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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성명 |
순교 시기 |
부 |
정약종 (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신유박해 순교자 |
모 |
유조이 (柳召史, 체칠리아) |
기해박해 순교자 |
형 |
정철상 (丁哲祥, 가롤로) |
신유박해 순교자 |
여동생 |
정정혜 (丁情惠, 엘리사벳) |
기해박해 순교자 |
제2절 출생과 가문의 신앙
정하상의 부친 정약종은 서울을 오가며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도와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어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만 여섯 살에 불과하였는데, 모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가산이 적몰되고 분원의 집도 파괴된 탓에 거처할 곳조차 없게 되었으므로 모친 유조이는 정하상ㆍ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청철상의 가족들과 함께 선친의 고향인 마재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년기에 들어서는 오로지 자기 구원에 노력하면서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만을 강구하였으니, 당시 그가 생각했던 재건 방책은 무엇보다도 새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해 오는 일이이었다.
제3절 성직자 영입을 하고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
정하상이 교회의 밀사요 지도층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816년 이후였다. 이에 앞서 그는 무산(茂山) 유배지에서 생활하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학문과 교리를 배웠으며, 조선 대목구 설정 이후인 1833년 12월에는 중국인 유 파치피코(중국명 余恒德) 신부를, 1835년 12월에는 프랑스인 모방(P. Maubant, 羅)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리고 1837년 11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를 영입한 뒤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이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서울 후동(后洞)의 주교관을 지키고 있다가 6월경에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견하고 상재상서를 미리 작성하였으며, 체포된 직후에 종사관을 통해 관장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뒤 8월 15일(양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제4절 정하상의 천주 신앙
정하상의 천주 신앙은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나 문초 과정에서의 진술, 그가 지은 상재상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다양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교리를 연구하거나 학문을 쌓으려 하였으며, 교리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가난 속에서도 나눔(애긍)과 청빈의 삶을 지향하였고, 열심히 대재(大齋)를 지키는 등 고신극기에도 힘썼다. 이러한 그의 신심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평생 정결의 덕을 지키면서 살도록 이끌어 주었고,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용덕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정하상의 천주 신앙과 육화론적 영성은 종말론적 영성인 순교의 용덕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일상의 신앙 생활에서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성사 생활과 영신 구원 생활에 철저하였다. 이러한 영성은 상재상서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그는 정결ㆍ순명ㆍ청빈을 바탕으로 한 복음 삼덕은 물론 신ㆍ망ㆍ애의 실천을 통한 완덕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확고하게 내세 구원을 믿으며 순교를 지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실천하는 신앙이자 박해 시대의 참다운 영성가였다.
제2장 상재상서 에 대한 개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호교론서. 1839년에 성 정하상 바오로가 작성하였으며, 본서와 별첨의 우사(又辭)로 구성되어 있다. ‘상재상서’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재상은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지연(李止淵)을 가리킨다. 총 3,644자로 된 짧은 글이지만,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유학 사상과 벽이단(闢異端)의 논리를 바탕으로 박해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호교론과 신앙의 자유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상재상서는 정하상이 지니고 있던 천주 신앙을 잘 이해하게 해 준다. 그는 이를 통해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또 상제론(上帝論)이나 양지설(良志說) 등을 인용하면서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을 견지하려 하였으며,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바탕으로 제사 폐지 문제를 극복하면서도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하였다. 적응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점은 전통 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로 설명될 수 있다.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통해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아울러 그 교리 설명이나 주안점은 주교요지의 내용과 아주 유사하며, 전통의 제사를 비판한 점이나 신앙심을 드러낸 부분은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진술과도 부합되고 있다.
