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뜨는 와인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남아공의 와인산업 와인은 포도나무가 성장한 토양과 기후 그리고 와인메이커의 열정을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와인산업은 시대를 반영한다. 정치가 잘못된 길로 가면 그만큼 국민경제에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고 와인산업도 예외일 순 없다. 350년 남짓한 와인생산의 역사를 지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이 20세기 후반, 특히 1980년대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신세계 지역의 와인산업이 현대화 과정에서 크게 뒤쳐지게 된 것은 업계 내부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산업발전의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수립된 1994년은 남아공 와인산업 현대화의 원년이라 부를 만 하다. 변화의 에너지가 충만한 와인랜드 해를 거듭하며 빠르게 변모하는 남아공 와인산업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잣대가 한 가지 있다. 현지의 대표적 와인 전문가인 존 플래터(John Platter)가 해마다 펴내는 「John Platter South African Wine Guide」라는 편람의 두께를 살펴보는 것이다. 2003년 가이드의 두께는 520쪽에 달하는데 이는 1999년 가이드보다 무려 120여 쪽이나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와이너리가 탄생하고 수많은 종류의 와인들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다름아니다. 편람의 편집자도 2003년판 서문에서 지난 번 책발간 이후 목도한 와인산업의 팽창은 ‘폭발’(explos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인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남아공에서 열린 현지 와인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면서 500병이 넘는 와인을 시음한 후 느낀 소감을 적는 글에서 와인산업 전반에 걸친 변화에 감명받았고 특히 레드 와인의 품질 향상을 언급한 바 있다.(통계자료를 보면 1990년부터 10년 사이에 레드 와인 품종의 재배비율은 15.4%에서 36.2%로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 특히 쉬라즈의 경우 90년 0.7%에서 2001년에 6.7%로 대폭 늘어났다) 그러면서 로빈슨은 남아공 와인에 대해 이제부터는 전문가 입장에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심상치 않은 세력’(a serious force)이라고 평가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남아공 레드 와인의 경쟁력은 올해 런던에서 열린 국제와인 주류경연대회(IWSC : International Wine & Spirit Competition)에서도 확인됐다. 국제 미디어와 와인업계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빈엑스포(VINEXPO) 기간 중 보르도에서 발표된 심사결과를 보면 와인경연 부문 20개 트로피 가운데 남아공이 5개를 차지하여 3개와 2개를 각각 수상한 프랑스와 호주를 압도한 것이다. 남아공은 삐노 누와, 까베르네 소비뇽, 피노타쥬(Pinotage), 시라/쉬라즈, 블랜드 레드 와인의 5개 부문에서 각각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올해 경연에는 전세계 66개국에서 4,500개의 와인이 출품됐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쉬라즈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탄 볼랜드 켈더(Boland Kelder)가 지난 2001년 대회에서도 쉬라즈 부문과 까베르네 소비뇽 부문에서 각각 최우수상을 받아 2관왕으로 ‘올해의 국제 와인메이커’(International Winemaker of the Year)로 선정된 와이너리라는 점이다. 볼랜드 켈더는 1947년에 남아공 팔(Paarl) 지역에서 출범한 비교적 오래된 와이너리로 그동안 두드라지게 유명세를 탄 와인 명가는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와인양조 만큼이나 포도재배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아 온 노력형 선수로 알려져 있다. 존 플래터 가이드는 볼랜드 켈더의 와인들이 대체로 가격 대비 질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2007년까지 와인 생산량을 3배 이상 늘릴 계획이라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중인 이 와이너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아공 와인의 상징인 피노타쥬 독특한 와인 품종으로 미국의 진판델, 호주의 쉬라즈, 아르헨티나의 말벡을 지목한다면 남아공은 삐노 누와(Pinot Noir)와 쌩소(Cinsault)의 교배종인 피노타쥬가 있다. 남아공 와인업계는 고유 품종인 피노타쥬의 품질혁신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남아공만의 경쟁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피노타쥬협회가 결성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피노타쥬만을 대상으로 한 와인경연대회도 두 가지가 있을 정도다. 