측이 法鼓閣(法鼓, 雲板, 木魚), 우측이 梵鐘閣
범종각의 주련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 철위산 아래 어두운 지옥 밝혀주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 지옥 아귀 축생 삼도의 고통과 칼산의
지옥고통 없애주며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 모든 중생 깨달음을 이루게 하소서.
웅장한 보탑사 목탑
보탑사 木塔(남쪽)
1층 : 大雄寶殿(대웅보전), 2층 : 法寶殿(법보전), 3층 : 彌勒寶殿(미륵보전)
2층 법보전의 윤장대
윤장대(輪藏臺)란 불교경전을 넣어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써
윤장은 전륜장(轉輪藏)의 준 말이다. 대장경을 소장해 두는 곳이란 뜻의 윤장대는
경전을 담는 대층감(大層龕 : 書架)의 중심에 돌아가는 기둥을 세워서 8면의 서가를
돌리도록 만들어져 있다.처음에는 승려들이 경전 등을 보관하며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팽이처럼 회전하는 구조를 꾸몄는데, 후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돌리는
것만으로도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부여졌다.
동쪽의 약사보전(약사여래 부처님)
북쪽의 적광보전(비로자나여래 부처님)
서쪽의 극락보전,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남쪽에 대웅보전의 현판이 걸려있다.
극락보전( 아미타여래 부처님)
대웅전(석가여래 부처님)
8각지붕의 영산전은 靈鷲山에서 靈山會를 설법하시는 석가모니를 모신 곳
지장전(地藏殿)
육도(六道)의 윤회(輪廻)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고 지옥의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인도하여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구세주를
모신 전이다.
중앙에 지장보살, 왼쪽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오른쪽에는 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있으며 좌우에 죽은후 우리 죄를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가 있다
산신령인 호랑이와 노인을 모신 山神閣
열반(涅槃)하신 석가여래님의 와불(臥佛)을 모신 적조전(寂照殿)
적조전 천정의 보개(寶蓋 : 닫집)와 용의 조각

涅槃寂寂無本名(열반적적무본명)
-열반하시어 적막한 가운데 본 이름이 없어졌구나
喚作如如早變生(환작여여조변생)
-이름을 부르러하나 일찍 변생하셔서
欲問經中何極則(욕문경중하극칙)
-부처님 경전을 묻고 싶었으나 어찌 지극한 해법을 알 수 있을 것인가
石人夜聽木鷄聲(석인야청목계성)
-돌사람 밤에 나무 닭소리를 듣고 있구나
계영배(戒盈杯 : 넘침을 경계하는 잔)처럼 물그릇에 어느 정도 물이 차면
아래로 흘러 보내는 자연친화적인 灌漑水路(관개수로)
반가사유상
내림 수키와의 마지막 부분인 수막새에
연꽃봉오리 기와로 기와의 흘러내림을 막아 주었다
인공 연등(蓮燈)을 나무사이에 꽃처럼 아름답게 달아 놓았다
진천 농다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이다.
다리는 사력암질의 자석을 쌓아 놓은 다리로서, 28칸의 교각이다.
지방유형문화재 28호로서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이며,
교각 사이의 내폭은 80㎝ 내외이다.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며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다리는 고려 초엽시대의 권신, 임장군이 놓았다는 돌다리로 규모도 크고
축조술도 특이하다. 정자, 산책로, 초평저수지까지 연결된 수변데크 등이 조성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잡았으며,
신비로운 다리모양과 주변풍경이 잘 어우러져 드라마 촬영지로도 등장한다.
“살아서 농사를 짓기 위해 건너고 죽어서는 꽃상여에 실려 건너던, 사람과
공존하는 다리, 바로 진천 농다리다.” 작은 돌다리 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 부담스럽지만 이만한 글재주도 부러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글을
인용한 글이다.
