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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봉의 우리 집 우리문화 2
한옥 짓은 이야기 --<한옥은 온돌이 없으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
한옥은 겨울용 온돌과 여름용마루가 한 공간에 있는 독한 구조이다. 중국, 일본의 전통 주택과 한옥의 가장 큰 차이는 바닥 난방시설인 온돌(구들)에 있다. 한옥의 구조는 그 자체로 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들 아래의 흙은 장마철 습기를 흡수했다가 날이 건조해지면 이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방 안의 습도를 조절한다. 이 같은 기능을 하는 방고래(구들장 밑으로 불기운과 연기가 들어와 빠져나가는 길)가 여름철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고 겨울철에는 지열을 저장해준다. 이와같이 한옥의 구조는 그 자체로 온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온돌은 복사와 전도, 대류의 열전달 3요소를 모두 고려한 독특하면서도 친환경적, 과학적인 난방법이다.
겨울을 나는 방식으로 곰은 잠을 자고, 호랑이는 먹잇감이 부족한 한겨울에는 더욱 더 열심히 사냥을 하면서 겨울을 난다. 어느 이 더 바람직 할까? 우리가 전에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고 배워왔다. 그 때에는 서양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삶이 최고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최근 서구에서 들어오는 첨단 생태건축 이론은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이다. 직역하면 ‘수동형 주택’이지만 이는 올바른 번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자연형주택’ 혹은 ‘자연친화(순응)형 주택’이 더 맞는 번역이다. 그러면 ‘자연순응형’은 무엇인가? 바로 한옥이다. 구하기 쉬운 집 주변의 자연 재료인 흙과 돌과 나무로 더우면 더운 대로 시원한 대청마루가 있고, 추우면 추운대로 따끈한 아랫목이 있다. 바로 우리민족은 호랑이와 같은 삶이라기보다는 곰 같은 삶으로 겨울을 지냈다.
우리 한옥의 키워드는 상극이 아니고 상생이다. 즉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이다. 한 겨울에는 마당과 마루는 버리고 오로지 방안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 방도 다 사용하기 보다는 윗목은 요강의 물이 얼 정도로 춥게 되어 아랫목 만으로 한겨울을 났으니 그야말로 최소면적을 데워서 아랫목 이불속에서 가작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구조이다. 실내외 기온차가 적을 수로 에너지의 부하가 줄어 에너지를 절약하게 된다. 지금 현대의 주택은 방안의 온도를 따스하게 유지시키는 단열 벽체가 주택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만 당시 한옥 온돌방의 단열재는 벽체가 아니고 이불이라 할 수 있다. 겨울에는 항상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살았다.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 누구나 아버지의 보온중인 밥그릇을 차는 실수를 경험한 것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지금 현대인의 삶은 아랫목을 잃어버린 각 방 세대이다. 한 번 다투거나 토라지면 회복이 요원하다.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몇 일이고 말도 안하고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충분히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필자의 가족은 7남매 5형제가 한방에서 살았다. 아무리 다투고 서로 화가 나도 겨울밤 어김없이 아랫목 이불 속에 두발과 시린 손을 녹여야했다. 살을 매일 밤 부대끼고 사는데 어찌 형제우애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현대 가정 파괴범은 아마 온돌을 실종시키는 서구의 난방법의 도입이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추운 겨울밤 오순도순 따끈한 아랫목에 둘러 앉아 군고구마를 먹던 시절이 생각난다.
온돌온실이야기 - 조선시대에 이미 서양보다 150여년 앞선 온돌온실이 있었다.