남아공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와인 명가인 캐넌캅 에스테이트(Kanonkop Estate)의 와인메이커 바이어스 트러터(Beyers Truter)는 피노타쥬 고급화에 집념을 갖고 동분서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만든 1995년 빈티지 피노타쥬 와인은 미국의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로부터 91점을 받았다. 피노타쥬 고급화가 거둔 작은 결실이라 하겠다. 필자가 지난 2월 하순 남아공 와인산지 탐방 때 캐넌캅에 들러 소유주인 요한 크리게(Johann Krige)사장과 와인 시음을 하면서 트러터씨의 피노타쥬에 대한 정열을 언급하니까 그는 건물 현관 안쪽에 붙어 있는 큰 액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피노타쥬는 여인의 혀와 사자의 심장에서 추출한 체액이다. 충분한 양을 먹어두면 끊임없이 말할 수 있으며 악마와 대적할 수도있다.” (Pinotage is the juice extractedfrom women"stongues andlions hearts. After having a sufficient quantity one can talk forever and fightthe devil.) 액자 안에 쓰여 있는 글을 읽은 뒤 나는 우리의 인삼 생각이 났다. 몇 해 전부터 피노타쥬 생산자들 가운데 일부는 ‘케이프 블랜드’(Cape Blend)라는 피노타쥬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블랜드 레드 와인도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 업계 안팎에서 과연 독자적인 피노타쥬가 좋은지 아니면 케이프 블랜드가 더 효과적인지, 또한 블랜딩을 하는 경우 품종별 구성비율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케이프 블랜드 와인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케이프 블랜드 와인 콘테스트까지 열리고 있다. 와윅 에스테이트(Warwick Estate)에서 만든 ?hree Cape Ladies?2000년 빈티지는 피노타쥬에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섞은 것으로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92점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험정신과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 만들기 남아공의 와인메이커들은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매우 이색적인 와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비상한 관심과 재주를 지녔다. 예컨대, 플랙스토운(Flagstone) 와이너리는 저렴한 화이트 와인으로 ‘Noon Gun’이라는 이름의 와인을 내놓았는데 2000년 빈티지의 경우 리슬링 30%, 슈냉 블랑 30%, 소비뇽 블랑 19%, 삐노 블랑 9%, 샤르도네 9%, 세미용 3%라는 기발한 블랜딩 방식으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잰시스 로빈슨은 ‘눈 건’이 드라이하면서도 과일 풍미가 넘실대는 매력적인 와인이라며 야외 피크닉에도 훌륭하고 집에서 가볍게 먹기도 좋다는 시음 소감과 함께 와인 메이커의 독창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실험정신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이번에는 이태리 포도 품종을 부르고뉴 또는 보르도의 대표적 품종과 블랜딩하는 방식이다. 부샤드 핀레이슨(Bouchard Finlayson)에서 2002년 말에 출시한 ‘한니발’(Hannibal)이라는 와인은 산지오베세 67%, 삐노 누와 15%, 무르베드르 9%, 네비올로 6%, 바르베라 3%를 블랜딩한 레드 와인으로 18개월의 오크통 숙성을 거쳐 만든 것이다. 워커 베이(Walker Bay) 지역에 위치한 이 와이너리는 주로 삐노 누와라든가 샤르도네와 같은 부르고뉴 스타일의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지 언론에서 한니발 와인을 가리켜 ‘수퍼 버건디언 터스칸’(Super Burgundian Tuscan)이라고 부른 것도 재치가 번뜩이는 표현이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아마도 구대륙 출신의 이주민들이 아프리카 남단에 정착한 후 미지의 땅에서 고단하고도 개척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빚어낸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러한 도전정신과 함께 정확히 어떤 포도 품종이 어느 지역의 어떤 토양과 미세기후에 최적의 하모니를 이루는지 고통스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탐색하고 땀을 흘리는 노력과 연결돼야 한다는 점이다. 