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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유익을 구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2024. 7. 19. 금. 일터소명 묵상]
(고린도전서 10:24, 31)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담은 《소요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이방 신에게 바쳤던 제물 먹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진정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래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나 불신자가 대접하는 음식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이 이방 신에게 바쳤던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것을 알게 한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방 신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이 아무 문제 없지만 그 문제로 인해 시험 드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히 포기하라고 구체적 실천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삽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귀한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만원의 수술, 만원의 행복』(이지북 펴냄, 2007)이라는 책을 낸 한성익 박사가 있습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대에 다시 입학해 성형외과를 졸업하고 의학과 치의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침샘암 환자를 수술하는 장면을 보고 감동 받아 얼굴에 장애를 가지고 숨어 사는 사람들을 찾아 수술해 주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진 독지가들이 제공하는 재료비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 의사들과 함께 안타까운 사람들을 살리는 그 귀한 일을 감당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그는 안면 성형이 정말 필요한 장애인들을 위한 헌신의 의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들에게 만 원씩을 받습니다. 공짜로 해주면 자존감이 망가지기 쉬워서 만 원을 내고 수술을 받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술받은 것이 고마워서 보답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수술 받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치과성형의사 한성익 박사의 삶을 보면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이 왜 가치 있는지,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떤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지 배우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실천하는 일에 치열한 열정을 허락해 주시고 그 일을 통해 결국 사람들을 살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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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라!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2024. 7. 18. 목. 일터소명 묵상]
(열왕기상 19:12, 15-16)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의 휴가에 담긴 세 번째 의미는 지난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입니다(Reflect). 바로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극심한 피로와 실망감에 지쳤다가 원기를 회복한 엘리야에게는 인생을 돌아보는 ‘거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일간의 도보 여행을 통해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당시 엘리야가 머물던 브엘세바 남부의 유대 광야에서 호렙산 까지는 40일을 갈 만큼 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긴 기간의 여행은 바로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한 착각과 오만과 몽상을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열정을 강조하며 자랑인지 푸념인지 하나님께 넋두리를 쏟아놓았던 엘리야는 자신을 돌아봐야 했습니다.
우리의 휴가를 통해서도 이렇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네 번째 휴가의 원칙은 새로운 창조, 재생산을 위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Recreate).
하나님께서는 착각하던 엘리야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반성하게 한 후에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특별하고 새로운 임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할 기본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언하고 왕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는, 선지자의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의미 있는 지시는 엘리야가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사역을 계승해야 했습니다. 재창조, 재생산이 엘리야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프타임의 시기에 우리 인생의 은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인생이 종말을 맞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세상의 종말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실직이나 해고, 은퇴는 바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닥칠 인생의 종말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휴가는 인생을 돌아보고 또한 앞으로 주어질 새로운 일을 조명하는 기회입니다.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엘리야를 통해 휴가의 여러 가지 의미를 살피며 우리 인생과 일에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엘리야를 깨우쳐 주신 하나님. 휴가를 통해 인생을 돌아보겠습니다. 바르게 평가하고 정리할 수 있게 하소서.
또한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창조와 재생산, 바람직한 계승도 생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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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부터 일한다면… [2024. 7. 5. 금.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20:1, 6-7)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당시에 익숙한 풍경인 포도 수확을 하는 품꾼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지중해성 기후에 속한 지역의 포도밭은 수확 시기에 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주인이 해가 뜨자마자 공터 인력시장에 가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데려와 포도 수확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일손이 딸렸습니다. 제때 수확을 못 하면 안 되기에 오전 아홉 시에 나가서 품꾼들을 더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오후 세 시에도 가니 사람들이 있어서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에도 일손이 부족해 갔더니 그 시간에도 품꾼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막바지 수확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오후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 속에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열두 시, 오후 세 시, 혹은 좀 더 지나 오후 다섯 시에 부름 받아도 좋습니다.
해 질 녘에 부름 받은 일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다섯 시에 부름 받은 일꾼은 열심히 일했겠지요. 급한 일손이 필요해 주인이 부른 걸 알고 분주하게 손을 놀렸을 겁니다.
물론 예수님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하루 중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 놓고 들어온 사람에게도 결국 일을 시켰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만 하고 그렇게 힘써서 일했을 포도원 일꾼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오후 늦게 부름 받은 일꾼들은 아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이것은 ‘그래도 감사!’입니다.
거의 하루 종일 일거리를 얻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제 한 시간이라도 일하게 해준 주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진정 감사를 느끼려면 우리는 말하는 표현을 좀 바꿔야 합니다. “때문에”가 아니고 “덕분에”라고 말입니다.
뭣 때문에 안 된다는 핑계에 앞서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덕분에’입니다.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 덕분에, 오늘 내로 수확해야만 할 잘 익은 포도 덕분에, 그들이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래도 감사’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일하게 됨을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부르심에 응답하는 감사의 사람이 되게 도와주소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그래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2024. 7. 4. 목. 일터소명 묵상]
(열왕기하 1:2-4)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북이스라엘 왕국 아합 왕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어느 날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다쳤습니다.
그러자 아하시야는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던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가서 그 병이 낫겠는지 물어보라고 시켰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이 느껴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어리석음에 대한 징벌을 예언하셨습니다.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결국 아하시야는 죽지 않아도 될 병을 가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힘을 쓰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고작 2년이었습니다(왕상 22:51).
그런데 때로 우리도 아하시야처럼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자주 범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 도저히 풀어가기 힘든 문제,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가 찾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회의도 하고 토론도 합니다. 아이디어도 내려고 끙끙대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정작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가, 그 문제를 가장 먼저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가 말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한다면서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하시야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갑시다. 하나님이 귀찮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병이 들었으면 기도하며 의사를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의술의 효과적 사용도 하나님의 치유 방법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 왕의 태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전적인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하는 일과 인생의 유일하신 주관자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소서.
다른 해결책을 구하기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손에 모든 문제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갈등을 해결하는 균형의 열쇠 [2024. 7. 3. 수. 일터소명 묵상]
(전도서 7:16-18)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일하며 살아갈 때 갈등을 겪거나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갈등의 해결을 위해 꺼낼 열쇠는 바로 균형입니다.
물론 이 균형은 완전한 평형이나 기계적인 평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보면 계속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잡습니다.
균형을 잡아나가기 위한 시행착오도 당연히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며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일터와 가정의 관계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양쪽의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기도하면서 균형의 열쇠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30장에 아굴의 기도가 나옵니다.
재정적인 부분에서 모자람이나 지나침이 없는 균형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적 시각도 필요하고 진보적 시각도 필요합니다.
나의 입장을 가질 수 있으나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토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갈등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인생을 살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의인이 멸망하고 악인이 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을 보고 전도자는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16절).
중용(中庸)의 지혜입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17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하는 균형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양자택일이 아닌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과 이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합리성도 있고 또한 비상한 신비적 요소도 있습니다.
균형 감각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균형 감각을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면서 연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지혜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깨달을 수 있기 원합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고 중용과 균형과 실용의 미덕을 잘 살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세상을 주목하는 우리를 보라! [2024. 7. 2. 화. 일터소명 묵상]
(사도행전 3:4-6)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한 지체장애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왜 자기들을 주목하라고 했을까요? 돈 한 푼 없으면서도 자기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뒷날 베드로는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자투리 시간에도 지붕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행 10:9-10).
그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새 시대를 향한 문을 여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주십니다.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선포해야겠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발견해 보세요.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또한 베드로가 말한 ‘우리’는 “장애인인 당신을 주목하는 우리”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오르는 사람들의 호의에 기대어 사는 걸인이었던 장애인을 보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보십시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렇게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들이 설득당하고 성령님의 역사로 뒤집어질 때까지 우리는 외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지체장애인을 걷고 뛰게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배워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터의 동료들과 고객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외쳐야 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까지 계속 외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능력의 주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며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성령 충만하여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이 시대의 문을 열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2024. 7. 1. 월. 일터소명 묵상]
(빌립보서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날에 사도 바울의 인생 회고와 열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죄악된 과거를 완전히 잊으라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다고 말합니다(6절).
바울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적극 가담했고 성도들을 사로잡아 당국에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한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런 아픈 과오와 죄에 대해 바울은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잊어야 할 것은 죄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열거하는 자랑거리도 잊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나온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율법에 대해 철저한 바리새인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른바 스펙을 자랑할 만했지만 그 모든 자랑거리를 다 잊었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8절).
자랑거리가 가져다주는 명예와 부와 인생의 안락함과 같은 열매를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죄와 세상의 욕망을 버려야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경주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생의 소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우리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굳게 서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확고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오늘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절).
우리가 올해의 전반전에 무엇을 이루어 놓았든지 주어지는 후반전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오늘 최선을 다하며 일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 바로 그런 우리의 열정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열정을 가지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나갈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난 6개월을 인도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또다시 저의 인생의 소명과 목표에 주목하게 하시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소서.
한 해의 남은 절반을 열정으로 일하며 살아가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실패했어도 목표를 다시 세웁시다! [2024. 6. 28. 금. 일터소명 묵상]
(역대상 15:25-28)
25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26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27 다윗과 및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28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상반기를 보내면서 올해의 목표를 절반쯤 이루었습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좀 엉뚱하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면 목표 달성 여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다시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윗 왕은 전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에 실패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목표를 세웠습니다.
다윗 왕에게 목표를 다시 세워 계속 추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심삼일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심해서 사흘 간 실천하는 것도 사실은 기특합니다.
작심삼일을 한 백이십 번만 하면 일 년이 지나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장난만은 아닙니다. 실패했다면 작심삼일을 다시 시도하되 생각하고 적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연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은 이루지 못했는지, 다시 세우는 목표가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습니다.
실패를 거울 삼아 목표를 다시 세운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천부장들을 데리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갔습니다.
언약궤를 다시 옮긴다는 목표를 세운 다윗 왕은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전에는 수레에 실어 옮겨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다윗이 그 때는 언약궤를 메어 옮기는 규정을 알지 못해 실수했는데, 이제 다윗은 율법 규정을 지켜서 일했습니다.
규정대로 세마포 겉옷을 궤를 옮기는 지도자들과 담당자들에게 입게 했고 그 자신도 베로 만든 에봇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착착 진행되어가는 언약궤 옮기는 일을 즐거운 분위기 가운데 진행해 나갈 때 이스라엘 백성의 공감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크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힘 있게 연주하면서 여호와의 언약궤 옮기는 일을 도왔습니다.
이 일에 모든 백성이 가슴 벅차게 공감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 메어 올려서 준비된 장소에 둔 후에 다윗 왕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백성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다시 세워서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상반기를 돌아보며 목표를 다시 세워 다시금 힘을 내어 추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다시 일한 사람들을 도우신 하나님, 올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목표를 돌아봅니다. 작심삼일을 반복하더라도 다시 목표를 세우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누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인가? [2024. 6. 27. 목.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24:44-47)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이제 올 한 해도 절반을 보내고 나면 ‘올해의 종말’인 연말은 급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종말’이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신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늘 종말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직업인의 종말 의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집안일을 책임진 종에게 요구하시는 덕목은 “충성”과 “지혜”입니다(45절).
매우 일반적인 이 덕목들은 특히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주인과의 관계에서 충성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은 집안의 다른 종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일종의 청지기로 집안의 살림을 책임진 집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 속한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아랫사람인 그들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본받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청지기인 이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지혜롭게 하면서 이렇게 집안의 종들에게 지혜로우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늘 변함없고 사심 없이 충성된 태도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여행을 떠난 주인처럼 우리 주님도 언제 이 땅에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막 13:32) 우리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바람직한 자세로 일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께 하듯 일하는 자세입니다(골 3:23).
그러면 종말을 준비하면서 제대로 일하면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주인이 돌아와서 칭찬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그 종에게 다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 상급을 의미합니다.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를 칭찬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소유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전체, 이 우주를 가리키지 않을까요?
“모든 소유”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한 기대만으로도 가슴 벅찹니다.
오늘도 우리가 일터에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 일할 만한 동기부여가 충분합니다. 오늘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시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늘 염두에 두면서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충성과 지혜의 미덕으로 무장하여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2024. 6. 26. 수. 일터소명 묵상]
(사도행전 22:6-10)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진 랍비 사울은 유대교의 종파들 중 보수파인 바리새파였습니다.
율법을 귀하게 여기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구약의 율법 중심 전통을 전승한 사람들입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확신에 찬 사울은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 집행에도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유대교 교리를 앞세우며 ‘행동대’로 적극 나서서 기독교인들을 집요하게 박해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가던 중 사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밝은 빛을 보고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 때 사울은 질문했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이 질문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러자 사울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과 하나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시며 저는 누구입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언 19장 21절이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우리 인생을 목적이 이끌어가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내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행 9:15)함 받았다는 인생의 목적을 위해 매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인생 목적은 무엇인가?
한 해의 하프타임을 통해 새롭게 규정해 보아야 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예수님,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할 택한 그릇으로 부름 받아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가야 하는 저의 인생을 명심하게 하소서.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능력과 믿음도 저에게 허락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2024. 6. 25. 화.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하 7:18-21)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축구 경기의 하프타임은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심심한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들과 코치들에게는 중요합니다. 전반전을 평가하고 작전을 잘 세우면 지던 경기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는 시점에 우리는 이런 하프타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인생의 하프타임을 경험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았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주의 종인 자신을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집안에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달으며 하나님이 모든 큰 일을 행하시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프타임의 시기에 한 해의 절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때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프타임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식사할 겨를도 없을 때 따로 한적한 곳으로 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막 6:31).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바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추구하기에 그렇게도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도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돌아보며 하프타임을 가져봅시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저도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프타임의 시기에 하나님 앞에 선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정신없이 바쁘게 한 해의 절반을 살아왔다고 만족하지 않고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꿈꾸던 요셉, 탁월한 성실함! [2024. 6. 24. 월.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37:13-14, 17)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성경에서 ‘성실’의 대명사를 꼽으라면 요셉이 떠오릅니다.
평생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십대 어린 시절에도 탁월한 성실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요셉의 가족은 유목을 하면서 헤브론 골짜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기가 되기까지 최대한 집과 먼 곳으로 떨어진 곳까지 가서 집으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유목을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집을 떠나 일하는 아들들의 안부와 더불어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요셉을 심부름 보냈습니다.
당시 형들이 머무르는 지역으로 추정되는 세겜까지의 거리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만 80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산지 길이 포함된 광야 길 100킬로미터를 가는 데만 적어도 5일 이상은 걸렸을 겁니다.
쉽지도 않고 위험하기도 한 심부름을 아버지가 시켰는데도 요셉은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형들에게 전해줄 음식과 자신의 여행 짐을 짊어지거나 짐승에 싣고 길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게 세겜에 도착하니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들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또 몇 시간을 헤맸습니다.
한 사람이 요셉에게 형들이 도단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도단까지의 거리도 25킬로미터, 산악 지형 30킬로미터로 하루 만에 가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도단은 집이 있는 남쪽의 헤브론과는 반대 방향에 있었습니다.
도단에 다녀오려면 60킬로미터나 길이 더 멀어지니 걱정이었지만 요셉은 결국 형들을 찾아 도단으로 가서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믿을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주장해도 믿지 않습니다. 믿어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보다도 일하는 태도, 즉 성실함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어 일하는 데 도움을 주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이 꿈꾸게 하신 요셉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일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일을 할 때 요셉처럼 신임받을 만한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셉처럼 제가 할 일을 성실하게 할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믿을만하게 행동하겠습니다.