제1절 상재상서 의 작성 배경
상재상서를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기해박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교리 내용들은 집안의 오랜 신앙 전통은 물론 모친의 가르침, 조동섬의 학문과 교리 지식, 유 파치피코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가르침 등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또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필사되어 전해지던 부친의 주교요지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정하상 자신이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지식이나 신학 교육을 통해 배운 새로운 학문과 교리 또한 상재상서의 작성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3장 국역 상재상서에 관한 분석
상재상서는 크게 본서와 별첨의 우사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는 다시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론은 저술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천주교 교의 해설과 호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론에서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고 있다. 별첨에서는 천주교에서 왜 제사와 신주를 금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제1절 국역 상재상서의 구조
서론 : 저술 동기 11
본론 :
1. 천주교 교의 해설 13
1.1. 천주존재 증명 13
1.2. 천주께 나아가는 길 21
1.2.1.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인간 본분 21
1.2.2. 칠죄종 25
1.3. 천주교의 영혼관 25
1.3.1. 공로와 심판 25
1.3.2. 영혼 불멸성과 혼의 종류 25
1.3.3. 내세와 상선벌악 27
1.3.4. 세상의 행복과 천당의 행복과의 비교 28
1.4. 성교회의 특징 다섯 가지 29
2. 천주교 호교 변증 31
2.1. 천주는 대군대부(大君大父) 31
2.2. 성윤리(性倫理) 33
결론 : 천주교 신앙의 자유 호소 34
3.1 천주교는 무해정도(無害正道)의 교 34
3.2 신앙의 자유를 호소 36
부록 :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 37
제2절 상재상서의 내용
서론 : 저술 동기(“…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1-13쪽
맹자와 한유의 예를 들면서, 옛날 학자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금지하는 법칙을 마련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의 의의(意義)와 이치(理致)를 연구하였다. 그런 다음에 만일 그 대상이 해로우면 그들은 그것을 금하였다. 비록 나무꾼의 말일지라도 그것이 올바르면 그들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의의(意義)와 이치(理致)를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교회 가르침을 박해한다. 이에 정하상은 이 같은 절차에 따라 교회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기 위해 글을 올린다고 한다.
본론 :
1. 천주교 교의 해설 13~31쪽
1.1. 천주존재 증명 (“천지 위에는 … 알 수 있습니다”) 13~21쪽
여기서는 천지 위의 어른(하느님)을 세 가지로 증명한다. 즉 만물, 양지良知(양심), 성경이다.
첫째는 만물이다. 천지 만물은 집에 비유할 수 있다. 집에는 기둥과 주춧돌 대들보 서까래, 문, 담과 벽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우연히 맞추어져서 우뚝 세워져 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천지(天地) 역시 이와 비슷하게 하나의 커다란 집과 같다. 천지 안에는 다양한 동ㆍ식물이 존재한다. 집의 구성물이 우연으로 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동ㆍ식물의 다양한 형상 역시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해와 달과 별의 자리와 사계절의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삶의 굴곡을 주관하고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는 이가 누구이겠는가?’며 질문한다. 만일 이를 주재하는 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반문한다.
유복자를 예를 들면서, 유복자가 자기 아버지를 뵙지 못했어도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보지 못했어도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명화(名畵)를 보면 그것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우주만물은 누가 만들었는지 한 번도 묻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존재하는 물질의 이치인 질(質)과 모양(模樣)과 작(作)과 위(爲)이라는 것으로 따져 보더라도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양심이다. 천둥과 번개라는 기상 현상을 보면 무서워하며 큰 임금님께서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한다. 또한 누구든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하느님을 찾으며 기도한다. 이것이 이른바 천성(天性)이다. 다만 어떻게 섬겨야할지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양심을 보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셋째는 성경이다. 중국의 고대 성현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천주교 역시 경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이 집 안에 가득찬다고 해서 사람들을 잘못되게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역경(易經)에서는 “하느님께 바칩니다”, 시경(詩經)에서는 “하느님께 아뢰나이다”, 서경(書經)에서는 “하느님께 제사 드립니다”,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 바칠 곳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이 과거 중국 역사 안에 전해진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시다는 입증이다. 이렇듯 성경을 보면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1.2. 천주께 나아가는 길 21~25쪽
1.2.1.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인간 본분 (“이 세 가지 … 마음까지도 다스립니다.”) 21~25쪽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덕을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마땅히 흠숭해야 한다. 하느님을 흠숭하려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된다.
계명이란 하느님께서의 계시로써 계율을 말하며 열 가지이다. 이 계명들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세 가지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길이며, 뒤의 일곱 가지 계명을 자기를 닦아 성찰하는 길이다.
또한 공자와 대기(戴記) : 예기(禮記)를 십계명과 비교하면서 십계명이 더 뛰어남을 말한다. 즉, 십계명 안에는 충성과 관용과 용서, 그리고 효도와 우애, 인애와 의리, 예의와 지혜가 모두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지키면 집안과 나라와 전 세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십계명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되며 마음으로라도 어기는 것을 금하고 있다. 십계명은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2. 칠죄종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빠뜨리고 맙니다.”) 25쪽
특히 이 부분의 마음에서 발생되는 죄의 일곱 가지 뿌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교만, 분노, 탐욕, 음란, 질투, 인색, 게으름이다.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빤또하의 칠극이 상재상서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또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七克이 종종 십계명과 같이 거론되고 있다. 이는 이미 칠극이 십계명과 더불어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인 지켜야 할 덕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3. 천주교의 영혼관 25
1.3.1. 공로와 심판 (“진실로 그때그때 … 반드시 벌하십니다.”) 25
칠죄종을 항상 경계하여야 하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면 공로가 되나 극복하지 못하면 죄에 떨어진다. 공로와 죄에 대한 판결은 죽은 후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상선벌악의 원칙이 지켜진다.