온돌하면 흔히 방에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비주거와 타용도에 온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춥고 긴 겨울을 갖고 있으며 남으로는 바다가 북으로는 산적과 토비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지역을 벗어나서 살아가기 어려운 조건이다. 따라서 유럽이나 중국처럼 추울 때에 따뜻한 곳의 과일이나 채소를 가져오거나 더울 때 서늘한 곳으로 이동하여 살수가 없는 특성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건축에서도 자연환경을 가능한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실내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건축물의 재료 및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구조재는 목재를 이용하고, 벽체는 주로 황토와 볏짚 같은 친환경 재료를 이용하여 외부환경을 차단하는 벽체를 구성하며 바닥에는 구들을 놓아 불을 때서 부족한 난방열을 공급하였다. 이 때 온돌에 사용하는 장작과 같은 난방재료는 공급열의 다소를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 번에 과대한 열이 실내에 공급되지 않고 실내온도가 적절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닥의 구들이나 벽체는 충분히 두꺼운 구조로 구성되어 축열원리를 이용한 실내온도의 변화폭을 일정온도 범위 내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내온도를 유지하였다. 또한 창호 및 문에는 한지를 이용하여 바람은 차단하면서 자연채광이나 일사의 일부분이 실내로 유입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방식은 주로 주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자료에 의해 이와 같은 온돌시스템이 주택난방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동절기에 채소를 기르기 위해 온실건축에도 활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난방 온실로 알려진 1619년 독일 하이델 베르크의 온실보다 서양보다 무려 170여 년이나 앞선 조선시대 세계최초의 온실이다. 양수리에 위치한 고유의 정원 ‘세미원’에 설치되어 있는 온돌, 우리나라는 이 온돌을 이용해 15세기에 만든 세계 최초로 온실을 복원하였다. 우리 전통구들이 난방효과를 넘어 한 겨울 온실을 유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서울에서 6번 국도를 이용해 경기 양평 방면으로 가다가 신양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양서면사무소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면 왼쪽에 ‘세미원’이라는 곳이 나온다. 세미원은 연꽃과 수련·창포 등을 심어 물을 자연정화하는 인공공원이다. 이곳에 들어서 연꽃 사잇길로 두물머리 쪽으로 걸어가 배다리를 건너면 ‘상춘원’에 닿는데, 그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온실이자 세계 최고(最古)로 알려진 조선시대 온실 복원물이 있다. 『산가요록』은 그동안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떠한 형태인지 몰라서 애타게 했던 온실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가요록의 자료를 토대로 (사)우리문화가꾸기회가 농림부, 문화관광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2002년에 경기도 양평에 복원을 하였다. 전체적인 규모는 면적이 약 60㎡로 전면이 10m, 측면이 6m, 높이0.6~2.0m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산가요록에 따라 복원된 조선온실의 건축방법은 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 삼변에 황토담을 약 30cm 두께로 쌓고 남쪽엔 한지에 기름을 바른 창들을 경사지게 달아 햇볕을 투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바닥에는 구들을 설치한 후 약 40cm의 두께가 되도록 흙을 쌓고 그 위에 목재를 대고 45cm의 흙을 깔아 채소를 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태양복사열이 기름을 입힌 한지의 투과체를 통해 태양복사열이 온실내로 투과된 후에 실내 바닥 및 황토 벽체에 흡수된 후 장파장의 복사열로 바뀌게 되면서 한지를 통해 다시 투과하여 나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온실내의 온도가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는 일사만을 이용하여 충분히 온실내의 온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온도가 생물성장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서 부족한 열량을 온돌을 통하여 공급하였으며, 한편 낮에 투과된 일사열에 의해 실내가 과열이 되는 경우에는 기름한지를 바른 살창을 열어 식물이 생장하기에 양호한 온도조건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북측면의 온실 벽과 맞붙여 주택의 부엌구조와 유사하게 불을 때어 구들 및 밑바닥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온실이 있는 고래 쪽으로 가열된 열기가 통과하여 남쪽의 양측에 있는 굴뚝을 통하여 연기가 배출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부뚜막위에 솥을 걸고 불을 때어 물이 끊으면 온실안과 연결된 연결구를 통하여 잠열을 갖고 있는 수증기가 온실내로 유입되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생산했다는 소위 ‘동절양채(冬節養菜)’, 조선초 1450년경에 어의 전순의에 의해 편찬된 ‘산가요록’이라는 고서 내용 중에 겨울철 채소 재배기술(冬節養菜)과 온실 건축법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사진은 조선시대의 온실을 옛날 방식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다. 조선시대 온실은 산가요록의 편찬연대를 그가 편찬에 가담한 의방류취[醫方類聚](1445)와 유사한 시기로 본다면 대략 1450(세종 32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화란의 무이젠버그가 쓴 온실의 역사(history of green house)를 보면 유럽에서는 1619년경이며 난로(stove)로 가온하였다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전순의의 온실은 이보다 약 170여년경 정도 앞선 것으로 과학적인 온실로 평가되고 있다.