성실함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게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고민을 주님께 아뢰라! [2024. 6. 21. 금. 일터소명 묵상]
(마가복음 10:49-52)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여리고 성에 들르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거지 바디매오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제지하고 막았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멈추어 서서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시고는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가 소리를 지른 이유를 모르실 리가 없는데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어서 질문하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루 생활비였나요, 구걸을 좀 잘하게 구걸 자리를 좀 확보해달라는 요구였나요?
바디매오는 자기 인생의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만약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돈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는 것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치유와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바디매오와 대화하시며 그의 믿음을 파악하고 결국 그가 원하던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가라.” 바디매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의 시력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인생 최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같은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능히 해결할 분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소리쳐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방법을 바디매오에게 배워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저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 저도 소리쳐 외칩니다.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고민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길에서 주님을 따랐던 바디매오처럼 제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께 배우는 관계 형성 방법 [2024. 6. 20. 목. 일터소명 묵상]
(요한복음 4:28-30)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라포르(rappor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 접촉’이라는 뜻인데 심리학과 의학에서도 사용하는 일종의 ‘신뢰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짜 약도 일부 효과가 있다는 플라시보 효과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사와 환자 간에도 이 라포르가 있어야 제대로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약 실험을 할 때 신약을 사실대로 알리고 투약한 환자들에게는 65% 정도 투약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이라고 하고는 설탕물을 대신 먹인 환자들 중에도 30%쯤 치료 효과가 있었다는 실험 결과가 이 라포르를 설명해 줍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이 라포르가 필요하고 또한 일터에서도 라포르는 중요합니다.
수가 성의 한 여인을 대하던 예수님께 라포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기피하는 땅 사마리아를 관통하며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호의를 베풀어 상대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여인에게 부탁을 하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대화는 여인의 관심사를 따라서 전개되었는데 물 길으러 오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여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깊은 신뢰의 단계로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정에서 참된 평안을 얻지 못했고 그로 인해 동네에서도 사람 대접받지 못하고 사는 불행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켰지만 여인은 오히려 자신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 신뢰감을 느낍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영적인 핵심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결국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고 복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는 적극적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릅니다(28-30절).
우리도 일터에서 동료나 고객들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처럼 라포르를 형성하는 진정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상호 신뢰감을 쌓아갈 때 관계의 목표를 달성하고 전도의 문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일하고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잘 형성하기 위해 예수님께 배우겠습니다.
예수님처럼 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여 바람직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그래서 복음의 귀한 열매도 맺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치열하게 찾는 하나님의 뜻 [2024. 6. 19. 일터소명 묵상]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바울은 성도의 삶에 적용해야 할 교훈을 12장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1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되심, 즉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가 거룩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악한 관행들을 본받지 말고 새롭고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악하고 또한 치열한 세상 속에서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 쑤저우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쑤저우에 있는 우리나라의 한 전자회사에서 자재구매를 담당하던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공장에서 노트북컴퓨터를 생산하는데 다양한 색상의 컬러 케이스를 적용하여 젊은이의 취향을 반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매 담당인 A 부장이 시장 조사를 했더니 대만 타이중에 있는 공장의 컬러 노트북 케이스가 가장 품질이 좋았습니다.
구매를 의뢰했는데 대만의 그 회사는 사장의 지시로 S전자 회사에는 자재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거래하면서 억울한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 부장은 다른 대안도 없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대만 회사 직원에게 직접 사장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드디어 그 회사를 찾아가 사장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이 A 부장을 만나자마자 어느 회사에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회사의 직원들이 거래를 원하는 상대 회사를 밝히지 않고 만남을 주선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A 부장은 S전자에서 왔다고 회사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장은 직원들에게 절대 물건을 주지 말라며 화를 내면서 나가버렸습니다.
황당한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대만 회사의 직원 한 사람이 담뱃갑을 던져주며 담배를 피우라고 했습니다. A 부장은 담뱃갑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를 위해서 많이 애써 주셔서 감사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리얼 크리스천’(real christian)입니다. 리얼 크리스천은 세 가지를 하지 않습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성적인 범죄에 빠지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우리 회사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회사 건물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 회사의 한 직원이 달려와서 A 부장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리얼 크리스천이라고 우리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사장님이 당신과 비슷한 리얼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보자고 하십니다.”
마음에 응어리가 있었지만 물품 구매를 요청하는 담당자가 자기 신앙을 용기 있게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회사의 사장은 앙금을 털어냈습니다.
결국 S전자는 젊은이들 취향에 맞는 다양한 색상의 품질 좋은 케이스로 노트북컴퓨터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노력하면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도 길을 열어주십니다.
편하게 그저 관행대로 적당히 비리도 허용하면서 일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 받은 새로운 마음으로 결단하며 일하려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진실하신 하나님, 설령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말씀을 따라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해 주소서.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이끌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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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히 때를 기다리는 팔로워십 [2024. 6. 18. 화. 일터소명 묵상]
(베드로전서 5:5-6)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윗사람의 리더십에 이어 아랫사람의 팔로워십을 말하는 베드로는 젊은 사람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권합니다.
윗사람의 권위는 하나님의 대리 역할을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우리가 일터의 상하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 6:5).
순종은 내 주장을 다 한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합리성도 다른 사람에게는 불합리할 수도 있습니다.
윗사람에게는 보통 안목이 있습니다. 장기적인 포석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하나님이 세우신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런 순종은 특히 베드로가 권면하는 공동체에 곧 임할 박해와 고난의 때에 더욱 그 빛을 발할 것입니다.
힘을 합해 박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따르는 일은 중요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리더를 중심으로 힘을 합하는 팔로워십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젊은 사람들은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겸손하게 허리를 묶으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묶는다는 말의 뜻은 일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유대인들은 일을 할 때는 허리를 묶어서 치렁치렁한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겸손이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랫사람들에게 때를 기다리라고 교훈합니다. 아랫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실수는 아마 성급함일 듯합니다.
성급하기에 교만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향해 잠언에서 가장 자주 강조하는 교훈이 교만에 대한 경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의 교만은 나도 리더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때가 되면”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때”를 착각해서 자기주장을 하며 호들갑을 떠는 태도가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자들 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장로들이 있습니다.
우리 일터에는 아직 윗사람이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때’는 궁극적으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영광을 뜻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르게 될 지위도 의미합니다.
아랫사람도 그렇게 윗사람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틀림없이 옵니다.
이렇게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겸손하게 때를 기다리는 아랫사람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윗사람에 대해 답답해하느라 아랫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역할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 리더십과 팔로워십을 발휘하면서 일터에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잘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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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따라 본이 되는 리더십 [2024. 6. 17. 월. 일터소명 묵상]
(베드로전서 5:1-4)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일터에서 우리는 대부분 윗사람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랫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상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베드로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리더인 장로들과 젊은이들 간에 마찰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는 두 계층의 사람들에게 교훈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자신과 같은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일, 즉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윗사람의 자격과 자세입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타성에 젖어 판단하기 쉽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은 잘 몰라도 주변 사람들, 특히 아랫사람들은 잘 압니다.
보통 윗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기존의 체제 유지를 선호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큰 박해가 닥칠 것을 예상하며 자신의 서신을 썼습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장로들이 되라고 합니다.
또한 윗사람에게 권하기를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말고 기꺼이 즐겁게 일하라고 합니다. 돈과 관련해서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일터에서 매출과 관련해 윗사람이 강요와 압박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지요. 사심이나 이중적인 의도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바람직하게 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지적합니다.
바람직한 윗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로만 강요하지 말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라고 베드로는 삶의 모범을 강조합니다.
특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따르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느 시대에나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결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을 제자들에게 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요 15:13-14).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윗사람의 자세입니다.
베드로의 권면대로 사명감으로 즐겁게 일하고 더러운 이익을 취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면서 본을 보이는 윗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을 얻는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윗사람의 모범을 보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늘 명심하면서 노력하겠습니다.
아랫사람을 섬기며 돌보고 본을 보일 수 있는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팔려 죽었으나 팔아서 살린 사람 [2024. 6. 14.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37:28, 47:14-16)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47:14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47:15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47:16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사고파는 거래 활동 없이 살아가기는 힘든데, 간혹 못 팔 것을 파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파는 인신매매가 지금도 있고 노예제도와 같은 인간 사회의 몹쓸 관습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거래하는 일은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팔린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힘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뻔했으나 유다의 제안으로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혔습니다. 요셉을 아는 사람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심한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세상을 살릴 준비를 했습니다.
노예로 팔려서 애굽에 왔지만 요셉은 자신이 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요셉은 자신이 팔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풍년의 때에 곡식을 창고에 잘 저장했습니다.
그래서 굶주려 죽어가는 애굽과 이웃나라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요셉이 살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죽이려다 애굽에 팔았던 형들을 포함한 고향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팔려서 죽었으나 팔아서 살린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요셉처럼 유다에게 팔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임당하셨습니다.
팔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준비한 ‘복음’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복음으로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요셉은 기근 때에 곡식을 저장해 세상을 살렸는데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것을 믿으면 우리도 삽니다.
예수님이 팔아서 세상을 살리려는 그 복음을 믿으면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생애를 파는 것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도 인생에서 팔아야 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비즈니스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복음도 준비하여 우리 일터 동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팔리는 아픔을 겪었으나 잘 준비한 곡식을 팔아 세상을 살린 요셉처럼 지식의 알곡을 잘 저장해 세상에 팔 수 있게 도와주소서.
팔려 죽임당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살려주셨으니 저도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두기고가 보여준 세 가지 미덕 목요일
(골로새서 4:7-8)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일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사람들은 대화 중에 다른 사람을 평가하곤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을 때 보낸 한 편지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두기고인데, 이 사람에게서 멋진 직업인의 특징 세 가지를 찾아 보겠습니다.
두기고인 이 사람의 이름을 삼행시처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두기고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받는 형제”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서로 좀 친해져야 합니다.
실수를 좀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생각할 때 좀 이해를 해줄 수 있고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나쁜 기억이 아니라 생각하면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처럼 우리도 좋은 기억이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쁘게 일하는 사람입니다. 두기고를 평가하는 바울은 “신실한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신실하다는 평가는 믿을만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충성의 바른 방향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 목적이 다른 곳에 있어서 딴 주머니를 차는 사람은 신실한 일꾼이 아닙니다.
신실한 일꾼은 노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하면서 자신만 기쁜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즐겁게 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바로 일을 통해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면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Money), 일을 하면 보람을 얻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합니다(Meaning).
또한 일을 통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사명을 감당합니다(Mission).
우리도 일하면서 자신만 기쁜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즐겁게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까?
셋째는 ‘고’민거리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두기고에 대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함께 된 종이라고 말합니다.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동역자란 특히 일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고 고민거리를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두기고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골로새교회에 믿고 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처한 사정을 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저도 두기고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 기쁘게 일하는 사람, 고민도 나눌 수 있는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함께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린도후서 7:9-10)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 멜 깁슨 감독)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처절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또한 영화 속에서 ‘근심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성으로 인해 근심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 처형되는 과정에서 순간순간 등장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합니다.
비단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시각이 아니라도 고통받으시는 주님을 보는 누구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런 인지상정에 근거한 근심을 합니다. 가족을 향해, 동료를 향해 연민과 사랑을 근심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심하는 총독 빌라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근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결국 묵살했습니다.
한번 더 민란이나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면 황제의 신임을 잃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위기를 빌라도는 근심합니다.
빌라도의 고민은 오늘 자신의 직업적인 입지와 성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 힘든 직업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결정했고 그의 근심은 세상 근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출세와 부를 위해 근심하는 가룟 유다를 볼 수 있습니다.
목격자인 제자 요한에 따르면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면서 공금을 빼돌렸습니다.
예수님을 유대교 당국자들에게 넘겨주며 유다는 돈주머니를 건네받습니다. 떨어진 은화를 쓸어 담는 유다의 손과 눈에는 탐욕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그의 근심 역시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 아닌 대표적인 세상의 근심이었습니다.
영화는 예수님을 따르다 실수하여 근심하는 베드로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근심은 오늘 많은 크리스천들의 자화상을 반영합니다.
베드로는 체포되어 심문받는 죄수 예수님의 제자임을 거부하고 결국 배반했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가겠다고 장담했건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근심하며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안타깝게 걱정하시는 눈빛, 바로 그 사랑의 눈빛을 보고 크게 울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호언장담하며 예수님의 제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넘어지고 좌절할 때 우리는 근심하며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영화는 온 세상의 근심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큰 근심과 고통을 전망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의 모든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벌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세상 모든 사람의 근심과 허물과 죄를 홀로 지고 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와 유다의 근심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의 끝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에 이르게 하고 결국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해줍니다.
이런 근심만이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을 하고 세상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일터의 동료들이 하는 세상적 근심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 하도록 도와주소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세상 사람들의 근심에 휘둘리지 않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죄가 유혹하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창세기 39:8-12)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살림을 다 맡아 관리해야 했던 요셉은 일의 성과에 대한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나이도 젊고 이방인인 요셉이 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책임자가 되었으니 시기와 견제도 만만찮았겠지요.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요셉은 훌륭하게 직장 생활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집요하게 성적 유혹을 했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와 함께 있지도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느 날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 때 위기를 겪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유혹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의도한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습니다.
그러나 끌려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요셉의 옷을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요셉은 이때 자기의 옷을 벗어 팽개치고 도망갔습니다.
옷을 버리고 도망가서 증거물을 여인의 손에 남겨두면 어떻게 될 것인지 요셉이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아내를 범하려던 강간미수범으로 몰려서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옷을 팽개칠지언정 양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영적, 육체적 순결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교부가 말했습니다. “죄가 유혹하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특히 성적 유혹은 더욱, 도망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들어 잘 알고 있는 요셉의 행동은 그리 쉬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자기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인, 애굽에서 유일한 사람이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호강시키고 출세시켜 줄 만한 권력자의 아내가 은근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혹의 상황에서 요셉이 먼저 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눈을 보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사람은 못 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반드시 보고 계심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오늘날에는 CCTV가 지키고 있습니까? 카메라보다 준엄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갑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터에서 겪는 유혹이 심각합니다. 수많은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게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죄짓는 현장을 피하고 적극적으로 도망하겠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도 주님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지금 잠자는 당신! 제정신인가? [2024. 6. 10. 월. 일터소명 묵상]
(요나 1:4-6)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구약 성경 요나 서의 이야기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 요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요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국운이 융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강대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으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을 예언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해서 도망갔습니다.
지중해의 관문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흥청거리는 도시 다시스(지금의 스페인) 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셔서 요나가 탄 배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가 거의 파선될 지경인데도 넉살 좋게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요나를 발견한 배의 선장이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이 질문은 ‘지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잠을 잘 수 있는가? 정신이 있는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선장은 요나를 향해 그가 믿는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그 기도에 힘을 보태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풍랑 몰아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세상 잡신들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창조와 우주의 운행에 대해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귀신 나부랭이들과 하나님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잡신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 바다에서 울부짖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요나처럼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잠자고 있으면 하나님이 이런 수모를 당하십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일터에서 일하는 우리가 어떻게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지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요나 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으로 향하고 있음도 잘 보여줍니다.