1.3.2. 영혼 불멸성과 혼의 종류 (“만약 사람이 … 명백한 사실입니다.”) 25~27쪽
영혼은 불멸한다. 혼에는 생혼, 각혼, 영혼이 있다. 그 중 영혼이 가장 고귀하다. 선대 유교학자도 삼혼, 혼백이라는 설명으로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였다.
1.3.3. 내세와 상선벌악 (“영혼이 정말 …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27~28쪽
선한 사람의 영혼은 천당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벌을 받게 된다. 이런 상과 벌을 세상 살이에서의 벼슬ㆍ녹과 감옥ㆍ사형으로 비교되지만, 그 차이는 영원성이라 성질에 있다는 것이다.
1.3.4. 세상의 행복과 천당의 행복과의 비교 (“이미 말씀 … 같겠습니까?”) 28~29쪽
세상의 행복은 어그러져 완전하지 않지만 천당의 행복은 완전하여 어그러짐이 없다.
1.4. 성교회의 특징 다섯 가지 (“비록 천당의 영원한 행복 … 있는 것입니다.”) 29~31
성교회는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며 지극히 바르고 참되며 완전하고 하나인 종교이다.
2. 천주교 호교 변증 31
2.1. 천주는 대군대부(大君大父) (“슬프도다! …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31~33
여기서는 천주교가 충과 효가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십계의 네 번째 계명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2.2. 성윤리(性倫理) (“또 말하기를 …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3~34쪽
천주교가 통화통색(通貨通色)의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 6ㆍ9 계명의 가르침을 들어 역으로 비판하고 있다.
결론 : 천주교 신앙의 자유 호소 34~37쪽
3.1 천주교는 무해정도(無害正道)의 교 (“금은 산지에 … 않는단 말입니까?”) 34~36쪽
중국의 예를 설명하면서 천주교의 교리가 옳으므로 서양의 종교라고 하여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불교에 대해 비판하며, 불교는 예사로 보면서 천주교만 박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3.2 신앙의 자유를 호소 (“가정과 국가가 …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옵나이다.”) 36~37쪽
이 부분에서는 천주교 신자들 또한 조선의 배성이므로 금령을 거두고 신앙의 자유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부록 :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 37~38쪽
정하상은 부록에서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이래 천주교 박해의 주요 근거인 제사 폐지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제사를 헛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예식이라고 비판하면서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짓더라도 성교회에 죄를 짓고 싶지 않다”며 신앙심을 드러내고 있다.
제4장 천주실의와의 비교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천주실의와 관련해서 일곱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한국천주교회사 中권 1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의 집에 한문으로 인쇄된 종이를 바른 장롱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우연히 반쯤 찢어져 나간 이 종이 몇 장을 들여다보다가 각혼이니… 생혼이니… 영혼이니… 하는 단자(單字)를 발견하였다. 이렇듯 이상한 낱말은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는 곧 장롱에 붙어 있는 종잇장을 모두 조심조심 뜯어 내어 맞추어 보니, 그것은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천주교 책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차근히 그것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몹시 분명치 않고 온전치 못하여 자기가 원하던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품고 있는 모든 難題의 해답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전보다 더 간절하여 신자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새로이 시작하였는데, … 그가 백방으로 찾아 헤매던 신자들을 만나게 허락하셨으니, 때는 계미(癸未, 1823)년이었다. … (劉進吉) 아우구스티누스는 구두(口頭)로 설명하여 주는 몇 마디 말을 듣고 신자들이 장만하여 준 책을 읽자 곧 천주교가 밝고 분명하게 그에게 나타났다. 며칠 동안 연구를 하고 나니,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의심도 남지 않았다.
이 글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누스)이 신앙에 입문하는 과정을 그린 글이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천주실의라는 책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천주실의는 그의 믿음에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천주실의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서 읽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진길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한 정하상은 당연히 천주실의를 섭렵하였을 것이고 그의 저서인 상재상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헌상 근거는 아래와 같다.
“천지 만물은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그 바뀌는 순서가 잘못되지 않습니까”(13-14쪽)는 부분은 정약종의 주요요지와 비슷하며 이에 대한 원천으로 해당되는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상권 1편의 아래 부분과 소재와 그 내용면에서 비슷하다.