근자에 들어 보다 서늘한 기후지역을 찾아 나서거나 최적의 단일 포도원(site-specific single vineyards)에 비상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례가 점증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같은 신세계 지역 국가인 칠레의 몬테스(Montes)사가 ‘폴리 시라’(Folly Syrah)라는 탁월한 와인을 생산해내기까지 보여준 각고의 노력과 장인정신은 벤치마킹을 해야 할 본보기라 하겠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수퍼 프리미엄 와인들 남아공 와인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저가 또는 중저가 와인으론 세계 시장에서 일정한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국을 위시한 유럽시장의 수출 점유율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남아공 와인산업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간판급 정상의 와인들이 부족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남아공 와인업계가 국제 무대에서 자국산 와인의 이미지를 제고시킬 수 있는 수퍼 프리미엄급 와인 생산에 착수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였다. 1996년을 첫 빈티지로 삼아 세계시장에 선보인 ‘AbrahamPerold opdie berg’ 와인은 KWV International사가 야심찬 기획으로 만든 100% 쉬라즈 와인으로 출시한 시점부터 미화 100달러가 넘는 일종의 아이콘 와인(Icon Wine)이라고 볼 수 있다. 내수 판매는 하지 않고 수출용으로만 생산하고 있다. 고지대(opdie berg)의 단일 포도밭에서 재배한 수령 30년 정도의 쉬라즈로 만든 것이다. 와인의 이름은 1925년 피노타쥬 교배종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남아공 스텔렌보쉬 대학교(Stellenbosch University) 포도재배학 교수였던 아브라함 페롤드를 기리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페롤드 와인의 뒤를 이어 2000년 5월 영국 런던에서 남아공의 안톤 루퍼트(Anton Rupert) 그룹과 프랑스의 와인명가 라피트 로칠드(Lafite Rothschild)그룹이 합작을 발표하고 1998년 빈티지로 출시한 ?upert & Rothschild Baron Edmond?와인도 보르도 스타일의 고급 블랜드 와인이다. 출시 시점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남아공의 ‘오퍼스 원’(Opus One)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해서 와인업계의 주목을 받은 이 와인은 미국 시장에서 45달러 안팎에서 판매되고 있다. 2002년 말에 나온 ‘Ernie Els Limited Release Stellenbosch 2000’은 남아공 출신의 세계적 프로 골퍼인 어니 엘스와 남아공 와인 명가 루스트 엔 프리더(Rust en Vrede)의 진 엥겔브레히트(Jean Engelbrecht) 사장이 합작하여 만든 블랜드 레드 와인이다. 이 와인은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남아공 와인으론 최초로 93점을 받아 화제가 되었으며 출시 당시 미국 시장에서 60달러이던 것이 지금은 75달러로 올랐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로 어니 엘스가 좋아하는 보르도 스타일의 블랜딩을 채택하였다. 이 밖에도 와인 스펙테이터(WS) 또는 로버트 파커(RP)로부터 90점 이상을 받은 남아공 고급 와인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을 점수와 함께 일부 소개한다. ▲De Trafford Shiraz Stellenbosch 2000( WS 93 ) ▲Klein Constantia "Vin de Constance" Constantia 1997 (RP 93, WS 92 ) ▲Fairview Shiraz "Solitude" Paarl 2001 ( WS 92 ) ▲Rustenberg Peter Barlow Stellenbosch 1999 ( WS 92, RP 91) ▲Stark-Conde Cabernet Sauvignon Stellenbosch Conde 2000 (WS 92 ) ▲Mulderbosch Chardonnay Stellenbosch 2000 ( WS 92 ) ▲Mulderbosch Sauvignon Blanc Stellenbosch 2002 ( WS 92 ) ▲De Toren "Fusion V" Coastal Region 2000 ( WS 91 ) ▲Rust en Vrede Estate Wine Stellenbosch 1999 ( WS 91 ) ▲Kanonkop Paul Sauer Stellenbosch 1998 ( WS 91 ) ▲Thelema Cabernet Sauvignon Stellenbosch 2000(WS 91 ) ▲Boekenhoustskloof Syrah Franschhoek 1999 ( RP 91 ) ▲Neil Ellis Cabernet Sauvignon Jonkershoek Valley 1999 (RP 91 ) ▲Hamilton Russell Chardonnay Walker Bay 2001 ( WS 90 ) ▲Spice Route Merlot Swartland Flagship 2000 ( WS 90 ) 와인산업 현대화의 원년으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남아공 와인을 일부 와인 전문가들에 의한 계수화된 점수로만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비교의 관점에서 본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다. 남아공은 신세계 와인 생산국 가운데 가장 구대륙적인 와인의 특성과 스타일을 보여준다는데 대해 전문가들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모처럼 맞은 와인산업의 르네상스를 실기하지 않고 잘 꽃피워 낸다면 와인산지의 현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활기찬 에너지와 도전적 실험정신은 남아공 와인의 위상을 한단계 높이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글·이세용(와인 칼럼니스트) [르서울 2003년 9 · 10월 통권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