요나 서는 오늘 니느웨와 같은 일터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저를 일터로 보내신 하나님, 일터에서 제가 ‘요나’입니다. 저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요나처럼 잠들지 않고 저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투철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말씀을 통한 영적 회복 [2024. 6. 7. 금. 일터소명 묵상]
(느헤미야 8:1-3, 9, 12)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바벨론에 망한 후 포로되어 갔다가 70년 포로기를 마치고 해방된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포로 생활을 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지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료한 후 유다 백성은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두 모여서 선 채로 대여섯 시간이나 하나님의 율법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일 때문에 말씀 생활을 게을리하는 상황이 자주 생깁니다.
일은 꼭 해야 하기에 하면서 말씀 생활은 뒤로 미루고 잊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에스라가 백성 앞에서 율법 말씀을 읽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때 백성은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흘렸습니다(8-9절).
틀림없이 말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과 후회, 회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달으면 삶의 회복이 있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성일(聖日)이었기에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잔치하며 기뻐하자고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백성이 즐거워하게 된 이유는 말씀을 밝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면 삶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유다 백성은 율법 말씀을 읽으면서 마침 그 무렵인 7월에 지켜야 하는 초막절에 대한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초막절 절기를 대대적으로 지켰습니다(13-18절). 예루살렘 성 전역에 무수한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야영했습니다.
초막절을 포함해 유월절과 오순절에 매년 세 번씩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출 23:17) 그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니 잘못을 뉘우치고 말씀대로 실천한 점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꾸준히 듣고 묵상하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말씀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우리도 결심합시다. 그때 진정한 영적 회복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늘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 일터의 삶이 그리 수월하지 않지만 말씀 생활을 제대로 잘할 수 있게 힘을 주시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또한 깨달은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행동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자기십자가를 지고가 아니고/ 교회 개쳑 표어
거창고등학교는, 경남 거창에 위치한 미션스쿨입니다.
고(故) 전성은 거창고 교장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위해 쓴 글
고(故) 전성은 교장은 유명 대학교의 부학장 자리를 마다하고,
다 쓰러져가던 시골학교인 거창고등학교로 부임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군사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정권에 미운 털이 박혀,
폐교에 버금가는 제재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끝까지 학교를 지켜낸 훌륭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10계명
화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2024. 6. 5. 수. 일터소명 묵상]
(고린도후서 2:5-11)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혼자 살지 않고 사회생활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일하다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바울은 화나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잘못한 사람이 결국은 많은 사람에게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6절).
대중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당해 복수를 하고 싶을 때 복수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잘못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벌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수하지 말고 용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결국 그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며 오히려 사랑을 나타내라고 합니다(7-8절). 사랑이 용서를 낳습니다.
복수는 결코 용서를 잉태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끝없는 복수혈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이런 사랑을 실천해야 결국 세상이 변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믿지 않는 우리 동료들은 할 수 없는 우리만의 특권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용서에 대해 차원 높은 도전을 합니다.
바울은 한 사람을 용서하면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9-10절).
용서는 단순히 그 사람과 나만의 관계가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이유로 복수하려는 태도는 결국 사탄에게 속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1절).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눈 한 번 질끈 감으면서 복수하고픈 마음을 억누르고 마음을 다잡으면 인간관계의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문제해결 방법이 열립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제가 잘못했을 때는 용서 받기 원하면서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말씀을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면서 구원하고 은혜 주신 사랑을 저도 배워 화나게 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인 당신! [2024. 6. 4. 화. 일터소명 묵상]
(열왕기상 18:1-4)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오바댜는 엘리야나 아합 왕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무대에서 멋진 조연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오바댜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오바댜가 없었다면 엘리야를 통한 갈멜산의 놀라운 이적과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악명 높은 왕 아합의 왕궁 맡은 자였습니다. 궁궐의 살림을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측근 신하로 모든 살림을 책임진 사람인데 그를 소개할 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악한 아합 왕의 측근 신하가 되어 그의 오른팔 노릇을 한단 말입니까?
열왕기서 기자는 악한 시대에 오바댜가 여호와를 경외했던 증거를 기록해줍니다.
이세벨 왕비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일 때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구해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먹여 살렸습니다.
이스라엘 판 쉰들러 리스트를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우상숭배가 극에 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던 시절에 이런 일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기근의 때에 자신의 입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오바댜가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바댜가 그 중요한 일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또한 오바댜는 원수같이 지내면서 서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 아합 왕과 엘리야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합 왕의 측근 신하인 오바댜였기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른바 평신도였던 오바댜에게 있어서는 그의 직업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만 하나님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직업을 가진 오바댜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바댜의 직업은 그의 사역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바댜의 지위와 직업적 위치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일터에서 바로 이런 오바댜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엘리야와 오바댜의 하나님, 엘리야의 역할이 있고 오바댜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두 사역자들이 함께 힘을 합해 이루어 감을 기억하겠습니다.
오늘 21세기의 오바댜로서 일터에서 저의 일을 잘 감당하게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보다 중요한 당신의 존재와 가치! [ 2024. 6. 3. 월.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16:26; 전도서 1:2)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이들에게 “넌 이담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라고 물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직업에 대해서 말합니다.
질문한 사람의 의도도 그렇고 우리 사회는 직업이 그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직업인들이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를 알아갑니다.
이렇게 직업이 중요한 이유를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창조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세상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창 1:28).
이 명령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창조된 목적이기에 우리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일터에도 임하셨음을 선포하고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어도 자기 자신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일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중독은 왜곡된 직업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 왕은 인생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이지만 죽음 앞에서 자기의 가치, 즉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것이 다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전 1:2).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야 일도 의미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실 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어서 우리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셨고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내셨기에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일을 통해 사명을 다해야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인생의 분명한 의미를 발견해야 함을 명심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하시는 하나님, 제가 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관심 가지고 계신 저 자신의 존재임을 꼭 기억하게 하소서.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먼저 인식하고 하는 저의 일을 통해 영광 받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인생의 성전을 세울 네 가지 자원 [ 2024. 5. 31. 일터소명 묵상]
(역대상 22:14-15, 18-19)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8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느냐 사면으로 너희에게 평온함을 주지 아니하셨느냐 이 땅 주민을 내 손에 넘기사 이 땅으로 여호와와 그의 백성 앞에 복종하게 하셨나니
19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하였더라
구약 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이며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면서 성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성전을 위해 준비할 자원을 확인하면 우리 인생에서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 왕은 ‘재물’을 언급합니다(14절). 환난 중에 다윗은 금, 은, 놋, 철, 목재, 돌 등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다윗 왕이 숱하게 치른 전쟁의 전리품을 통해 이런 막대한 재물을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를 준비했다고 하면서 다윗 왕은 솔로몬에게 더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양이라는 의미의 과장법이 사용되었더라도 다윗이 성전을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많이 준비했음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둘째는 ‘능력과 전문성’입니다(15-16절). 우리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해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돌을 다루면 돌을, 나무를 다루면 나무를 잘 다룰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는 일이 우리의 소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셋째는 ‘사람’입니다(17절).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대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역자들을 많이 세워 함께 해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성전을 세우는 자원은 바로 ‘믿음’입니다(19절).
다윗이 솔로몬과 모든 신하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가진 돈과 능력과 사람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박수 쳐 주시는 성공을 위해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모아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재물과 능력과 사람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 인생의 성전을 만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에게 짓게 하신 인생의 성전을 저도 지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자원들로 멋진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인생을 살게 도와주소서.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인생을 살도록 주님이 도와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분노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024. 5. 30. 일터소명 묵상]
(잠 15:18; 엡 4:26-27)
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몰아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잘못임을 아는데 우리는 거의 언제나 화를 내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도 분노에 대한 교훈이 자주 나옵니다. 말씀을 지키는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 같지만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화를 냈다면 그때마다 그것은 잘못이니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반복하면서 돌이키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사실 감정적인 사람, 화를 참을 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일하는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일터의 동료들에게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내는 인격의 성숙 척도이기도 하지만 우리 일터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화를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노력하면서 화를 절제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의 교훈대로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가 나도 노하기를 더디 하고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벌어질 만한 시비도 그치게 하고 화평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화를 참다 보면 용서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가르쳐 주는 대로 화를 내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의분이나 공분이 있듯이 화를 내는 그 자체는 필요한 정서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분명히 반응을 표현해야 할 때 화를 내지 않으면 관심 없고 체념하고 포기했나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면서 폭언이나 폭력이 따라오고 지속적으로 화를 낸다면 죄의 길로 빠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하루의 끝인 해가 지기 전까지는 분노 문제를 해결하라고 바울이 권면합니다.
우리 식으로는 잠들기 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그 문제를 내어놓으면 주님이 우리가 잠든 사이에 많은 부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분노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화가 난다고 다 표현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꾹꾹 눌러놓기도 힘듭니다.
용서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기억하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바울의 기도 모델, 다니엘 [2024. 5. 29. 수. 일터소명 묵상]
(빌 4:6-7; 단 6:10-11)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때 ‘기도’보다 ‘염려’를 더 많이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 부분을 적을 때 머릿속에 떠올렸던 인물이 다니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겨냥해 동료들이 조치한 기도의 금령이 내린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 6:10).
또한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단 6:10하-11).
다니엘 6장 10-11절과 빌립보서 4장 6-7절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다니엘은 자신의 앞에 닥친 위기를 파악하고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와 간구를 했을 것입니다.
바울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하고, 다니엘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니엘도 정해 놓은 시간에 하루 세 번 기도했고 바울도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니엘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하나님의 평강(빌 4:7)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 빌립보서 4장 6-7절은 다니엘 6장 10-11절의 주석과도 같아 보입니다.
두 부분에 “기도, 간구, 감사”와 같은 동일한 단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명백합니다.
우리도 문제가 있을 때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바울이 ‘기도’와 비교하는 ‘염려’도 종교적 반응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염려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 크리스천의 특권입니다.
바울과 다니엘이 경험했던 이런 귀한 특권을 우리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터에, 제 인생 앞에 두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염려하며 두려워 떨지 말게 하소서.
다니엘처럼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염려 대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고민되면 생각나는 그 사람! [2024. 5. 28. 화.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41:8-9, 12-13)
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2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애굽의 왕 바로가 뭔가 심상찮은 꿈을 꾸었을 때 평소에 해몽을 잘하던 어떤 점술가와 현인들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바로와 모든 신하들이 고민했습니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에게 퍼뜩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고민될 때 생각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바로 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말해주어 석방을 도와주겠다고 한 술 맡은 관원장을 원망했을 겁니다.
만 2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배신감을 치를 떨었을 테지요.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기간에 요셉은 이 세상의 번민을 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요셉 자신이 참 고민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서른 살이었지만 노예로 팔려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고 직장상사의 아내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힌 신세였습니다.
결혼은 물론 못했고 직업도 없는 딱한 젊은이였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요셉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세상의 고민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는 애굽의 왕 바로의 번민에 집중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자 자신의 고민이 다 풀렸습니다.
요셉은 당시 세계 최대 최강 제국인 애굽의 총리가 되어 직업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또한 바로 왕의 주선으로 아스낫이라는 여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세상의 고민을 풀어내니 자기 인생의 고민도 해결된 일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아마도 틀림없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요셉을 머릿속에 떠올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민되면 생각나는 사람 요셉은 자신의 고민보다 세상을 다스리는 치리자 바로 왕의 고민에 집중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을 주님께 하듯이 잘 감당하면 우리도 세상의 고민을 해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요셉의 하나님, 저도 세상의 고민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보게 하시고
오늘도 저의 일을 통해 지식과 능력을 쌓아가며 세상의 번민을 해결할 능력을 키우게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통제할 수 있는 일로 영향을 미치라! [2024. 5. 27. 월. 일터소명 묵상]
(빌립보서 1:12-17)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투옥된 상황만 생각했더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어차피 만나는 사람들에게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 상황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바울은 감옥 밖에서 자신을 자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했습니다.
바울의 투옥 소식을 듣고 전도하던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다수의 전도자들은 바울이 투옥되었으니 자신들이라도 더욱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가졌던 사람들도 복음 전파를 열심히 한다는 점을 바울이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욱 전도를 많이 하면 감옥에 있는 바울이 시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시기하고 분쟁을 조장하는 마음으로 전도했으니 바람직한 태도로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현상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옹호하던 사람이나 반대하던 사람이 다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복음 전파를 열심히 했으니 결국 잘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사실은 감옥 안에서 그들에게 설교를 할 수도 없었고 야단을 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경쟁하는 마음으로도 복음을 열심히 전한 사람들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도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습니다.
시기심을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해 기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바울의 경쟁자들은 꽤 허탈해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최선을 다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도적인 삶의 비결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발견하게 하소서.
그리고 체념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 당신은? [2024. 5. 24. 금.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상 28:5-7)
5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이 죽자 신접한 자들을 쫓아내는 신앙적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 무렵 블레셋 군대가 또 침입하자 사울 왕은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기나 했을까 의심이 듭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죽은 후 죽음의 이유를 역대기 기자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말렉 전쟁에서 불순종한 이후에는 선지자 사무엘과 교제하지도 못했습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려 하고 85명의 무고한 제사장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울이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궁여지책으로 자신이 해야 할 전쟁에 대해 알기 위해 신접한 여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사울의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맞붙어야 할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 미리 알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사울 왕을 향해 하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무엘의 영은 아말렉 전쟁 때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블레셋과 전쟁하여 패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의 영이 한 말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지 의심할 수 있지만 이 예언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전에 거짓 선지자 발람의 예언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일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데 사울은 바로 그 중요한 점을 놓쳤습니다.
사울 왕은 이 때 그렇게도 알고 싶었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런 실수는 오늘 우리도 반복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미리 아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이 이미 주신 원칙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시간 지나 보면 아는 것이지 왜 그렇게 미래를 미리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더욱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말씀으로 뜻을 알려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는 원칙을 잘 깨닫기 원합니다.
미래를 미리 알려는 노력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 [2024. 5. 22. 수.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하 16:10-12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을 하면 좋습니다.
특히 나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야단치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물론 비난이나 욕설을 들을 때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사람들의 비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비난하는 사람이 직접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난 당하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 왕자의 반역으로 몽진을 떠날 때 사울 왕 집안의 사람 시므이가 다윗 왕을 향해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다윗도 당연히 그 무례하고 모욕적인 말을 듣기 싫었겠지만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측근이 시므이를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했으나 다윗은 아들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왕위를 빼앗긴 사울 집안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비난조차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면 상황을 바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적 성장에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내게 들리는 비난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 위해서는 화를 참고 절제하며 마음속에 온유함과 사랑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가 기도하며 조금씩 실천하고 연습하면 결코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요즘 사람들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까? 비난받거나 모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때로는 그 말이 근거도 없는 모략일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납니다만 그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을 찾는다면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나 남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직장에서도 이런 비난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나빠져서 맞대응하고 복수만 시도한다면 결국 자신만 손해를 봅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상의 환경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 저를 향한 비난과 욕설을 들을 때면 화가 납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선 저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 [2024. 5. 21. 화. 일터소명 묵상]
(에베소서 5:31-33)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사도 바울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첫 인류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주례사를 인용해서 말합니다.
부모를 떠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합하여 한 육체가 된다는 말씀이 부부 관계의 비밀을 잘 보여줍니다.
