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어디에서 일방적으로 갔다쓴 것이 아니라
제가 보고 느낀 것에 일부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다소 글이 길지만 고흥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고흥군에 제안하고자 하는 내용도 있으므로 아이디어를 빌어 선수치는 것은 금합니다 ㅋㅋㅋ)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141-1 운암산 아래로
'고흥 덤벙분청 문화관이 예산 433억원을 들여 공사를 마치고 개관에 박차를 가한다 하여 둘러봤다
덤벙분청이란 그릇을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덤벙분청자기로 대표되는 것이 달항아리다
획일적이지않고 하나하나가 개성있고 자연스러움이 넘쳐나는 덤벙분청 기법은
임진왜란 때 왜국에서 조선에서 나오는 물품중 최고로 쳤던 다완의 막사발까지 이어진다
막사발은 막부들과 귀족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 하여 운대리 일대에 포진해 있던 도공들이 왜국으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다
덤벙분청 문화관이 들어서는 운대리는
금오,중대,석촌,상대,운곡 마을로 촌락을 이룬
이곳은 예로부터 질좋은 고령토가 많아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아 지금도 운대리 일대에서 땅을 파보면 사기그릇 조각들이 많이나온다
과역면에서 고흥읍 가는 방향에서 보면
고흥읍 못미쳐 좌측 운암산 아래방향이다
중대리 마을을 지나 운대저수지 왼쪽을 끼고
운곡마을 뒷편 수도암 가는 길에 나오는
녹색건물이 덤벙분청 문화관이다
상자 몇개를 붙여놓은 듯한 건물의 외형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어둠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철옹성처럼 느껴진다
유려하면서 원을 강조하는 분청사기의 물성이
건축물과는 전혀 맞지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아쉬움의 탄성이 먼저 나온다
건물외벽의 색은 녹색이라 먼거리에서 본다면
특징할만한 느낌이 없다
혹여 자연과 배치되지 않으려고 녹색으로 외양을 칠했다면 큰 오산이지싶다
분청사기박물관이면 분청사기의 물성이 깃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건축미는 찿아볼 수 없고
마치 세상과 떨어진 감옥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이었으면 싶다
요즘 이곳에 전시될 작품의 진품여부와 윤봉길의사 친필논란이 있지만 어찌됐든 바로 잡히길 바라고
덤벙분청 문화관과 함께 즐길수 있는
곳을 소개할까 한다
덤벙분청 하나만 보기위해 먼곳에서 고흥까지 내려오기란 쉽지않은 일이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은 너무 흔해 비루하게 들리지만 여전히 고흥에서는 유효하다
덤벙분청 문화관 주변위주로 설명하고자 한다
고흥은 여기저기 고인돌이라 불리는 지석묘군이 많다
석기와 토기가 발견된 동강면 유둔리 지석묘,
중산 일몰전망대 주변에 포진해 있는 과역 지석묘,
풍양 한동마을 유자공원 입구에 있는 풍양 지석묘
그리고 호남 최초로 청동기시대 완형 채문 토기와
요령식 동검이 출토된 운대리 고인돌이 덤벙분청 문화관 가는 길에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에 무덤의 역활과 제단의 역활을 병행했다고 보아지며
거석을 옮기고 세우려면 지역의 막강한 세력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아울러 고인돌이 고흥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수렵과 채집을 통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소위 사람이 살아가기좋은 조건을 갖춘 명당자리라는 뜻도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고흥을
'땅이 기름지며 날씨가 따뜻하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자! 고인돌을 봤다면 발길을 돌려 운대저수지 못미쳐 중대마을로 들어서보자
중대마을에는 아직도 흙담장이 남아 있는데
예사로 보고 지나치면 안된다
이곳에서는 남도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돌담잠이 있다 빗살형태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일정하게 기울이고 흙을 짓이겨 쌓은 담장은
'하멜표류기'라는 책으로 조선을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네델란드인 하멜이 강진 땅에 억류되어 있을 때 전해준 네델란드식 담장이다
이렇게 쌓은 담장은 기술적으로 힘을 가장
잘 버틸 수 있는 건축공학이 들어있다
시골마을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골목길을 걷는 운치도 있다
하멜은 풍랑을 만나 조선에 억류된 14년간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유럽의 문화와
기술 등을 전해주고 네델란드로 돌아갔다
나는 중대마을 담장을 보면서 이곳을 '하멜의 길'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주민들에게는 담장의 역사성을 알려주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허물지 말기를 당부하고
군은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했으면 한다
중대리에서 덤벙분청 문화관 쪽으로 올라가면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싼다'는 뜻에 운암산이
한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비가 내리지않아 가뭄으로 논밭이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지면
운암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그런데 조선말기 흥양현감으로 부임한
'김홍립'(청나라 왕의 이름에 홍이 들어 있어
김광립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이
운암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전해오는 기우제문에는
'솔바람 땅을 뒤엎으니 일천 산이 움직이고
매화비 서늘함을 나누어서 한 난간이 낡도다'라는 비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김홍집이 누구이던가?
조선말기 총리대신을 지내며 갑오개혁을 주도한
당대의 큰 제목이다
그가 흥양(고흥의 옛지명)현감으로 와서 고흥에 머물다 이후 호 공 병 예조의 참의를 두루 걸치고
영의정까지 오른 후 갑신정변의 어지러운 시국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청일전쟁으로 혼탁해진 정국을 실리적 외교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이다
학창시절 반드시 나오는 시험문제 '홍범14조'를 만들어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을 공표했다
한편에서는 개혁을 이끄는데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했다는 측면이 있어 친일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조선의 자주적인 힘을 기르기위해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를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집이 총리대신까지 올랐으나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근면검소한
삶을 살았고 이시대의 선비라고 불리는 매천 황현(광양출신으로 한일병합이 강제로 이루어진 경술국치를 통탄해하며 자결함) 선생이 지은
'매천야록'에서도 김홍집을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아니다'라고 칭송한 것으로 미루어
부국강병의 꿈을 키웠던 인물이라 평할 수 있겠다
김홍집은 러시아의 득세로 고종을 아관으로 옮기려는 아관파천 때 민중들에 의해 길거리에서 참사를 당했다
일본군은 김홍집에게 일본군 속으로 피신하라고 했지만 김홍집은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요
남의 나라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다'면서
도망쳐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결코
일본의 힘에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절개가 있었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독립신문의 서재필(보성출신)박사를 칭송하고 기리지만 서재필의 행적을 보면
구역질나는 것들이 많듯이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도 그렇고 김홍집도 그렇고
고흥에서 탄주지어(呑舟之漁)
배를 사킬 만한 큰 고기. 큰 인물)의 기개를
키웠음을 알아야한다
이와같은 인물이라면 흥양현감 재직시
송사나 업적에 관한 일들이 전해올터인데
역사적 자료가 미비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운암산의 이력을 알았다면 이번에는 운암산 중턱에 위치한 수도암을 둘러보자
수도암에는 지방기념물 156호인 무루전이 있다
명승고찰에 전설하나 없는 곳이 있으랴
수도암에도 홍총각과 임녀의 이루지못한 사랑으로 구렁이가된 전설이 깃들어져 있다
수도암에서 보는 일몰또한 가히 환상적이다
고흥 덤벙분청문화관을 들리시거든
앞서 소개한 운대리 지석묘와 수도암 그리고 운암산 내력도 함께 가슴에 품고 여행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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