하늘은 동쪽에서부터 움직이지만 해, 달, 별들은 서쪽으로부터 거구로 좇아가며, [일정한] 도수대로 각각의 법칙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각기 제자리에 안정되게 머물며, 일찍이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착오도 없습니다.
가옥을 관찰해 보면, 앞에는 문이 있어서 출입을 하고, 뒤에는 정원이 있어서 꽃과 과수를 심습니다. 가운데 공간이 있어서 손님을 접대하고, 방은 좌우에 있어서 취침에 쓰입니다.
기둥은 아래에 있어서 대들보와 석가래를 받칩니다. 어엉을 위에 깔아서 비바람을 막습니다. …
그렇다면 집이란 반드시 솜씨 좋은 목수가 지은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발행 연도 순으로 천주실의(1603)가 주요요지(1797~1799)와 상재상서(1839)에 영향을 미치고 주요요지가 상재상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5장 상재상서에 발견한 개인적인 단상들
상재상서를 읽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제일 먼저 “진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라는 표현에서는 영혼을 살찌우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신유년(辛酉年:1801)을 전후(前後)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천주교의 기원과 전통을 조사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역사에 남는 사회적 현상은 대부분 한 가지 원인으로 촉발되는 경우는 드물다.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그러한 사회적 현상이 일어났다. 신유박해 역시 단순히 한 가지 원인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상적ㆍ정치적ㆍ사회구조적ㆍ교리적인 원인으로 박해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후대의 역사가나 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하였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마도 박해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에 대한 근거는 “천주교의 기원과 전통을 조사해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에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목숨은 귀중하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는 사람을 그렇게 죽여 놓고 천주교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오늘날 사회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유년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했는지를 조정에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그런 것처럼 ‘용산 참사’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습은 다르지만 그 속성은 비슷하다는 것을, 즉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하늘이 주신 것을 성(性)이라 하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라는 문장에 관한 것이다. 이 문장은 누구에 의해 영혼이 인간 육체 안에 자리잡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 논리를 더 확대 해석하면 영혼이 어느 시점에 인간 안에 전이되는지를 이 문장 안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한편, 부록에서 볼 수 있듯이, 조정과의 갈등 요소인 제사와 신주 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에 상재상서를 통해서 박해철회라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재상서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 상재상서를 통해 정하상은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열정과 높은 경지의 교리 지식을 조정과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인 서술로 천주교를 변호하고 천주교의 교리를 정확히 알릴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교회적 차원에서는 확고한 교회관의 확립과 그 당시 교회의 교리와 신앙 수준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끝으로 상재상서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천주실의와 영언여작 내용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었다. 방대한 내용을 이 짧은 글에 담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 정하상은 간결한 문체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추려 자신의 의사를 이 짧은 글 안에 개진하고 있다. 시대가 박해상황이다 보니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작성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가 혼신을 다해 썼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 글을 읽노라면 그의 냉철하면서도 논리적인 이성과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뜨거운 열정이 본인에게 전해지는 듯하였다.
참고문: 조상제사 문제
조상제사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보려면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으로 중국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 마태오 리치가 너무나 포용적인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이후 북경에 들어온 선교단체인 도미니꼬회 선교사들과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로마 교황청에 제사 문제에 대한 진정서를 보내게 된다. 이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은 선교사들의 불만과 요청을 받아들여 1715년과 1742년에 두 번에 걸쳐 교황이 교서를 발표했는데, 특히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중국 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상숭배를 거절하자 중국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조선 가톨릭교회 역시 유교의 조상 숭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790년경에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는데 구베아 주교는, "조상숭배는 가톨릭의 교리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금해야 한다."라고 단언하였다.
천주교회의 제사 금령에 따라 전라도 진사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그리고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혼백(魂帛)이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러한 처사는 당시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 유학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전통 사상과 윤리 질서를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유가와 조정의 대응은, 비록 시각과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이를 옹호하고 진작시켰다. 그리고 천주교를 무부무군의 패륜적인 사교로 낙인찍고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1791년의 신해박해이다. 조선에서 천주교회는 100여 년간 혹독한 박해를 받아 1만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 박해의 중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이 조상 제사에 대한 금령 문제였다.