합하여 한 육체가 된 부부 사이는 나뉘지 않습니다. 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은 종이나 나무판을 아교와 같은 강한 접착제로 붙인다는 뜻입니다.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인위적으로 나눈다면 떼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된 것을 찢어서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결혼했던 부부가 나뉘면, 그래서 아픔이 큽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으면 이혼증서를 써서 친정으로 보내라는 구절을(신 24:1) 악용하여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부부의 정조에 관한 문제인데 “수치 되는 일”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서 여러 번 이혼을 해도 율법을 어긴 일이 없다는 가증스러운 자부심을 가진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수치되는 일"에는 이웃 여인과 싸워서 남편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 생김새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심지어 음식을 태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본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마 19:5, the two will become one flesh, NIV)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직한 가정은 결혼식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 만들어져 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부부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함을 미래 시제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기를 기대하는데 사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결혼생활에 행복이 늘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가정을 함께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성신학자 게리 토마스의 『결혼, 영성에 눈뜨다』(좋은씨앗 펴냄, 2018)라는 책에서는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세상의 광고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가정의 거룩함이라고 가르칩니다.
거룩하게 살려면 수도사들처럼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 같지만 결혼한 사람들이 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새벽에 아기 우는 소리에 깨서 돌봐주는 것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혼자 사는 것이 힘들 것 같지만 부부가 갈등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결혼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더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끔 다 떨쳐 버리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결혼생활을 합니까? 결혼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에서는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갈등을 많이 겪는 사이가 바로 부부일 것입니다. 가까우니 그렇습니다. 그런 갈등을 조정하고 겪어나가는 일이 거룩한 가정을 일구는 과정의 축복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부가 되었어도 부부가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함을 기억하고 행복은 결혼의 목적이 아니라 결혼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혜임을 깨닫게 도와주소서.
부부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가정을 함께 만들어 가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만약 예수님이 질문하신다면… [2024. 5. 20. 월.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15:34-38)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시간이 흘러 사흘이나 지났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했고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겪는 결핍과 부족함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사탄은 먹을거리를 가장 먼저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중요하고 급박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실까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광야에서 무리를 먹일 만큼 음식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판단이었지만 예수님의 긍정적 의지와 비교하면 문제는 있습니다.
우리의 일터에도 문제는 늘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모르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현재의 상황을 물으신 겁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시락을 조사해서 그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습니다. 확보한 음식이 너무나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물으실 때 사실 그대로 대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과장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한 사람 식사나 될지 모를 도시락이 수천 명의 무리에게는 너무나 미미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습니다.” 사실을 정확하게 예수님께 보고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시는 대로 대답하면 됩니다. 내가 판단할 때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사실대로만 대답하면 됩니다. 이것은 순종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문제는 풀립니다.
예수님은 그 떡과 생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지요.
이렇게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일하는 사람의 기도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부족함만 바라보며 위축되었던 연약한 믿음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문제를 보고 고민하지 말고 문제보다 훨씬 크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은혜를 얻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사역하는 왕 같은 제사장 [2024. 5. 17. 금. 일터소명 묵상]
(베드로전서 2:9)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에서 ‘성직자’나 ‘평신도’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지만 성경적 표현은 아닙니다.
다 같이 우리는 ‘성도’입니다.
리치 마샬이 『왕의 사역』(서로사랑 펴냄)에서 이 용어들 대신 ‘제사장’과 ‘왕’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합니다.
평신도든 목회자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애를 다 바치도록 동일하게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성도가 다 ‘전임사역자’라는 주장입니다.
다만 영역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일터와 가정과 세상에서 왕과 제사장입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그 역할을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보했습니다.
제사 의식과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했던 기도는 제사장 역할을 이스라엘에서 세상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역할이라고 베드로가 알려줍니다.
긍휼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일터의 동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따라 세상을 위임 통치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에서 섬기는 역할입니다.
리치 마샬 목사가 아르헨티나의 라 플라타에서 일하는 한 택시 기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를 왕으로 임명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택시가 당신의 사역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택시를 통해서 당신을 사용하시고자 합니다.”
4개월 뒤에 다시 만난 그 택시 기사는 자신이 사역자라고 생각하며 일했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제사장과 왕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보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소개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왕과 제사장의 사역을 보고하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하나님. 제가 하는 일이 바로 저의 사역임을 꼭 기억하게 도와주소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사역과 일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왕의 사역을 잘 감당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2024. 5. 16. 목. 일터소명 묵상]
(사도행전 11:24-26)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평가는 바나바가 이방인들의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안디옥에 특별히 파송되었던 점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22-23절).
그런데 목회자의 자격 조건을 언급하는 표현 앞에 기록된 “착한 사람”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습니다(행 4:36-37). 자신의 소유를 아끼지 않고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 착한 성품일 것입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바나바의 헌신으로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크게 성장하자 성도들을 혼자서 가르칠 수가 없어 사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고 다메섹으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했습니다.
이후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3년간 지내다가 아무도 그를 변화된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고향 다소에서 은둔하던 중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울을 다소까지 찾아갔습니다. 결국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바나바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았고 또 함께 일해서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바나바의 헌신으로 큰 무리가 주님께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지도자 바나바가 착하고 성령 충만한 점이 안디옥 교회 부흥의 요인이라는 분석이 인상적입니다.
당시 안디옥 사람들이 바나바의 이런 모습을 포함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된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일하면서 바나바의 착한 성품과 성령 충만 그리고 믿음의 충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일 그 자체에 집중하고 일 중심으로 일터의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당연한데, 일만 중요하게 여기면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갈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두며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일터에서 우리 동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나바가 착함과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일터에서 착한 행실과 충만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고통! 가슴 기도로 주님께 다가가는 기회! [2024. 5. 14. 화.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상 1:10-11, 17-18)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직장이나 가정, 교회에서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십니까?
이때 기도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특권인데, 한 남편의 두 부인 중 하나였던 한나에게 기도의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부인은 아이를 여럿 잘 낳았는데 자신은 아이를 못 낳아 괴로웠던 한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때 기도를 시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너무도 괴로운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기도밖에 없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순간은 기도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면 그 기도는 통곡이 됩니다.
정말 그의 인생이 괴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과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곡의 기도는 눈물을 보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이것은 의지적 결단입니다. 고통의 순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열매를 드리겠다고 헌신할 기회입니다.
이런 헌신 없이 고통의 시간이 그저 지나간다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한나는 제사장 엘리가 술 주정을 한다고 오해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한나는 오래 기도했습니다(12절).
한나처럼 힘을 다해 오래 기도하면 통곡하는 기도가 ‘침묵 기도’로 바뀝니다.
입술이 아니라 가슴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영혼을 쏟아부을 만큼 진지하게 기도합니다(15절).
또한 한나는 기도 응답의 은혜를 누릴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고통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기꺼이 받았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음식을 먹고 근심을 거두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 가슴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인생을 살아가면서, 특히 일터에서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게 하소서.인생 앞에 놓인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주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2024. 5. 13. 월.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6:25, 31-33)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에는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염려는 사람의 감정을 망가뜨립니다. 염려하면 짜증이 나고 기쁨과 웃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심하면 공황장애 같은 질병으로도 발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하는 염려의 정곡을 찌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7절)
염려한다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염려는 믿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염려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대로 우리가 하는 염려의 대부분은 먹을 것, 입을 것 같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25절).
공중의 새들은 농사도 짓지 않지만 하나님이 다 먹이고 기르시는 것을 보고 우리는 내가 왜 그렇게도 염려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에 따라 염려는 반비례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는 이방인의 태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염려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으나 그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갈급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세는 단순히 염려의 대상인 모든 것과 비교하여 하나님 나라를 우위에 두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 깨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노력을 할 때 우리는 ‘염려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늘 공급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소서.
염려 대신에 우리의 문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서로 주님께 하듯이 하라! [2024. 5. 10. 금. 일터소명 묵상]
(에베소서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직장 생활을 하면서 참 어려운 일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직장생활에서 바람직한 상하 관계가 무엇인가 확실히 압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대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라고 합니다.
고용된 사람들은 일할 때 눈가림만 하려는 자세로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루 이틀만 하는 것도 아닌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일관된 자세로 일하려면 성실함과 같은 인격의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일터에서 사람들을 속이며 가식적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께 하듯이 윗사람에게 순종하며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일하는가?’
주님께 하듯이 일터에서 아랫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의무는 일터의 윗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자신이 일터에서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위험한 ‘주인 의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노예 제도가 있던 사회에서 종들을 위협하던 주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볼 수 있더라도 그런 자세가 크리스천인 고용주나 윗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음을 바울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윗사람은 그런 잘못된 태도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래서 주님께 하듯이 일해야 하는 것은 일터의 윗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있는 의무입니다.
또한 일터에서 윗사람이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하늘에 더 높은 상전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직업인들이 상하 관계를 제대로 알고 순종하고 사랑할 때 우리도 성령 충만한 직업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우리의 일터를 복 주신 하나님, 일터에서 성령 충만하기 위해 상하 관계를 바로 세우겠습니다.
윗사람을 주님 섬기듯 섬기게 하시고 아랫사람을 주님 섬기듯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래서 우리 일터가 아름답고 복되도록 주님이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97~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 [2024. 5. 9. 목. 일터소명 묵상]
(에베소서 6:4)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자녀 양육 문제로 고민합니다.
진학, 진로 문제, 그와 관계된 사교육, 게임, 인터넷, 유튜브 등과 같은 문화적인 문제로도 고민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가정의 바람직한 자녀 교육 방법일까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가장 명심할 것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지침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가정의 자녀들은 대개 큰 부담을 가지고 자랍니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라면 엄마 아빠가 어떤 큰 희생을 치를 수도 있어!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라.’
이것이 많은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가지는 기대가 아닙니까?
공부를 마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에도 부모가 앞장서서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합니다.
가정의 질서에 있어서 자녀들은 부부와 부모, 그 다음에 위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면 그야말로 왜곡된 가정의 질서입니다.
자녀는 가정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이 성경적 질서입니다. 그런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때부터 가정의 중심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버릇만 없어지고 자기 위치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또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부모가 일등이 되기를 강요한다면 그 아이가 가정에서나 이 사회에서 설 곳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모의 바람대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의도와 다릅니다.
바울은 부모에게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각자의 은사에 따라 노력하면서 성취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구별되지 못하니 크리스천들의 가정이 다른 가정들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말씀이 강조하는 교훈을 좇아야 합니다.
부모가 우선 말씀에 집중해야 하고 자녀들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 예배도 좋고 말씀을 암송하는 것도 좋고 묵상도 좋고 함께 통독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익숙한 SNS를 통해서 말씀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노력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가치관을 따라 부모가 살고 그 가치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선물로 자녀를 주신 하나님, 세상의 가치관을 강요하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세상의 풍조나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2024. 5. 8. 수. 일터소명 묵상]
(에베소서 6:1-3)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한 가정의 질서를 생각해 본다면 부부가 한 가정에서 ‘중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둘이 손잡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가정을 꾸려가야 합니다.
그 다음의 질서를 생각해 본다면 부부의 자녀와 부모 중에 누가 앞설까요?
인류의 첫 결혼 장면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례사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아담과 하와는 경험도 하지 않은 ‘부모’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정작 그들에게 당연히 생겨야 할 자녀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자녀가 없어도 부족한 가정이 아니라는 뜻이고 한 가정에서 자녀보다는 부모가 더 우선순위에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의 정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원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녀를 더 중시하느라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중심이 된 가정에서 자녀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부모님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가 나중에 부모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보고 배운 대로 할 것이고 아마도 그러면 부모는 후회가 막심할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바울이 권면하는 대로, 부모님께 주 안에서 순종하는 일을 오늘 우리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버이날의 행사성 효도만이 아니라 가정 안의 바람직한 질서를 세움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까지 하며 보상해 주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당연한 부모 공경에 대해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보상이 있기 때문에 효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더욱 분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을 공경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녀를 가정의 중심으로 삼아 떠받드는 잘못된 풍조를 따르지 말게 하소서.
부부가 가정의 중심을 잡고 바람직하게 부모님을 잘 섬기며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왜 자녀들이 아버지의 좋은 점을 닮지 못할까? [2024. 5. 7. 화.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상 8:1-3)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자녀들이 부모의 좋은 점을 배우지 않고 빗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했던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는 오래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도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양심선언을 했고 백성들이 동의했습니다(삼상 12:3).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들은 아버지가 했던 대로 하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도 굽게 했습니다.
왜 사무엘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의 좋은 점을 배우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사무엘과 아들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추정해 봅니다.
사무엘의 집은 라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사사였던 사무엘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전시에는 군사 지도자가 되어서 나라를 지켜야 했고 평소에는 백성들의 재판을 하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다해야 했습니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재판관 역할을 했는데 평생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했습니다(삼상 7:15-17).
아마도 또 다른 지역들도 순회하면서 백성을 재판하고 다스렸을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계산해도 세 중요한 도시들을 순회하고 라마에서도 재판하는 일을 했으니 사무엘 선지자가 집에 머무르는 기간은 1년에 3개월 밖에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고 바쁘게 살았던 사무엘의 삶이 틀렸거나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집이 있는 라마에 머무르기보다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사역하는 기간이 더 긴 아버지의 빈자리는 매우 컸습니다.
자식들은 보통 성장해 가면서 부모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자랍니다.
그런데 이런 자녀의 상처에 대해 부모가 잘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화하고 기도하고 문제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부모 자식 관계도 쉽게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기간에 부모가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러지 못하면 자녀들의 아픔을 잘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산파 역할을 하며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무엘이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를 닮지 못한 일을 통해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무엘을 보면서 일하는 사람의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인도해 주소서.
좋은 아버지, 바람직한 부모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과 함께 일하니 기쁘다! [2024. 5. 3. 금. 일터소명 묵상]
(시편 127:1-2)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유대인의 하루 개념은 우리 시대 현대인의 하루와 조금 다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5절)이라는 기록이 단서입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떨어진 저녁에서 시작해 다음날 해가 지는 시간까지가 하루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고 난 후에 시작되어 토요일 해 지는 때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하루 개념으로 직업인의 하루를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감사하면서 퇴근하면 그때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나는 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 시간 이후에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십니다.
그러니 나는 여유 있고 마음 편히 쉬다가 단잠을 잡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시 127:2).
나는 잠이 들어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뇌 과학자들이 증명합니다.
잠을 잘 때도 뇌는 전날 들어온 정보들을 정리하면서 일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니 불면의 밤이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어받아서 하면 됩니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시간은 참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감사하며 퇴근합니다.
반면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하루의 시작은 이른 새벽입니다.
알람 소리에 놀라 깨어나 출근 전쟁을 벌이고 일터로 가서 일을 시작하는데 일이란 본래 끝이 없습니다.
퇴근도 못 하고 야근을 해도 일이 끝나지 않으니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으면 또 일을 합니다.
일에 대한 걱정과 압박감 때문에 편히 잠들기도 힘듭니다. 다음 날 새벽에 또 알람 소리에 놀라 일어나 그런 일상을 반복합니다.
과장하여 대조했지만 결국 유대인의 하루 개념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담겨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일터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가지면 기쁘고 보람 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결국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인의 하루 개념은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어서 더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담겨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순간순간에 늘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터의 기도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일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과 늘 동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제가 주도하며 사는 인생은 언제나 분주하지만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터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라! [2024. 5. 2. 목. 일터소명 묵상]
(다니엘 2:14-18)
14 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일터에는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일과 연관해 사람들 간의 관계까지 얽히면 복잡한 문제들이 연이어 터집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에 볼모로 잡혀가 궁궐에서 관리 생활을 하던 신입사원 시절에 심각한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앤디 스탠리 목사가 『일 중심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다니엘의 편법』(두란노 펴냄)이라는 책에서 명쾌하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신하들을 처형하려는 왕의 명령에 대해 보여준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과 일련의 태도를 ‘기지(奇智)와 재치(才致)’라고 표현합니다.