이 다리는 중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진천터널을 지나 진천IC로 가다보면
왼편에 어렴풋이 보인다. 원래는 미호천 지류인 세금천을 건너 진천군 문백면과
초평면을 잇던 다리였다. 그러나 1958년 충북에서 가장 큰 영농저수지인
초평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초평면 쪽 길이 끊겨 다리로서 기능은 상실되었다.
진천 농다리는 붉은색의 사암과 역암을 층층이 쌓아올려 만든 돌다리로,
1,000년 넘게 그 모양을 유지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고 한다.
교각의 폭은 대략 4~6m이며 상단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지는데, 표면이
거친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맞물리게 쌓았다. 또한 상판이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데, 이 모두는 진천농다리가 오랫동안 홍수에 견딜 수 있었던 이유들이다.
24개만 남아 있던 교각은 2008년에 원래의 28개로 복원되었다.
교각과 교각 사이의 상판은
170㎝ 길이의 장대석 1개와 130㎝ 길이의 장대석 2개로 덮여 있다.
농다리에 관한 전설
*농다리
임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는데, 몹시 추운 겨울 어느날
세금천 건너편에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는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여인에게 물으니 여인이 답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셔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심과 그 모습을 딱히여겨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 용마는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죽었다고 하며, 용마의 바끈이 끊어져 떨어진 돌을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용바위(쌍바위)라고 전해지고 있다.
* 임연 오누이 힘내기 설화
옛날 굴티 임씨네 집안에서 아들, 딸 남매를 두었는데 둘 다 훌륭한
장사라서 서로 죽고 사는 내기를 하였다. 아들(임장군)은 굽 높은 나무신을
신고 목매기 송아지를 끌고 서울로 갔다가 오기로 했고, 딸은 농다리를 놓기로
하여,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만히 보니
아들은 올 기미가 없고 딸은 거의 마무리가 다 되어갔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묘책을 내어 딸에게는 뜨거운 팥죽 등 먹을 것을
해다주며 일을 늦추게 하였다. 결국 아들이 먼저 돌아온 것에 화가난 딸은
치마에 있던 돌을 내리쳤는데, 아직까지도 그 돌이 그대로 박혀있다. 약속대로
딸은 죽게 되었고, 딸이 마지막 한 칸을 놓지 못해서 나머지 한 칸은 일반인이 놓았다.
역사적으로
여장수가 놓은 다리는 그래도 있는데,
일반인이 놓은 다리는 장마가 지면 떠내려 간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 및 말 발자국
구전(口傳)에 의하면 고려무신정권 말기 임연장군(林衍장군)과
그의 말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곳에 붉은 화살 표지가 있다.
아마도 고려말기에 이 진천 농다리가 측조되지 않았을 까 추측해 본다
종박물관 길안내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백곡로 1504-129장관리 710) 종박물관
승 용 차
중부고속도로 진천 i.c를 통하여 진입(서울 기점 1시간 30분 소요)
진천 i.c 에서 좌회전 - 성석사거리에서 우회전 - 벽암사거리에서 좌회전
- 백곡저수지 방향으로 직진 - 장관교를 지나 좌회전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 및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06시부터 19:50분까지 운행(1시간30분소요)
청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06:50 ~ 20:20분까지 수시운행 (40분소요)
주변명소
김유신탄생지 및 태실, 길상사, 석장리고대철생산유적, 이상설생가,
통일대탑보탑사, 진천농교(농다리), 정송강사, 배티성지, 초평저수지
보탑사 길안내
승용차
진천IC - 약 500M - 안골삼거리에서 좌회전 - 약 2Km - 신성사거리에서 우회전
- 약 800M - 성석사거리에서 직진(왼쪽으로 굽은 도로) - 약 1.3Km
- 군청사거리(금수정사우나)에서 우회전 - 약 4.2Km - 사석삼거리에서 우회전
- 약 1.5Km - 보탑사삼거리(초원휴게소)에서 가운데 길 - 6Km - 보탑사.
시내버스
진천 시외버스터미널 - 연곡리행 버스 승차.
-글쓴이 찬란한빛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