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지만, 때론 비처럼 낙하하고 강물처럼 흐르는 자연적인 생각보다 분수처럼 자연을 거역하는 힘도 필요하지 않을까. 위기를 당했을 때 억지웃음이라도 필요하다 싶어 서점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유머 책 한가운데 줄친 부분도 내 역발상의 참 스승이었다."
영어가 서툴러서 - 석위수
유럽 출장에서 귀국하자 서울 사무소 홍보팀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 월요일에 우리 회사가 창조 경영 품질 부문 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사 덕분에 큰 상을 받아 본 경험이 자주 있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나 자신의 노력보다 회사 임직원 전체의 단합된 힘이 만든 상이다. 시상식에 참여하고 눈도장 찍고 주는 상 받고 악수를 하고 만찬을 대접 받는 일이니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
새벽 기차를 타고 서둘러 도착한 동아일보 사옥 시상식장 앞자리에는 수상자 십여 명이 미리 도착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식을 시작하기 전에 사회자가 “영광스러운 수상자께서는 수상 후 이삼 분 정도 짧게 소감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듣는 순간 숨이 멎었다고나 할까. 옆 사람을 힐끗 보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긴장이 되고 내 앞의 수상자 소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앞사람 발표를 참고할까 했지만 분야가 다르니 환장할 노릇이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초조할 뿐 머리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앞 차례가 끝나고 내 이름이 호명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일어섰다. 시상대에 오르는 세 개의 계단 중 마지막 계단에 오르자 순간 번개처럼 떠올랐다.
“저희 회사가 큰 상을 받게 된 것은 영어가 서툴러서입니다.” 참석자들은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영어가 서투니 소통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적게 쓰는 방법을 강구하자. 선적 납기를 준수하고 품질이 완벽하고 철저한 원가 관리와 프로젝트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자. 회사의 경영 방향과 일치시키면 해외 고객들로부터 야기되는 품질문제나 납기 불만에 대응할 영어 소통이 없어진다. 실수가 없으면 그룹 관계자들에게도 원인과 대책들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위한 영어가 없어질 것이다. 긍정적인 칭찬을 듣게 될 때 짧은 문장 ‘오 땡큐’ 간단한 한마디로 소통이 충분하도록 하자.
참석자들은 소감 발표 중간에 두 번이나 큰 박수를 쳤다. 단상 앞 축하석에 앉은 초로의 여성이 박장대소하며 유달리 큰 호응을 보였다. 엉겁결에 소감을 마치고 식사 시간에 열렬한 박수를 주던 여성을 찾아갔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Y대 영문과 교수입니다. 서두에 영어가 서툰 이유로 대상을 받았다는 말씀이 하도 의아해서 관심이 컸거든요. 하하하. 저도 가까운 친척 동생 수상을 축하해주러 온 사람입니다. 소감이 너무 인상적이라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입사 후 계속 건설기계 부문에서만 근무했지만 회사명은 여러 번 바뀌었다. 현대양행에서 D중공업으로 H중공업으로 S중공업 지금은 글로벌 회사인 V건설기계코리아다. S상용차 개발 시절에는 주로 일본과 기술제휴를 했기 때문에 일본어 공부를 많이 했다. 출장 온 일본인과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대접까지 하며 현지어를 익혔다. 그 시절 영어는 주로 연구 개발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이 전문서적을 보기 위해서 필요했다.
글로벌 회사가 되고부터는 영어 아니면 소통이 불가능하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언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던가. 창원공장 임원들 중에도 영어 스트레스에 찌들려 회사를 그만두는 사례도 많이 생겼다. 근무하고 있는 간부 직원들도 영어 능력 부족으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고민했다. ‘영어를 적게 쓰고도 쉽게 소통하는 방법을 찾자.’ 내가 내건 슬로건이다.
창조 경영 대상을 받기 약 2년 전 회장님과 그룹 경영 회의 중 휴식 시간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미스터 석, 창원 공장이 그룹 내에서 제일 좋은 사업장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비결이 뭔가요?”
“예, 영어가 서툴러서…….”
“그게 무슨 뜻인가요?”
“실수해서 서툰 영어로 변명을 하느니 회사의 경영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해서 고객에게 만족을 주면 영어를 적게 사용해도 된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변명이 필요 없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지만, 때론 비처럼 낙하하고 강물처럼 흐르는 자연적인 생각보다 분수처럼 자연을 거역하는 힘도 필요하지 않을까. 위기를 당했을 때 억지웃음이라도 필요하다 싶어 서점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유머 책 한가운데 줄친 부분도 내 역발상의 참 스승이었다.
석위수 ---------------------------------------------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볼보그룹코리아 사장 겸 아시아 사장(43년 근속), 삼성그룹 회장상(1986년) 대한민국산업포장(2006년 수훈), 대한민국 금탑산업훈장(2012년 수훈)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 수강중.
당선소감
아파트 앞마당엔 향기로운 매화가 피었다 지고 백목련이 희고 순결한 자태로 봄을 알린다. 매화 같은 향기도 없고 목련처럼 봄의 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스러운 내가 신인상을 받는단다.
한창 회사 생활에 정신을 쏟을 때 아내가 합천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아내를 따라 문학기행도 여러 번 다니면서 문학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 들었다. 지난 2월에도 공주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좋은 시간을 갖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퇴임 후 ≪명심보감≫, ≪도덕경≫, ≪시사영어≫, ≪한비자≫ 등에 심취하여 일 년을 보냈다. 공부를 하면서 가끔 후세들에게 명인들의 좋은 말씀과 내 경험을 섞은 책 한 권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2년 목표로 집필도 시작했다.
이제 다시 제2의 인생을 설계한다. 평생을 기계 옆에서 일하며 살아온 나의 무딘 감성이 작은 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했으니 걱정은 안 한다. 곁에서 격려해 주는 아내와 늘그막에 큰 기쁨을 안겨 주신 교수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졸작을 응원해 주신 수필과비평사에도 고개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