기발한 지혜였고 눈치도 빠르고 능란한 말솜씨까지 곁들였습니다(14-15절).
꿈을 꾼 후 꿈의 내용까지 알아내고 해석까지 하라는 느부갓네살 왕과 무리한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신하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일터에서 일과 얽힌 관계의 문제가 생겼을 때 중재를 위한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물론 다니엘은 인간적인 중재의 노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간 다니엘은 전혀 다른 태도로 친구들과 문제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다니엘의 해결책은 기도였습니다(17-18절).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기도했습니다.
앤디 스탠리 목사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믿음이 부족하기에 일하기 위한 상세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지혜롭게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무작정 직장 상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결심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는 아닙니다.
다니엘은 일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방 제국에 펼칠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바벨론의 고위관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일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에 대한 능력과 더불어 믿음을 꺼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는 21세기의 다니엘이 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다니엘의 하나님, 일과 믿음을 따로 놓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윗사람과 갈등이 생겼을 때 지혜와 인내로 정중하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며 문제를 해결했던 다니엘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주소서.
기도하며 명철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즐거운 일터를 만들기 위하여! [2024. 5. 1. 수. 일터소명 묵상]
(룻기 2:3-4)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베들레헴 들녘에서 보리 추수를 하던 보아스의 밭이 즐거운 일터의 모델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이주해 왔는데 홀시어머니를 부양하려고 일하러 나갔습니다.
그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밭 주인 보아스가 자기의 밭에 들렀습니다.
보아스가 밭에 와서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종들은 주인 보아스를 축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축복이 넘치는 곳이 바로 복된 일터가 아니겠습니까?
일터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진심으로 축복을 주고받는다면 그야말로 즐거운 일터일 것입니다.
보아스의 일터에서 축복을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제사에 참석한 회중이 돌아갈 때 제사장이 했던 축복의 기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민 6:27).
오늘날에도 이런 진심을 담은 축복이 노사관계나 일터의 상하관계 속의 많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날마다 하는 의례적 인사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일터에서 진정 마음을 담아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축복의 인사는 또한 서로를 위한 기도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성도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당연히 일터에서도 상하간에 서로 기도해줄 수 있습니다.
일터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나아가 노사 간에, 보아스와 일꾼들처럼 서로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과 축복을 담아 인사하고 기도하여 복되고 즐거운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배려할 때 우리 일터가 즐거운 일터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우리 일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복된 일터를 위한 멋진 상하관계의 모델을 보여주신 대로 윗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하겠습니다.
아랫사람을 축복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하소서. 그래서 즐거운 일터를 만들 수 있게 주님이 도와주소서.(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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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여 성공하라! [2024. 4. 30. 화.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19:16-21)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예수님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서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신 후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설합니다(11절).
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떠나며 열 명의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백성이 뒤로 사자를 보내 왕위를 얻으려는 그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렸습니다.
그런 어수선한 환경 가운데서 그 열 명의 종들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반대하던 백성의 바람과 달리 그 귀인이 왕이 되어 돌아왔고 왕은 열 명의 종들이 얼마나 장사를 잘했나 결산했습니다.
왕은 한 므나로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었다가 가지고 온 종은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귀인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던 사람들을 몽땅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직업인의 성공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귀인으로부터 장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반대와 핍박을 받는 환경에서도 장사를 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의 처지입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우리는 성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일하면 됩니까?
우리는 보통 이 비유에서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이 동일한 칭찬을 받았듯이
세 므나, 두 므나, 혹시 한 므나를 남긴 종들이 있었다면 그 종들도 성공했습니다.
만약 므나를 은행에 맡겨 약간의 이익만을 남겼더라도 그 종의 최선이었다면 실패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대신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직업인의 성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의 이름도 친히 부르시는 예수님,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늘 감사하면서 우리의 일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귀한 도구가 됨을 명심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공하도록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은 나의 무엇을 보실까? [2024. 4. 29. 월. 일터소명 묵상]
(사무엘상 16:7, 13)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영화 《리플레이스먼트》(The Replacements, 2000, 하워드 도이치 감독)에는 미식축구 선수들의 파업으로 대체 선수들로 급조된 엉성한 축구팀이 나옵니다.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좋은 결과를 냅니다. 이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한 기자가 질문합니다.
과거에 대학 미식축구대회 결승전에서 큰 실수를 하여 은퇴했다가 돌아온 쿼터백 셰인 팔코가 대답을 합니다.
“HEART!” 기술과 능력, 팀워크 같은 것들이 아니라 ‘마음, 가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을 말합니다.
돈만 생각하는 그 팀의 주전 쿼터백 마텔에게는 없는 이 열정이 대체 선수 팔코에게는 있었습니다.
마음과 가슴과 열정이 결국 승리하게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한 아들에게 차기 왕으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신 것이 외모가 아니라 ‘중심’이었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이 ‘중심’을 ‘heart’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화가 난다고 한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키려 하기도 했고 왕이 되어서는 간음과 살인 교사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가 지은 시편들 속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애틋하게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보통 ‘외모’로 판단하곤 합니다.
외모를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중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도 바로 나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외모만이 아닌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과 인격과 열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을 제대로 볼 때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보통 외모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이 중히 여기시는 저의 중심을 잘 가꿀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을 닮아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안목도 허락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주님께 손을 내밀어 보세요! [2024. 4. 26. 금.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8:43-45, 48)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우리가 일을 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너무 크고 힘들어서 엄두가 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겪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사경을 헤매는 딸을 고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길에 있어서 이리저리 밀릴 정도였는데 예수님이 멈추어 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예수님 주위에서 따라가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로 복잡하고 혼란한 중에도 한 사람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터치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한 여인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고 그로 인해 나음을 얻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두려워하면서도 기쁜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12년 동안이나 고질병으로 앓아왔던 혈루증이 나을 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47절).
이 여인은 병세가 심각했고 오래도록 노력했지만 자신의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고질병이 나은 여인은 구원의 은혜도 얻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 가, 옷술 부분에 손만 대어도 이적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 우리 인생의 어려움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을 만집시다.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일터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아시고 또한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과 능력을 함께 가지고 계신 주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능력의 예수님, 사람들이 많고 부정해서 주님께 나오기를 주저하던 여인이 고침받았습니다.
저의 모든 문제도 풀어주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댑니다. 주님께서 치료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원합니다. (by 원용일 목사)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시나요? [2024. 4. 25. 목.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40:6-8)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직장인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때가 있습니다.
직장인이니 당연히 일이 힘들지만 일과 더불어 인간관계가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업무보다 관계 문제가 더 골칫거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이 힘든 것은 어차피 감당해야 하고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꼬여 있으면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드니 어렵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 크리스천들이 남다르게 좋은 관계를 가지는 비법이라도 있을까요? 요셉에게 배워보겠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측근 신하들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죄를 지어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들어간 바로 그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은 두 사람을 돌봐주라는 보디발 친위대장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 두 고관의 얼굴에 근심하는 표정이 뚜렷했습니다.
그러면 그냥 그런가보다, 눈치껏 그저 지나치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요셉은 물었습니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았고 결국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꿈대로 이루어져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사형당했습니다.
요셉은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있는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기꺼이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고관은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이었습니다. 동료 죄수였습니다.
그렇게 표정까지 살피며 호의를 베풀고 걱정할 의무는 없는 사이였습니다.
자신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감옥이었는데 그곳에서 요셉은 이렇게 멋진 주인의식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좋은 태도를 가졌기에 걱정하는 표정을 놓치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결국 요셉은 바로 왕이 꿈을 꾸었을 때 그 꿈을 해몽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주선하여 바로 앞에 설 수 있었고 결국 그 일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관심을 보이고 호의를 베푸는 이런 일을 우리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셉처럼 저도 일터에서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사람들을 살피고 섬길 수 있는 사랑을 허락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당신에게 매력이 있습니까? [2024. 4. 24. 수. 일터소명 묵상]
(사도행전 2:43-47)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일하며 만나는 사람 중에 매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1세기에 예루살렘에 모인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력 있는 사람들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면서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모인 교회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종교적 영성과 경건의 모습입니다.
또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아름다운 사랑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전과 가정에 모여 있을 때만 그렇게 칭찬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백성,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의 결과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인교회만이 아니라 흩어진 교회가 있습니다.
가정과 일터와 학교와 세상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일하는 제자들이기에 일터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일과 관련하여 만나는 거래처 사람들, 고객들에게도 칭찬 받아야 합니다.
뭔가 다른 매력을 발산하여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멋진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 번 믿어보자’ 이런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전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전도야말로 ‘매력 전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세요. 언제나!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세요.”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은 부족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고 일터 크리스천의 기본적 책임을 다하여 부러움의 대상이 되도록 주님이 인도해 주소서. 매력 있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무너지면 안 되는 이유 [2024. 4. 23. 화. 일터소명 묵상]
(사도행전 2:12-15)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말할 때 예루살렘 순례객들이 방언을 들었습니다.
여러 지역 출신의 유대인들이 각자 자기 지방의 말로 각각 복음을 전해 듣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방언은 ‘기도하는 영적 언어’의 은사가 아니고 복음 전파라는 목적을 위한 특별한 언어의 은사로 통역을 통해 듣는 것처럼 말을 알아듣는 은사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전했습니다(11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님의 강림 사건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제자들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성령 충만함과 ‘술 충만’은 현상이 비슷하기에 비교되는 듯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비틀거리고 큰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도 그렇게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술에 취했다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때가 제 삼시다!” 오전 아홉시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술을 잔치 음식으로 자주 마시지만,
아침 일찍부터 술을 마시지는 않는 관습을 사람들이 잘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비난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 120명의 성도들 중 한두 사람이라도 그때 술에 취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가능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야, 술에 취한 두 놈 잡았다. 그것 봐라. 취했다 그랬잖아?
여러분, 예수쟁이들의 쇼는 이제 끝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이 이런 정도의 책임감으로 다가옵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크리스천’이라는 교회의 대표선수로 제대로 살지 못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우리 교회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정도의 치열함과 긴장감으로 우리가 세상 속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책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한 말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됩니다.
떳떳하고 공정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안타까운 상황을 긍휼히 여기소서.
성령 충만하여 세상을 향해 효과적으로 변증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예수님이 머리이신 교회의 대표선수로 일터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인도해 주소서.(by 원용일 목사)
당신의 일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2024. 4. 22. 월. 일터소명 묵상]
(요한복음 5:16-18)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일하는 크리스천들 중에도 일은 신앙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과 신앙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과 기도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일의 의미를 바로 알고 일과 기도를 잘 조화시킨 대표적 인물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일로 인해 유대인의 박해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하시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세상을 운행하고 다스리는 손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하나님이 안식의 때에 지금도 계속 하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공생애 사역을 하기 전에는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을 본받아 사람들의 집과 가구와 생활도구들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공생애 기간에도 말씀 사역과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막 1:12-13).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고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막 1:32-35).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아셨습니다(막 1:36-37).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는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기 전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사역을 마칠 무렵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막 14:32).
때로 주님은 기도를 위해서 하던 일을 포기하셨던 적도 있습니다(눅 5:15-16).
많은 사람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일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일하면서 기도하셨다면 우리야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닮아 열심히 기도하며 일하는 직업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일터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저를 진정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제가 일하는 일터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어찌하여 내 말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2024. 4. 19. 금.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평지복음’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여러 곳에서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평지복음의 결론도 산상수훈의 결론과 같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목수로 이십 년 가까이 일하신 경험을 살려 인상적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일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일하던 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집을 지을 때 모래 위에 짓는 사람과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있는 넓은 바위인 반석에 짓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비유 말씀에 앞서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가 뜨끔했을 만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말씀을 듣기만 한다고 신앙생활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능력을 행했던 사람도 소용없다고 하셨습니다(마 7:22-23).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짓지 않고 주초를 반석 위에 두어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는데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일하는 제자인 우리를 향해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제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십니다. 말씀을 듣는 제가 달라진 행동과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제자임을 보일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일터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하는 제자가 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하는 제자, 말씀을 듣는 제자! [2024. 4. 18. 목.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4:25-5:3)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일터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지금은 나오지 않지만 《일하는 제자들》이라는 크리스천 직장인을 위한 월간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터에서 일하면서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일하는 제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언하면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부르신 제자들은 바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는 일을 하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초기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사역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말씀을 전하시는 사역이었고 또 하나는 병자들을 고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 소문이 갈릴리를 넘어 수리아 지방에까지 퍼졌습니다.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사람들이 허다하게 모여와서 무리를 이루었습니다(마 4:23-25).
예수님은 그 많이 모인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습니다.
마태의 관점에서는 제 2의 모세인 예수님이 랍비들이 가르치는 자세로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5:1).
이 ‘무리’와 ‘제자’를 비교하며 제자도를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은 앉아서 육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중요한 특징이고 특권이었습니다.
일하는 우리는 과연 일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는, 일하는 제자입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하시는 하나님, 일터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말씀을 늘 마음속에 두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 일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소서.(by 원용일 목사)
말씀이 응할 때까지 단련 받으면… [2024. 4. 17. 수. 일터소명 묵상]
(시편 105:17-19)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직장생활을 ‘감옥 생활’로 비유하는 글을 보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옥 같은 직장생활을 통해서도 배울 점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했던 대표적 직업인은 요셉입니다.
창세기의 기사를 보면 요셉이 감옥에 갇혔어도 곧 인정받아 편하게 지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꽤 고단하고 힘든 인내의 세월이 있었음을 시편 105편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오래도록 고통당했습니다.
요셉의 발에 차꼬가 채워져 있었다는 것은(18절)
요셉이 감옥 생활 동안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했으며 고통스러웠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의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구절은 요셉이 감옥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때에는 신앙적인 갈등도 심각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표현은 ‘그의 영혼을 쇠사슬이 꿰뚫었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고민과 방황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이 감옥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운 대로 성적 유혹을 당할 때 이겨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고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지 하나님이 급하셨습니다.
결국 요셉의 영혼을 쇠사슬로 꿰뚫어 묶어 놓으면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런 고통의 세월을 언제까지 겪어야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였습니다.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감옥 같은 직장생활을 할 때도 요셉의 이런 교훈을 꼭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말씀이 단련하는 기간을 거친 후에야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도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요셉의 하나님, 저의 직장생활에 고통이 없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일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게 주님이 도와주소서.
저의 삶도 말씀으로 단련 받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뜻이 말씀을 통해 실현될 때까지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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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8-10) 일터에서 사랑의 빚 갚기4/16일 화요일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사랑의 빚’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은 ‘빚’이라고 하면 느낌이 분명하게 옵니다. 많은 사람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가계 대출이나 학자금 대출뿐만 아니라 기업 대출을 받기도 합니다. 대출을 받았다고 걱정이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남의 돈을 빌려서 빚을 지지 말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당시에도 이런 부채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려는 채무의 부담이라는 느낌을 통해 사랑의 빚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빚은 지지 말고 사랑의 빚만을 지며 살아가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터에서 어떻게 이런 사랑의 빚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 기업의 임원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부하 직원이 야근을 할 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김 차장. 난 김 차장이 고민하는 그 문제를 충분히 해결해낼 줄 믿고 있어요.”