이 조선온실은 조선 초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기록대로 2002년에 복원한 것으로, 1450년 의관(醫官) 전순의(全楯義)선생이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기록된 온실건축부분의 기록대로 당시 궁중의 꽃과 정원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던 500년 전의 옛 온실건축을 재현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산가요록의 자료를 살펴보면 산가요록의 식품부분 중간에 동절양채(冬節養菜)라는 작은 제목이 있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집(온실)을 짓되 크고 작음은 임의대로 한다. 삼면은 막아 쌓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남면은 전면에 살창을 내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바닥에 구들을 만들되 연기가 나지 않게 한다. 그들 위에 흙을 한자반 정도의 높이로 쌓고 온갖 봄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고 밤에는 덮개를 덮어주고 날씨가 따뜻하면 철거하고 매일 물을 이슬같이 뿌려준다. 방안은 항상 온화하고 윤기가 있게 하며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또 이르기를 밖에 가마솥을 걸어 조석으로 솥에서 나는 습기를 벽안으로 끌어 방안을 훈훈하게 한다.” 고 기록했다.이 산가요록의 기록을 통해 15세기 초에 이미 조선에 구들과. 창호지 그리고 흙벽과 짚을 이용한 온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또한 그 방식이 온돌과 창호지를 이용하여 온실의 3요소인 난방. 가습. 채광의 기능을 두루 갖춘 현대의 첨단 온실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발전된 형태라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조동우박사팀은 복원당시 식물이 생장할 수 있는 기능과 환경을 갖출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복원된 조선온실에서의 열환경 특성을 측정 분석하고, 또한 한지온실과 비닐온실의 축소모형을 제작하여 이에 대한 열환경 특성의 차이를 비교 비교 분석하여 쓴 논문인 “조선온실건축에 이용된 온돌의 독창성과 과학성”(국제온돌학회 학술논문집)에서 한지온실이 일사가 실내로 투과되어 실내온도를 상승시키고 식생이 성장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면서 보온을 하는 온실로서의 기능을 뚜렷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또한 한지는 통기성(공기 및 수분 투과성), 유연한 접힘, 강인성 및 빠른 흡수성, 그리고 보온성 등이 비닐에 비하여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 현재의 비닐온실과 조선시대의 한지온실에 대한 온열환경성능을 비교해 본 결과, 조선시대의 온실이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첨단 영농시설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 건축물은 기능면에서 오늘날의 온실과 일치한다. 한 겨울 푸른 채소가 없는 계절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생산케 한 방법이 바로 온돌온실이다. 이 온실은 온돌의 열기와 창호지의 온실효과로 겨울에도 화초를 길렀던 빛을 투과하면서도 보온효과가 탁월한 한지와 황토흑벽과 온돌을이용한 단열 지중 난방, 실낸 온습도 조절은 실로 과학적이다.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움집(土宇)과는 가온(加溫)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별이 되나 때로는 움집과 혼용하기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종 7년(1552) 1월 12일자의 실록을 보면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役事)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린다.” 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곧 움집이 가온을 하지 않았다면 시복에 대한 언급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종 20년(1428)5월 27일 “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造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 『세종실록 제81권』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온돌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흙벽온실은 3면을 흙담으로 쌓고 지붕만 비닐을 씌운 온실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시골에서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사라지고 없다. 중국 산둥(山東)성등과 동북지역인 심양길림등지에서 유사한 형태를 발견했지만 바닥에 구들을 깔고 온돌과 가마솥 수증기로 가온을 한 온실은 조선의 온실이 유일하다. 현재는. 2002년 당시 복원된 온실이 굴뚝도 한 개가 없어지고 아궁이와 고래가 파손되어 전혀 불을 땔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아쉽다. 하루속히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온돌은 우리 민족 고유한 한옥의 특징이자 건강 건축의 핵심 입니다"
전통 온돌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앞장서 활동 중인데, 온돌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라 할 수 있나요?
온돌의 장점은 축열 기능을 이용한 에너지 절약과 탈화유도에 의한 실내 청결 등이 있으나 가장 큰 장점은 ‘두한족열(頭寒足熱 : 머리는 차갑게 머리 아래쪽을 따뜻하게 하면 기혈의 순환이 좋아지고 면역력이 증강되어 건강에 좋다는 뜻)’을 유도하는 건강난방이란 점입니다.
