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수의 오페라 축제인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오케스트라 역시 유롭스키가 2001년부터 책임지고 있으며,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은 바실리 페트렌코(Vasily Petrenko·33)가 맡고 있습니다.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은 라트비아 출신의 안드리스 넬손스(Andris Nelsons·31),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키릴 카라비츠(Kirill Karabits·33)를 각각 내세웠습니다. 영국 오케스트라의 중요 직책 6곳을 구 소련 출신 지휘자들이 맡자 "영국의 지휘자들이 오히려 소수"라는 비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 ▲ 영국 음악계의 구 소련 출신 지휘자들. 바실리 페트렌코(왼쪽부터),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안드리스 넬손스, 발레리 게르기예프, 키릴 카라비츠./BBC 뮤직 매거진
올해 영국의 음악 전문지 ' BBC 뮤직 매거진'은 구 소련 지휘자의 강세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우선 '전통'입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무소륵스키, 보로딘 등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콥스키 등을 배출하면서 구 소련은 유럽 음악계의 중심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음악사에서 더 중요한 건 186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설립입니다.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들이 이 음악원을 거쳤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전통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이 음악원 출신의 게르기예프는 "라트비아와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 등에서 활동하는 모든 음악가는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았다"라고 기억합니다. 구 소련의 막강했던 기계 체조처럼 중앙집권적이며 일사불란한 시스템이 강력한 음악 전통을 키워낸 것입니다.
다음은 '가난'입니다. 가난은 체제 유지에는 걸림돌이지만, 음악엔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의 페트렌코는 "가난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얼마 안되는 돈을 받고 기꺼이 연주했기 때문에 지휘 전공 학생들은 매주 오케스트라와 연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승'입니다. 일리야 무신(Ilya Musin·1903~99)은 1932년부터 60여 년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재직하며 게르기예프와 유리 테미르카노프 등 숱한 명(名)지휘자들을 길러냈습니다.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이끄는 넬손스 같은 젊은 지휘자들도 무신의 제자에게 다시 지휘를 배워 음악 분석과 기술적 방법 모두에서 무신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폐쇄적이었던 구 소련에서 엄격하게 교육받았던 지휘자들이 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서구 사회에서 자유롭게 나래를 펴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