그분은 고민하는 아랫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을, 직장에서는 흔히 듣지 못할 위로를 담아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이라는 표현을 일터에서 동료들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사랑의 빚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의 빚은 우리가 받은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에게 빚을 갚기를 요구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에게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 어떤 곳보다 더욱 사랑이 필요한 곳이 바로 우리 일터입니다. 제가 일하는 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빚을 제대로 갚아 사랑이 넘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아들에게 ‘구찾두’ 기도를 배우다! 4/15일 월요일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래 전 우리 집 아들이 만 두 살쯤 됐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 무렵 많은 사내아이들이 비슷했을 텐데 아들도 굴삭기(포클레인)를 좋아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공사하는 현장에서 굴삭기를 보면 한참을 서서 구경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들이 그림책과 가위를 가져와 굴삭기가 나오는 면을 펼치곤 말했습니다.
“오려, 오려!” 아내가 아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대한아, 책에 있는 그림을 오린다고 해서 진짜 포클레인이 되는 건 아니야. 아빠가 2주일만 지나면 돌아오는 대한이 생일에 포클레인 장난감 사주신다고 했지? 조금만 기다리자.”
그러자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아들이 엄마의 말을 알아듣기는 다 알아들었습니다.
가위도 내려놓고 그림책도 내려놓고는 울음소리도 안 내려고 입을 꼭 다물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생일에 선물로 굴삭기 장난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너무나 가지고 싶어서 울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을 안아 달래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한편 ‘야, 이게 바로 기도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돌도 안 돼 세상 물정도 모르지만 이렇게도 안타깝게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부탁 안 들어주면 낳아준 아비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일도 되기 전에 함께 가서 거금을 들여 최신형 ‘뉴 포크’ 굴삭기 장난감을 사주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이 바로 그렇습니다. 자식이 아버지께 간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찾아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다양하게 기도를 강조하시는 말씀은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구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고 오랜 기간 인내하며 기도하라는 가르침도 담겨 있습니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주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을 당연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해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자식이 아버지께 부탁하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안타까운 문제에 공감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뜻대로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2024. 4. 12. 금. 일터소명 묵상 :말씀을 지켜 세상에 등불을 비추라!
(누가복음 11:33-36)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등불에 대해 비유하면서 몸과 눈의 관계에 기초해서 등과 빛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눈이 몸의 창문이라는 말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체 기관 중에서 눈이 참 중요합니다.
눈이 건강하면 몸의 속이 환하게 밝을 것입니다. 눈이 침침하고 잘 보이지 않으면 몸도 어두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생리학적 상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비밀 공간이나 닫힌 곳에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빛 아래서 생활하도록 적당한 높이에 있는 등잔걸이 위에 두어 잘 보이도록 합니다.
이런 조명의 상식과 연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우리의 영혼을 생각할 때 만일 우리가 빛으로 가득 차서 어두운 데가 없으면 그 빛의 밝음이 우리를 비출 때처럼 세상에 빛이 가득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빛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이지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 8:12).
세상의 빛인 예수님이, 빛이고 소금인 우리에게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5-16).
결국 이런 빛이 가득하게 하여 세상에 비추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들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며 우리는 우리 기업과 우리 민족과 세계를 향해 빛의 걸음을 걸어 나가야 합니다.
등불은 천정에 매달고 높이 걸어야 집 안과 거리를 비춥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가져오고 사랑에 눈뜨게 하고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아들여 빛된 삶을 사는 의미 있는 행동은 세상에서 마리아가 보여준 복보다 더한 복입니다(눅 11:27-28).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말씀을 잘 듣고 순종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의 그 모성보다 위대한 복이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일하는 사람의 기도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착한 행실로 세상에서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2024. 4. 11. 목. 일터소명 묵상 : 남방 여왕처럼 지혜를 구하라!
(누가복음 11:31-32)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은 요나의 예와 함께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예를 드셨습니다.
그 당시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어서 주변에 소문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솔로몬의 지혜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남방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스바의 여왕은 소문을 듣고 솔로몬의 지혜를 확인하러 왔다가 소문으로 들었던 지혜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예를 들면서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십니다(31절하).
예수님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스바 여왕은 멀리서도 지혜를 구하러 솔로몬 왕을 찾아왔습니다.
스바 여왕의 남방 왕국은 아라비아반도 남서쪽, 지금의 예맨 근처에 있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까지는 거리가 2천 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사막과 광야 길을 지나서 그 긴 여행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스바 여왕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혜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데도 지혜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혜를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철학이 대표적입니다. 철학의 어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철학의 인기 여부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철학을 찾습니다. 하지만 철학 사조가 영원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찾는 지혜가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30).
예수님에게 와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혜를 찾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스바 여왕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찾고 있습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듣기 위해 2천 킬로미터 길을 찾아온 스바 여왕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겠습니다.
일터의 동료들이 회개하고 지혜를 구하여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니느웨 사람들처럼 죄를 회개하라!
(누가복음 11:29-30, 32)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말씀만으로 부족하다고 오해하고 뭔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증표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면서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는데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일종의 저주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에게 요나가 표적이 되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앗수르 나라의 왕과 관리들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에게도 먹이를 안 주고 온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했습니다.
이 놀라운 회개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셨습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과 요나의 표적이 차이나는 지점입니다.
유대교에서도 기적을 베푼 랍비들이 여러 사람 있었습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랍비 호니와 나크디몬, 하니나, 시므온, 비느하스 같은 랍비들이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문서들은 기적을 행한 랍비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기록한 복음서는 다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의 주체이고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진희, 『유대적 배경에서 본 복음서』 컨콜디아사 펴냄, 179-181)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절하).
하나님의 명령을 기쁘게 순종하지도 않은 요나가 외친 메시지에도 니느웨 사람들이 다 회개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결국 이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요나처럼 사흘 만에 살아나는 바로 그 일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런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통해서도 회개했는데
요나보다 더 큰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으니 문제라고 지적하십니다.
오늘 우리 세대에는 예수님이 어떤 지적을 하실까요?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됨을 감사합니다.
구원받아야 할 일터 동료들이 요나의 표적을 이루어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소서.(by 원용일 목사)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하나님’
(다니엘 6:16, 19-20)
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친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다니엘에게 하나님과 친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 보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메데 바사 제국의 다리오 왕은 금령을 어긴 다니엘을 어쩔 수 없이 사자 굴에 집어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your God)이 너를 구원하시리라”(단 6:16).
다음 날 새벽에 일찍이 사자 굴로 간 다리오 왕은 슬픈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your God)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다리오 왕은 이렇게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삶에 밀착해 함께계신 하나님을 다리오 왕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나온 후 조서를 내릴 때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단 6:26).
여기서도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다니엘을 모함하여 제거하려고 혈안이었던 정적들도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했겠습니까?
“이 다니엘은 그(의) 하나님(his God)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을 것(단 6:5)이라고 한탄하듯이 고백했습니다.
정적들도 다니엘과 친밀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일터의 동료들과 고객들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 나의 일터에서도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다니엘의 하나님, 일터에서 동료들과 고객들이 제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고 감동할 수 있게 하소서.
제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니엘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성공을 추구하는 3P [2024. 4. 5. 금. 일터소명 묵상]
(느헤미야 1:11, 2:4-5)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2: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크리스천 직업인의 멋진 성공을 보여줍니다. 세속적 성공주의가 아닌 성경적 성공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탄 상황을 두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섬기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호의를 입어 어려움에 빠진 민족을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1:11).
그 때 느헤미야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이 기도의 응답으로 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을 위한 이타적 목적으로, 선한 동기를 가지고 성공을 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불탄 성문을 고치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서 민족의 회복을 모색했습니다.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으면 어떻게 할지 치밀하게 계획했습니다.
걱정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왕 앞에서 근심하는 표정을 보이는 무례를 저지른 후 왕의 호의로 기회를 잡게 됩니다(2:1-3).
그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기한도 정해놓고 왕이 조치해 주어야 할 국경 통과의 문제, 성벽 건축을 위한 재목의 확보 등의 문제들을 일사천리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왕도 느헤미야의 자세한 보고를 듣고는 결국 그의 예루살렘 행을 허락했습니다(2:5-8).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프레이어(Prayer)는 계획하는 사람, 플래너(Planner)입니다.
기도하며 계획하는 사람은 실행에 옮깁니다. 플레이어(Player)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왕의 허락을 받자 느헤미야는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습니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2:9).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 느헤미야의 등장은 당시 예루살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유발했습니다.
실행력은 중요한 능력입니다. 느헤미야의 성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남다른 헌신과 몰입으로 업무에 매진하면서 사람들을 섬긴 느헤미야는 프레이어, 플래너, 플레이어로 3P의 멋진 성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느헤미야처럼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참다운 성공을 추구하게 도와주소서.
기도하며 계획하고 행동하는 멋진 크리스천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낼 수 있도록 주님이 함께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세 가지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는 삶
(마태복음 22:35-40) 4/4목요일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가면 행복할까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던 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크게 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두 가지 계명이고 이웃 사랑에 포함된 자기 사랑까지 합하면 세 가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밀접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혼자인 존재가 아닙니다.
혼자 지내던 아담에게 하와가 필요했듯이 사람은 함께 해야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이웃 사랑을 예수님이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본래 이기적 성향이 강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과 함께 생각해야 할 세 번째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이웃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그 한계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이 달라질 겁니다.
이웃 사랑의 중요한 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향한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죠이선교회의 이름이 유래된 모토를 보면,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사랑의 대상의 첫 자를 따서 진정한 기쁨(JOY)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이 세 가지 사랑을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에서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셔서 제가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듯 일터에서 동료들과 고객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사랑으로 우리 일터가 변하고 참다운 이웃 사랑이 흘러넘쳐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그리스도가 일터에서도 주인이십니까?4/3수요일
(사도행전 2:34-36)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직장인들이 서로 교회에 나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발각 당했습니다.
“앗, 부장님도 교회 나가셨어요?” “아니, 그럼 김 대리도?”
알고 보니 같은 교회에 나가더라고 합니다. 웃기고도 슬픈 현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영적 티를 내지 못했으니 그렇게 해를 넘기도록 예수 믿는 줄을 서로 몰랐던 것이지요.
일터에서도 우리가 꼭 크리스천답게 살아가야 하는 사명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다윗 왕을 들어 말하면서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설교합니다.
여기서 “주와 그리스도”라고 하여 예수님의 호칭을 두 가지로 묘사하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주인이 되심과 동시에 메시아, 즉 구원자가 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 구원주로 믿는 사람은 그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에는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와 더불어 성화의 과정을 추구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꽤 많다고 하지만 오늘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답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다른 곳보다 일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여기까지 오셔서 간섭하십니까?’라며 예수님을 우리 일터에서 밀쳐내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일터에서도 주인이십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 저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일터에서도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일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의미4/2일 화요일
(로마서 14:8-9)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주인”이라는 표현은 오늘 우리 시대에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주종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사회에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1세기에 로마에 압제를 받던 식민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일은 또다른 측면의 울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쉽게 부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 ‘주’(헬라어, ‘퀴리오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 가이사였습니다.
그런데도 1세기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법에 따라 사형을 당해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 예수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이런 태도는 더 이상 로마제국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가이사를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진정한 주님은 한 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 예수를 ‘주’로 호칭하는 것은 그런 심각한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였습니다.
오늘날 거의 위험을 느끼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중요한 갈림길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고 손해를 보더라도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극복해야 하는 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분명한 주도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하는 우리는 바로 우리의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주님, 가장 실감나게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주 예수님을 불러보며 경배드리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입증할 수 있게 주님이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부활의 능력이 일터에 임하기를…4/1월요일
(로마서 6:3-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노래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가 십자가에 달릴 때, 해가 밝은 빛을 잃을 때, 주를 그 무덤 속에 누일 때,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미 갔고 또한 가야 할 ‘거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 첫 번째 ‘거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빈 무덤이 두 번째로 가야 하는 ‘거기’입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밑에 가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또한 부활의 현장 빈무덤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 나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참된 의미는 특히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일하는 일터 속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죽음이 지배하는 것같이 암울한 일터의 상황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그분이 부활하심과 함께 살아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제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생명의 능력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일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기쁨과 생명의 일터로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부활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일터의 사람들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이런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과 일터에서 부활을 증거하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로 인해 일터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십자가에 내어준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 주님과 함께 죽음의 세례를 받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터에도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주님의 마지막 눈빛을 본 사람 3/29일 금요일
(누가복음 22:59-62)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낙심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베드로도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보기 좋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막 14:71).
종교개혁자 칼뱅의 말대로 베드로의 죄는 가룟 유다의 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좌절한 베드로가 다시금 회복되는 과정을 누가복음이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었습니다.
그날 새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주님께서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61절).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빛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질책과 꾸중과 분노를 담아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장담했지만 연약하여 넘어진 베드로, 그를 사랑하고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말씀이 기억나게 하면서 돌이켜 회개하게 만드는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눈빛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가 흘린 이 눈물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을까요?
후회, 안타까움, 회개, 새로운 결심, 헌신·····.
실패가 끝은 아닙니다. 실패하여 고통스럽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주님의 눈빛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를 주목하고 있으면서 끝내 돌이켜 바라보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십니다.
그 주님의 눈빛을 당신은 바라보고 있습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이 저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주님의 눈빛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회복하고 힘을 얻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3/28일 목요일
(요한복음 13:12-15)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을 기록하는 요한복음 1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서 보여 줄 사랑을 유월절 식사 후에, 종들이 하는 발 씻어 주는 일을 직접 하면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발을 씻어 주시는 일은 예수님과 제자들 간 사랑의 관계를 표현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발은 절대 씻을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예수님이 이 특별한 사랑의 행동을 하셨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셨습니다(15절).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형제자매들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관념적 사랑이 아니고 실천적 사랑입니다.
고난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손발을 움직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예수님은 명확하게 정리해 새로운 계명으로 주셨습니다(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동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여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실천하는 사랑으로 제자됨을 인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으로 알 수 있습니다(35절).
예수님은 인류를 향한 가장 강력한 사랑의 실천인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가 일터에서 동료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그래서 예수님의 일하는 제자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3/27일 수요일
(마태복음 27:22-24)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사도신경에 이름이 기록된 유명한 한 직업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으로 온 세계 크리스천들에게 암송되는 빌라도 총독입니다.
아마도 그는 억울해서 자신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무리의 집요한 요구 사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유대교 당국자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황제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약해졌다고 평가받지 않아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예수님의 사형 판결을 내린 셈입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사형 판결을 최종 결정했으면서도 그 일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일에 자기는 무죄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는 핑계는 그가 예수를 믿었거나 호의를 베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고 결국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고도 믿는 기회를 놓친 어리석은 변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은 참 무력해 보입니다.
빌라도가 용기있게 바른 결정을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총독 빌라도의 가장 큰 실수는 가까이에서 만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요 18:36-38).
일의 성취와 업적보다 중요한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선택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이 저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빌라도 같이 주저하지 말고 올바른 선택으로 예수님을 믿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빗나간 철저함’을 포기하라! [2024. 3. 26. 화. 일터소명 묵상]
(요한복음 12:3-6)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에서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에 대해 혁명의 투사쯤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를 가리켜 ‘도둑’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아마도 유다는 계산이 밝고 똑똑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제자공동체의 재정을 맡겼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유다가 제자 공동체의 공금이 담겨 있는 돈궤에서 일부를 착복했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에는 돈을 조금씩 빼내어 쓰다가 다시 채워 넣을 방법을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3백 데나리온이나 나갈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부은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만약 그 향유를 헌물로 드렸다면 팔면서 일부를 착복해 구멍 난 재정을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지 못하니 화가 많이 났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가 돈이 필요했음은 대제사장과 흥정하는 과정에서도 밝혀집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상).