이 금령에 대해 초기에는 윤지충ㆍ권상연ㆍ유항검 등 소수만이 따랐을 뿐 대다수 신자들은 계속 조상 제사를 받들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1794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여 신앙의 절대성과 조상 제사의 허위성을 교육시키고, 천주 신앙과 조상 제사의 병행이 불가함을 명백히 하자 신자들은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제사를 폐지하거나 제사 참례를 거부한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은 유항검과 관검 형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철상(가롤로) 부자, 윤지헌(프란치스코), 황사영(알렉시오), 이중배(마르티노), 최창현(요한), 최인철(마티아) 등인데, 이들은 신분상 봉건적 신분 제도에 시달리던 계층 또는 벼슬길이 막혔거나 오르지 못한 양반 계층이었다. 또한 대부분 신해박해 후 영세ㆍ입교하였거나, 주문모 신부와 친밀히 접촉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절대성을 믿고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전통 사상과 기존 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로 전면 대체하려는 혁명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편 이승훈(베드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전, 정약용, 홍낙민, 이가환 등은 제사 금령에 대해 거부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1791년 이전에 서학을 연구하다가 입교한 관료 지식인 내지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지성적 주체 의식과 현실 개혁 의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전통 사상인 유교와의 조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를 혁신하고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전통 문화의 핵심이요,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듯이’ 하는 효도 행위인 조상 제사에 대한 천주교회의 금령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로 인식되었다.
제사 금령은 조선 교회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이 강화된 반면, 전통 문화와의 대화와 문화의 복음화를 차단하게 되었다. 천주교와 전통 문화, 특히 유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성과 논리에 입각한 대화와 논쟁보다는 생사를 건 투쟁으로 전화되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전통 문화의 파괴자 내지 비국민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더구나 양반 지식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서 중인 계층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서민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반유교적ㆍ반봉건적 성격이 강화되고 민중 종교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면 초창기 복음의 토착화 모색에서 보였던 적극성과 창의성은 점차 사라지고 선교사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 갔으며, 유럽화된 교리가 그대로 수용ㆍ신봉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변해 갔다. 또한 인륜과 현세 생활을 중시하는 유교와 결별하고 천주 신앙과 순교를 강조함으로써, 내세 천당ㆍ영혼ㆍ신앙생활을 중시하고 현세ㆍ육신ㆍ사회생활을 경시하는 이원론적 성향이 더욱 강화 되었다. 더구나 거듭되는 박해로 현세적 삶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이러한 성향은 더더욱 강화되어, 신앙의 동기와 목적을 오로지 영혼 구원과 사후 천당에 두게 되었다.
신주의 의미에 대해서도 천주교에서는 신령이 의빙한 신물로 이해하여 금지하였다. 반면 유교에서는 신령의 의빙 처로서의 기능도 인정하나, 이보다는 근원적으로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 처로서의 상징적 신상이라고 여겨 받는 것이다.
그러나 200년간 엄격히 금지되었던 조상제사 문제는 시대의 흐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입각한 탄력적인 문화 수용으로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즉 교황청에서 조상제사 문제를 허용하게 된 배경에는 신앙의 토착화 과정과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공자(孔子) 존경 의식을 허용하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혼인, 장례 등의 사회풍습에 대해서도 폭넓은 허용조치를 취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에서 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공자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시체나 죽은 이의 상, 단순한 이름이 기록된 패에 존경 의식을 행할 수 있음을 허용함으로써, 전면적인 허용은 아니지만 이러한 측면에 대해 대단한 관용을 베풀었다. 따라서 1958년 한국 주교단도 이에 따라 상례와 제례에 지침을 정하게 되었는데 고인의 시체나 무덤 혹은, 고인의 사진이나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혼령이 제물을 음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는 합문(闔門),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고복(皐復), 사자(使者)로 하여금 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고 차려놓는 밥(使者밥)등은 금하였다. 여기에 죽은 이의 입에 쌀, 조개구슬 등을 넣는 반합(飯盒)도 금하였다. 그리고 위패는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다만 이름만 써서 모시도록 하였다.
1984년 한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제례 예식을 만들었다. “제례 전에 목욕재계하고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십자가를 걸고 그 밑에 사진을 모시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정성의 표시로 꽃이나 음식을 진열할 수 있다. 고인의 신상인 신주나 지방은 사진으로 대치하고, 합문은 묵념으로 하며, 축문은 생시에 직접 말씀드리듯이 고인에게 간절한 사모와 효성의 마음을 표하는 위령문으로 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 형식에 따라 조상 제사를 지내야 하는 가정에서는 지방을 모시고 축문을 읽는 것도 허용됨이 요망된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제례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기도·성서 봉독·가장의 말씀ㆍ위령문 됨이 바람직하다고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목 회의 결론을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산하의 한국 사목 연구소에서는 <상제례 예식서 시안>을 작성하였으며, 주교 회의 전례 위원회의 신중한 검토를 거쳐 마침내 2002년 10월 한국 주교 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세 가지 안을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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