유다는 자기가 꺼내어 쓴 돈 궤를 메우기 위해서 스승마저 파는 ‘빗나간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이런 왜곡된 성실을 보였던 유다는 결국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행동도 역시 유다가 보였던 빗나간 철저함의 증거였습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저 후회하는 감정적 반응으로 그쳤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하는 제자로 살아가면서 성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성실이 유다처럼 빗나간 방향이라면 곤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방향으로 성실해야 합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갔던 바울처럼 목적이 있는 성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빗나간 열정은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목적이 있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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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체험하는 위로의 하나님 [2024. 3. 25. 월. 일터소명 묵상]
(고린도후서 1:3-4, 8-9)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바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목회자가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기는 쉽지 않은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자신의 환난을 소상하게 고백했습니다.
심지어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죽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하며 죽는 줄 알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이 바울을 좌절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진 최소한의 자신감마저 모조리 빼앗아서 철저히 밑바닥 인생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바울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3절)이라고 고백합니다.
3절부터 8절 사이에 위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남아 있지 않고 정말 죽을 지경일 때, 그때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9절).
고난과 위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진정 우리 연약한 인간들을 위로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깊고 깊은 좌절과 절망의 자리로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일할 때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바울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해준 바울의 사도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과 겪었던 관계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바울이 오늘 우리 직업인들에게 권면합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세요!
일하는 사람의 기도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고통의 세월을 보낼 때, 위로의 손길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세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라! [2024. 3. 22. 금.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10:28-33)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염려할 것이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해고의 위협, 질병의 두려움, 관계의 단절, 파산의 위험 등 여러 가지 두려움이 역시 일하는 우리들 주변에도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의 시대에 예수님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식용으로 쓰이던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잡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훨씬 귀한 사람을 아끼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쓸데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인 하나님만을 향해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에 위협을 가하고 물리적인 어려움을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 즉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나의 지위와 체면, 관계, 승진, 성공 등 우리가 하는 일과 관계된 것들이 많습니다.
진정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터의 주인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휘두르는 일터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까다로운 장벽들을 넘어 예수님께! [2024. 3. 21. 목. 일터소명 묵상]
(마가복음 2:3-5)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인생에 까다로운 장벽들이 많습니다. 이웃들의 호의로 예수님 앞으로 가게 된 한 지체장애인도 많은 장벽들에 부딪혔습니다.
첫째는 질병이라는 장벽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둘째 장벽은 사람이라는 조건의 장벽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그나마 친절한 이웃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에 갔으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너무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더 긴급한 환자인데 그곳은 응급실과 달리 위급한 순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환경이었습니다.
셋째는 구조적 장벽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계단을 통해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지붕에는 더 이상 사람의 장벽은 없었으나 예수님이 계신 방으로 들어갈 입구가 없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려는 네 사람은 고민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렸습니다.
물론 그 행동은 분명히 무례했고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집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나중에 그 지붕을 고쳐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여 장벽들을 뚫고 예수님께 갔더니 결국 이 사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젊은 중풍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먼저 이 사람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람 인생의 영혼과 육신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주셨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내려왔으나 이제 그 사람은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사람들을 헤치고 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힘든 비즈니스 현장에서 겪는 문제들을 가지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까다로운 장벽들을 넘어 주님께로 가면 우리의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인생의 장벽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저의 교만함을 꺾어주소서.
인생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모든 문제들을 풀어내시는 능력의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낫고자 하느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2024. 3. 20. 수. 일터소명 묵상]
(요한복음 5:5-9)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문제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 정말 심각합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셨을 때 그곳에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천사가 내려오고 가장 먼저 내려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38년이나 된 딱한 환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의 안쓰러운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띄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상황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을 들은 사람은 혹시 이렇게 반문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가면 되는데 자기는 절대 1등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예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람의 영혼의 잠까지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1등으로 달려가서 병이 낫기를 바란 38년 된 병자의 문제가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네가 오래된 고질병을 고치려 하느냐?”, “너의 깊은 고민거리를 해결 받고 싶으냐?” “너의 일터에 있는 고질적 병폐를 고치고 싶으냐?”
이 질문을 하며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하며 아픈 부분을 다 아뢰고 주님의 능력을 기대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두 손 다 들었던 문제의 매듭도 풀어주실 것입니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비리와 관행의 못된 고리도 끊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도 고침 받고 싶다고, 문제를 해결 받고 싶다고 크게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인생의 고민에도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저도 제가 가진 문제와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고침 받고 해결하기 원합니다.
38년이나 된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고침받았듯이 주님께 아뢰는 저의 문제들도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그날 밤, 백 번이라도 빠질 수 있었다! [ 2024. 3. 19. 화.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14:27-32)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이 출발하라고 제자들을 재촉하신 바다 여행길은(22절) 우리 인생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같이 가셔도 될 텐데 제자들만 보내신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히 7:25).
그런데 제자들이 바다 한복판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했습니다.
막 날이 밝아오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때에야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걷는 사람이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감격한 베드로가 자기도 한 번 물 위로 걸어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고 베드로가 걸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자신도 물 위로 걷기를 요구한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제 무서운 바다 위에서 나무로 만든 배의 널빤지 한 장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겠다는 결심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널빤지냐, 예수 그리스도냐?”라는, 인생을 건 도박입니다.
물 위에서 빠지느냐 빠지지 않느냐를 놓고 하는 도박은 뻔합니다.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빠지지 않는다고 우기면서 우리가 가진 것 모두인 인생 자체를 베팅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으며 왜 겁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몇 걸음이나 걸었는지, 발밑을 보니 파도가 출렁거리자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쳤겠지요.
그런데 이 장면에 주목해 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이 무서워 빠졌습니다.
그런데 빠지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손 뻗으면 곧 구해 주실 만큼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소리치면 되지 않습니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또 빠지면요? 또 소리치면 되지요. “주여!” 한마디만 해도 주님이 알아들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또 빠지면 창피해서 소리치지 못할까요? 다시 소리치면 됩니다.
그날 날이 밝아 왔으니 상황이 끝났지, 시간만 있었으면 베드로는 백 번이라도 빠지고 그때마다 소리쳤을 겁니다.
걱정 없습니다. 백 번을 빠져도 손 내밀어 잡아 주실 주님이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소리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풍랑이 몰아치는 일터 현장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의 고통을 극복하는 비법 [2024. 3. 18. 월. 일터소명 묵상]
(전도서 4:1-4)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일하면서 겪는 심각한 어려움 하나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으로 인해 겪는 고통입니다.
우리의 일터에는 구조적인 모순도 있고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학대도 있습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대로 힘이 있는 사람이 압박을 하면 힘없는 사람은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런 고통은 일터라는 울타리를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학대의 문제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하며 심신의 고통을 느끼고 일의 구조적인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직장 안팎에서 심각한 경쟁에 시달립니다.
목표와 실적의 괴리가 고통스럽습니다. 반복되는 일로 인한 권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일터의 고통을 영적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일터의 고통을 극복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겪는 괴로움은 이 세상에 사는 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직장을 옮기면 나을 수 있지만 그곳은 나름대로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죽어버리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피할 길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2-3절).
더구나 고통을 당하면서 정말 힘들었던 이유는 위로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시기합니다(4절).
그러나 전도자는 팔짱만 끼고 있으며 행동하지 않는 제 살 깎아먹기는 일을 포기하는 태도라고 지적합니다(5절).
학대 받는 현실과 관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해답을 전도자가 제시합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6절).
결국 문제는 두 손에 가득 채우려는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을 부리면 바람을 잡으려는 헛수고에 그치고 맙니다.
공허한 ‘두 손 탐욕’ 대신 우리는 한 손에만 가득 채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한 손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고 타인을 위해서도 기꺼이 나누어줄 수 있으니 평온하고 행복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일하시는 하나님, 일하며 겪는 심각한 고통을 무시할 수 없으나 일터의 고통을 영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
탐욕을 포기하고 한손에만 채우는 자가 누리는 평온함을 허락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면… [2024. 3. 15. 금. 일터소명 묵상]
(고린도전서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늘 갈등이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하는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전도 대상이 이방인인가, 유대인인가에 따라 다른 전도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있는 지역에는 먼저 회당을 찾아 전도했지만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의 본질은 훼손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담는 그릇을 달리 해서 전했습니다.
전도의 대상에 따른 차별화된 전략을 바울이 말했지만 우리의 일터 속 인간관계의 측면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대인관계나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은 저마다 다름을 이해하면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은 더 배려할 수 있습니다.
회사 내의 역할이나 위치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얼마나 쉽지 않은 상황 속에 있는지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가 갈등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줍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인격적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살인에 준하는 죄로 여기셨습니다(마 5:22).
지위나 맡은 역할의 중요도는 다를지라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터에서 아랫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윗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에서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윗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고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여러 입장이 된 전도의 전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터 동료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할 때 우리는 일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객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 멋진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다 다르게 창조하신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허락해 주소서. 사람들이 달라져서 결국 우리 일터가 변화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변화를 가져오는 생각의 법칙 [2024. 3. 14. 목. 일터소명 묵상]
(빌립보서 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생각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늘 잠자리 머리맡에 펜과 수첩을 두고 잠들었다는 일화가 이해됩니다.
생각의 진정한 가치는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결국 우리 삶도 달라집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피로를 느끼는데, 생각을 바꾸면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은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빌 4:6-7).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고 결국 행동하게 합니다.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덕목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8절).
여기서 열거된 덕목들은 한 단어로 집약됩니다. 영어 단어로 integrity입니다. 성실함, 정직, 고결함, 청렴, 완전함, 잘 보전된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와 세상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이원론적 삶이 아닌 일관된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이런 태도의 변화를 초래해서 우리가 삶의 미덕을 소유하게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기대가 달라지고 태도가 변합니다.
그 이후에는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야 달라진 인생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상).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런 아름다운 덕목들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하고 ‘기도’하며 ‘시도’하면 주님이 실행할 힘을 주십니다.
나의 ‘생각’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샬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평강의 하나님,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도의 변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참되고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미덕을 행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팀워크로 함께 일합시다! [2024. 3. 13. 수. 일터소명 묵상]
(창 1:26; 롬 12:4-5)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일터 현장에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팀워크는 무엇입니까? 천재가 혼자서 여러 사람이 할 일을 다 해낸다거나 여럿이 모여 일하기만 한다고 팀워크는 아닙니다.
팀워크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합니다.
사람의 창조 자체가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하신 결과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속성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사람이 창조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함께 일할, 돕는 배필인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창 2:18).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하와를 창조하신 일은 가정의 시작이며 동시에 팀워크의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팀워크를 발휘해서 일하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처럼 둘이 하나가 됨에서 배워야 합니다(창 2:24 참조).
그저 함께 일하기만 하면 팀워크가 아니라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몸의 지체들이 다르듯이 팀의 구성원들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똑같다고 일하는 능력이 동일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재앙입니다. 일터의 복잡 다양한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서로를 보완하려고 할 때 진정한 팀워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 서로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환영할 때 기계적 조직이 아닌 유기적인 팀이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팀워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팀워크를 발휘해 일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혼자만이 아니라 팀워크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일하는 우리 팀이 팀워크가 가져다주는 시너지를 발휘하고 그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몰입과 집중의 지혜 [2024. 3. 11. 월.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10:40-42)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황농문 교수는 그의 책 『몰입』(알에이치코리아 펴냄, 2007)에서 몰입을 도입한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한 회사는 ‘생각 주간’(Think Week)이 있어서 CEO나 회사의 임원들이 1년에 두 차례 생각하는 주간을 가졌습니다.
문구를 생산하는 한 회사는 100년 동안 6만 여개의 제품을 출시할 만큼 끝없는 아이디어로 상품 개발에 주력했습니다.
직원들의 하루 업무 시간 중 15퍼센트를 자유로운 연구 수행을 위한 ‘생각 시간’으로 준다고 합니다.
우리도 일하면서 몰입해야 일의 성과가 나는데 그렇게 하기 힘든 이유도 있습니다. 명확한 목표가 있는 업무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지시까지 받아야 하거나 일하면서 수시로 전화가 걸려 오는 등 급한 일을 하게 되어 허둥대느라 집중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집중과 몰입이 힘든, 사람들의 기본적 성향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다음에 할 일에 대해 걱정한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몰입과 집중하는 일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가셨을 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불만을 제기하며 동생을 꾸짖어달라고 부탁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에는 말씀을 듣는 일이 중요하고 식사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되었습니다.
우리도 몰입을 위해서 우리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기업의 비전과 가치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 설정하고 집중해야 할 것에 몰입해야 합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몰입을 시도하려면 집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마르다의 걱정하며 비난하는 눈짓을 받았겠지만 굳건하게 말씀 듣기에 집중했습니다.
집중하는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자아와 행동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몰입해서 일을 하고 예술을 창조해 내고 과학적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함께 일해야 하는 팀워크도 생각해야 하지만 몰입의 관점에서 오늘 말씀 속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많은 일들 때문에 허둥대지 말고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몰입하고 집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제게 주어진 인생의 자원들이 제한되어 있는데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선택을 잘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네게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리라! [2024. 3. 8. 금.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19:12-14)
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악한 죄를 징벌하려던 하나님은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롯에게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질문하며 그들도 소돔 성의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롯이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소돔 성의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위나 자녀뿐만 아니라 롯에게 속해있는 사람들은 다 성 밖으로 이끌어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의 악함으로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은 롯에게 이런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롯에게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롯이 전하는 소돔성 멸망에 대한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의 딸들과 결혼할 예비 사위들조차 롯의 심판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롯은 자녀들에게도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롯은 아내와도 신앙적 교감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멸망할 소돔 성을 빠져나가던 롯의 아내는 몸은 소돔 성을 떠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 성의 안락과 사치에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소돔 성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안타까운 사건에는 남편 롯이 아내에게 영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책임도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의 가족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느냐?”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을 가족들에게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일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의 일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느냐?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있느냐?”
우리가 일터에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면 우리 동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 당신에게 속한 자는 누구입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구원의 하나님, 가족이나 일터 동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가 되게 하여주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인도해 주소서.(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을 만나 이룬 인생 혁명! [2024. 3. 7. 목.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19:2-4, 8).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이름 뜻은 ‘깨끗한 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의 세금 징수를 위해 현지인 책임자를 고용하고 입찰제로 세금 징수권을 부여했습니다.
가장 많은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적어낸 사람을 세무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부자가 된 과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족의 피를 빨고 자기 배도 채운 삭개오였으나 풀지 못할 인생의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자책감과 소외감이었을까요? 심각한 고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이도 지긋했을 사람이 가로수 위로 기어오르다니요? 그만큼 삭개오는 예수님을 간절하게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 위에 올라선 삭개오에게 다가와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언제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가 걸어온 인생의 역정도 아셨습니다.
그의 고독과 상처와 눈물도 아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당신의 이름도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삭개오는 세리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회개를 예수님 앞에서 공개 선언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사회 환원하고 과다 징수한 세금은 네 배나 갚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인생 혁명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장 중요했던 돈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세리로 일했을 텐데 달라진 삭개오를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팔레스타인 중동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세리장 한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더 이상 돈 욕심 부리지 않고 제대로 일하는 세리를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 혁명이 그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구원주이신 예수님, 어떤 철학이나 처세술이나 성공학도 아닌 복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십자가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만나 인생 혁명을 체험한 삭개오를 일터 동료들에게도 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보다 사람! 사람을 남기라! [2024. 3. 6. 수. 일터소명 묵상](데살로니가전서 2:17-20)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일터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보통 성과를 봅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일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성과가 그 사람에 대한 모든 평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비단 성경적 관점만은 아닙니다.
요즘 리더십이나 경영을 말할 때 ‘사람 경영’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 중심의 원리를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바울이 말합니다.
많은 사역을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남는 것은 그가 복음 전하여 예수님을 믿은 성도라고 합니다.
바울은 비록 세 번의 안식일만 보내고 떠날 정도로 짧게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가리켜 ‘소망이고 기쁨이고 영광이고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예수님 앞에서 구원받은 그 성도들이 귀한 열매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일을 하시면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사역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따르라고 하시고 함께 지내며 훈련을 시켜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제자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이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일터에서도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 중심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일보다 사람에게 더 가치를 부여하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종종 갈등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님의 우선순위를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을 희생하면 성과를 낼 수 있어 보여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목표를 이루고 사람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내고 성취한 일들을 돌아봅시다. 여러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나를 통해서 영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회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받고 회복된 사람 혹은 나를 통해서 지도자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성적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후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람 성적표’는 반드시 확인하실 듯합니다.
일터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늘 눈앞에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느라 사람에게 더 가치를 두지 못한 부족함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사람을 세우고 남기는 일을 잘 해내도록 주님이 함께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누가 우리 일터의 선지자인가? [2024. 3. 5. 화. 일터소명 묵상]
(다니엘 5:25-29)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다니엘 5장은 바벨론 왕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은 60여 년 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신하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그들이 믿는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벽에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알지 못할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왕도 두려웠습니다. 즐겁던 얼굴빛이 변하고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떨었습니다.
신하들에게 그 글자가 무슨 뜻인가 해석하라고 했으나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들려온 위급한 소식을 들은 왕비가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느부갓네살 왕 때 오랫동안 총리로 일했던 다니엘을 추천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독하기 전에 벨사살 왕에게 바벨론의 역사를 회고하며 벨사살 왕을 책망했습니다.
방탕한 술자리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방 신상들을 찬양한 우상숭배를 질책했습니다(23절). 그리고 다니엘은 손가락이 벽에 쓴 글자들을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고(메네 메네)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하였고(데겔) 왕의 나라가 나뉘어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베레스).”
이 해석을 한마디로 말하면 벨사살 왕이 다스리는 바벨론 왕국은 이제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당당하게 세상과 일터의 사람들을 지적할 수 있는 선지자의 역할이 오늘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 회사가 다 끝났고 망한다고 지적할 일이야 그리 많지 않겠지요. 먼저 다니엘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나중에 다 주어지긴 했지만(29절) 다니엘은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17절)라면서 욕심 없이 당당했습니다.
이렇게 영성으로 무장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우리도 다니엘처럼 일터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다니엘의 하나님,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일터에서 선지자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하게 하여주소서.
욕심 없이 당당한 자세로 능력을 인정받는 다니엘을 배우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열정과 아량 그리고 겸손 [ 2024. 3. 4. 월.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5:5-8)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님이 아침 일찍 바닷가에서 일을 마치고 그물을 씻던 베드로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밤새 수고해도 물고기를 못잡았지만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습니다. 밤새 열심히 던져 실패했지만 말씀에 의지해 다시 그물을 내려보겠다고 합니다.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밤새 그물 던지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물을 얻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집중했습니다.
그런 열정으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밤새 잡지 못했던 수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젯밤의 수모와 불운과 좌절이 아직 씻기지 않았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서 그들의 배에도 물고기를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함께 그 그물을 끌어 올려서 그 고기를 나눠 실었습니다. 두 배가 만선이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두 번째 미덕은 자신이 얻은 것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아량이었습니다.
망할 것 같던 빈곤에서 주체할 수 없는 풍요를 경험한 베드로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인생의 주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치열한 일터 현장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밤새 고기 못 잡은 어부의 배를 만선이 되게 하신 목수 출신의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선 자신은 너무나 연약한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셨습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자신을 떠나달라는 베드로가 보여준 미덕은 겸손이었습니다.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 무릎 꿇을 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베드로는 그 아침에 깨달았습니다.
열정과 아량 그리고 겸손의 미덕을 베드로에게 배웁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처럼 열정과 아량과 겸손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일터에서 사람을 취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베드로처럼 주님이 주신 소명을 일터의 동료들에게 확산할 수 있게 인도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내 앞날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셔! [2024. 2. 29. 목. 일터소명 묵상]
(시편 24:1-3)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경성기독청년회(현 YMCA) 총무로 활발히 활동하던 민족 계몽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전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개화파 인사들이 투옥될 때 한성감옥에서 성경을 다시 읽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재 선생의 마음과 생각에 강하게 역사하여 그가 회심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멋진 유머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이상재 선생이 YMCA 활동을 하면서 강연하는데 일본 순사들이 강연장 뒤에 들어와 감시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뒷산을 쳐다보면서 “개나리가 만발하였군!” 하더랍니다.
당시 일본 형사를 뒤에서는 ‘개’라고 불렀고 앞에서는 ‘나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개나리가 만발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일제의 눈엣가시였던 이상재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총독부가 모의를 했습니다.
억지로 총독부에 가게 된 이상재 선생에게 총감이 가방을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총감은 이제 여생을 편안하게 살게 해줄 터이니 더 이상 경성기독청년회 활동을 하지 말라고 이상재 선생을 회유했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문고리를 잡은 후 고개를 돌린 이상재 선생은 분명하고 단호한 우리말로 말했습니다.
“이봐. 나 이상재를 돈으로 매수할 생각일랑 하지 마. 내 앞날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셔.”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총독부가 이상재 선생에게 주려던 돈은 쌀 500가마니 값이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청지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상재 선생과 같은 자세로 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4절)라고 노래합니다.
그런 사람이 여호와께 복 받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공의를 얻는다고 노래합니다(5절).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앞날을 두려워하고 사소한 이익에 눈이 멀게 됩니다.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주 하나님, 온 세상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저 자신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상재 선생과 같은 배포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심을 믿고 살아갈 수 있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돈 버는 능력을 주신 이유
(신명기 8:16-18)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모세는 신명기에서 여러 차례 ‘땅’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 그 땅에 들어가서 얻게 될 놀라운 복을 자주 말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말씀이 더욱 절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넉넉해지는 때에 교만할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돈을 좀 벌고 나면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바로 애굽 땅에서 수백 년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셨던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 일터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습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내가 번 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모세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18절).
돈을 버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18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주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2:1-3).
그 언약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돈이어서 하나님은 돈 버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 일을 하여 버는 돈의 의미를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광야 비즈니스 현장에서 모세가 간절히 호소하는 경고도 잘 들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19절).
우리의 일터 현장에서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며 돈 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 비즈니스 현장에서 돈벌이 때문에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열왕기상 18:20-21)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에 엘리야 선지자가 사역했습니다.
당시는 아합 왕이 이세벨 왕비와 더불어 우상숭배를 극심하게 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3년 넘게 비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이때 아합 왕을 만난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자신이 맞서서 진정 하나님이 누구신가 대결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 대결의 증인이 될 이스라엘 백성의 우유부단함을 꾸짖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엘리야의 이 추상같은 질책은 진정한 신이 누구인가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호와가 진정한 신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진정한 신이면 그를 좇으라고 합니다.
갈멜산에서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눈에 불을 켜고 서 있던 엘리야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며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테냐?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너의 가짜 하나님을 섬길 테냐? 결단하라! 지금 당장!”
반드시 양자택일을 해야 할 순간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믿으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엘리야가 질문합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또 다른 보험 차원의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 우리 기독교와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혼합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엘리야 선지자가 백성에게 대답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일하는 사람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만이 저의 인생에서 유일한 신이심을 고백합니다. 일터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일하고 살아가면서 머뭇거리지 않게 하소서.
결단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 신앙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의 겸손을 배웁시다! [2024. 2. 26. 월. 일터소명 묵상]
(빌립보서 2:3-4)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기독교 역사 속의 성 프란체스코는 겸손한 삶의 자세를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그리 위대한 일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자를 찾으시다가 저를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하도 보잘것없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랑도 못 할 테니까요.”
이런 정도로 겸손하던 프란체스코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금식을 하곤 했는데 제자들에게도 금식을 하게 했습니다. 모두 잠이 든 밤에 갑자기 제자 중 하나가 일어나 외쳤습니다.
“전 죽을 것 같아요. 배가 고파 죽겠어요. 저를 좀 봐주세요.”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일어나서 여러 가지 먹을 것들을 차렸습니다.
그리곤 모두 식탁으로 불러서 그 배고픈 제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자기가 먼저 음식을 먹고 모두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스스로 정했던 금식의 규율을 어기면서도 사랑을 보여준 겸손의 자세였습니다.
이런 겸손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며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 자체가 예수님의 겸손을 가장 잘 보여주었습니다(빌 2:6-8).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었지만 모두 포기하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찬송시’에서 노래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일터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빌 2:3-4).
우리는 경쟁심이나 허영심으로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름을 내보려는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동료들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낫게 여기는 마음, 즉 섬기는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일만 하고 자기 입장만 주장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터 동료들의 일도 돌아보고 함께 일하는 팀워크를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그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에 담긴 겸손을 배워 우리의 일터에서도 실천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 하나님이신 분이 신분과 지위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성육신의 자세로 예수님의 마음을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나셨나요? [2024. 2. 23. 금. 일터소명 묵상]
(창세기 32:22-24, 31)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우리 인생에는 밝은 낮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야곱이 인생에서 밤을 맞았습니다.
야곱이 맞닥뜨린 밤은 전에 속임수로 장자권을 가로챈 형에게 당할 복수였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이룬 일터와 가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그간 애써 얻은 가족과 재산을 모두 얍복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혼자 밤을 지새우며 씨름해야만 할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어떤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했습니다.
정신없이 싸우던 야곱은 자기가 그 밤에 씨름한 상대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살면서 알았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그날 밤에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며 인격적 체험을 했습니다.
밤새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졌습니다.
물론 전에 야곱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밤은 그가 그때까지 20년 동안 그의 가족과 일을 위해 지새던 밤과는 달랐습니다.
야곱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인생의 두 작품인 가정의 행복과 직업적 성공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직업적 성취와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뒤에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야곱은 깨닫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니 복수하려고 달려오던 형과 만나 부둥켜안고 울면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이렇게 만져주셨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외로움과 두려움에 빠져 앞날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힘써 얻은 가족과 재산이 우리의 정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야곱의 하나님, 야곱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셨던 것처럼 저도 브니엘을 지나며 햇빛을 보게 하여 주소서.
야곱이 복수하러 달려온 형과 만나 화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도 브니엘의 은혜로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리더십이 하나님 나라! [2024. 2. 22. 목. 일터소명 묵상]
(마태복음 19:27-28)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 궁금합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다스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직업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모습 중 비즈니스와 관련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이 목수로서 건축 분야의 비즈니스를 경험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즈니스의 안목으로 설명하십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면 예수님처럼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우리가 경험할 중요한 일 한 가지는 “리더십”과 연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0절에서도 예수님은 “너희로 …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열두 보좌에 앉아 리더십을 가지고 심판하고 통치하며 리더십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란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거나 혹은 보다 넓은 개념의 사람들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천국을 다스림이라고 묘사하기 때문에 광활하고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우주의 존재와 연관해 천국의 삶과 할 일을 유추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천국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분명히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리더십과 관계있으니 오늘 우리는 일하면서 리더십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훈련하는 리더십은 이 세상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만큼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분명히 다스림이 있기에 일터 현장에서 우리가 훈련하고 체험하는 리더십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일의 예습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라는 견해가 지지를 얻습니다.
바로 그런 영향력을 오늘도 일하면서 우리가 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올 세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일터 현장에서 리더십을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이 과정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준비하는 기회가 되게 하여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먹고 마시는 일상이 하나님 나라! [2024. 2. 21. 수.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22:28-30상)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요즘 우리 시대에는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일하는 일상의 삶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신학 분야에서도 ‘일상생활의 신학’이 대두되었습니다.
교회를 중심한 종교적인 삶이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역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복음서가 묘사하는 특징 중 하나도 바로 먹고 마시는 일상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식탁에서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30절).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내실 때 하신 중요한 일 중 하나도 ‘식사’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
예수님이 들었던 별명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먹보!’였습니다.
먹는 것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셨으면 이런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식탁에서 비싼 음식을 드신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은 상대도 하지 않던 세리나 창기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런 식탁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은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당시 죄인들의 대명사였던 세리와 창기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먹고 마시는 식사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보여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루라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이미지의 하나님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눅 17:21)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일상사를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맛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우리는 식사하면서도 천국의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가족과, 일터 동료들과, 교우들과, 지인들과 나누는 식탁교제의 중요함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일상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식사 자리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홍보대사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먹고 마시는 일상을 소홀히 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일터의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줄 수 있게 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유 [2024. 2. 20. 화. 일터소명 묵상]
(야고보서 1:19-20)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일터에서 우리는 의사소통에 관한 어려움을 경험하는 때가 많습니다.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또한 고객들과 상대할 때도 소통의 어려움을 자주 경험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하고 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경청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경청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윗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메모하는 것은 윗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반대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도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윗사람들은 점차 아랫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아랫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야고보가 성내는 문제를 언급하는데,
사람들은 왜 화를 내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초래합니까?
듣기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듣기를 잘하려고 노력하면 관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물론 들어준다고 해서 들은 이야기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듣는 이야기를 다 해결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예 듣지 않고 무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잘 듣고 판단하여 거절하면 상대방은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습니다.
거래나 계약을 할 때도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실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분명히 듣지 않고 대충 듣는 바람에 손해를 보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대화할 때 자기가 말하는 양과 듣는 양을 조정하면서 말을 해보는 방법도 유익합니다.
듣기보다 말한 것이 많다고 판단이 되면
의도적으로 말하기를 억제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면 경청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여 속상하던 경험으로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연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하고 회의하고 소통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청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을 많이 하고 성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경청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사람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이익을 남겨야 하는 청지기 인생 [2024. 2. 19. 월. 일터소명 묵상]
(누가복음 19:15-17)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를 ‘청지기’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청지기의 역할은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장사하는 것’, 즉 ‘비즈니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업인들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비즈니스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일을 하는 직업인도 인생에 이런 비즈니스의 논리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청지기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인생 자본금으로 장사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장사를 할 것인가 당연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성실하고 효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한 므나’를 활용해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기는 일이 청지기 인생의 과제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이 므나 비유의 내용은 각각 재능대로 종들에게 다르게 나누어준 달란트 비유(마 25장)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한 므나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번의 인생을 허락하시고 동일하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주인이 돌아와 보니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여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므나를 그냥 수건으로 싸두고 아예 장사하지 않은 종이 있었습니다.
그 어리석은 종이 책망을 받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 장사하여 반드시 이익을 남겨야만 합니다.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온 종은 왜 한 므나를 은행에 맡기지 않아 이자도 받지 못하게 했는지 책망을 들었습니다(23절).
지혜를 발휘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우리는 인생의 장사를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이익을 남기고 있는지, 청지기의 정체를 잘 생각하며 오늘도 일합시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우리에게 인생의 한 므나를 주신 하나님, 제게 주신 한 므나를 잘 활용해서 인생의 비즈니스를 잘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하나님이 제게 주신 기회와 은사에 집중하며 성실하게 일하여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