Q. 한국 ‘전통 문화의 현대화’ 라는 명제 하에 건축 분야에서는 어떤 시도들이 논의되고 시행되고 있는지요?
전통의 현대화는 ‘지속가능한 전통문화’를 의미하며,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편안하며 편리한 한옥의 현대화를 이룩한다는 점으로, 조명 재료 설비 구조를 현대적으로 고안하여, 현대인의 생활에 적합한 공간을 저렴하고 개성 있으면서도 전통의 품격을 유지하는 건축계획 방법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Q. 구들 온돌이 한옥, 혹은 건축의 현대화 방안에 유용한 작용을 할 수 있을까요?
구들과 온돌은 다른 나라와는 구별된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한옥의 특징이자 건강건축의 핵심입니다. 불을 아궁이에 때는 직화 방식에서 보일러를 이용한 간접난방이나 전기나 가스를 이용한 편리하고 청결한 현대화 방안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Q. 구들 온돌 문화의 우수성에도 현대 건축 시공 과정상 여러 어려운 점이 있는 걸로 압니다. 보급화, 실용화 방안이 있을까요?
전통구들의 보급을 위해서는 전문 인력의 교육, 시공의 표준화 규격화를 통해 저렴한 공사비를 구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전통을 사랑하고 그것을 유지 하겠다는 상생의 정신 품앗이 정신을 고취하는 것도 또한 중요합니다.
Q. 직접 시공한 구들 황토방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구들 황토방의 좋은 점을 열거한다면.
가장 큰 장점은 건강건축을 구현한다는 점입니다. 두한족열, 수승화강으로 각종 현대인의 생활습관병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요즘 아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아토피성 질환에 탁월합니다.
Q. 생태건축연구소, 온돌학회, 전통 온돌 기술자 양성교육 등 다양한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여 자연과 하나 되는 지속가능한 생태건축을 추구함으로 상생과 홍익인간의 정신를 구현하여 후손에게 더 좋은 지구환경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Q. 북경공업대, 우석대학교 등 대학에서 강의하는 최근의 주요 이슈는 무엇인가요?
전통 한옥에서 콘텐츠를 발굴하여 지속가능한 건강건축, 상생의 생태환경건축, 편리함 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Q. 최근 현대 건축에서 논의되고 있는 패시브 건축에서 전통 구들 온돌문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요?
‘패시브(passive) 건축’(단열 공법으로 에너지 손실 최소화)은 서양에서 만든 용어이지만 우리의 전통한옥은 패시브 건축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그 모든 요소가 패시브 건축입니다. 우리 전통한옥은 에너지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자연과 조화되는 그리고 쓰레기의 발생을 줄이고 재생 가능한, 지속가능한 건축의 역할을 추구합니다. 또한 온돌은 실내에서 신을 벗는 생활을 유도함으로 청결함을 유지하여 보건위생을 위한 의료비의 부담을 줄입니다. 특히 온돌은 바닥 난방으로 침실과 외부공간의 실내외 기온차를 줄이면서도 쾌적감과 건강성을 유지하는 자연 친화의 핵심이 온돌문화입니다.
Q. 농사와 강의, 교육 등 많은 활동으로 일상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보통 하루 일과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저녁에 해가지면 일찍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니까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아침 운동은 논밭에서 두 시간 이내로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의 전환이 잘 되지 않아요. 너무 힘들면 졸리니까요. ‘4도 3촌’이라 하지요? 주중 도시에서 4일, 주말 농촌에서 3일을 사는 방법인데 과거 러시아 성립 초기 '다차'라는 것이 있었는데 제가 그렇게 사는 것 같습니다.(하하) 그래도 비록 일이 많지만 제 육체가 허락하는 한도로 무리하지 않습니다.
Q. 살고 계시는 진천은 ‘생거진천’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진천에서 살기는 어떠한지요? 마을 사람들과는 교류하며 같이 어울리기도 하시나요?
진천은 일년내내 홍수나 가뭄 태풍 등의 자연 재해가 거의 없는 곳이라 생거진천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살기 좋은 곳입니다. 최근 혁신도시도 생기고 진천이 서울에서 90킬로 정도로 멀지 않아 외지인들의 유입이 급속이 늘어납니다. 대형 영화관도 생길정도로 도시화 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도시 생활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요즈음은 작목반에 가입하여 친환경논농사로 우렁이 찰흑미를 생산하며 마을 주민들과 농가형 펜션민박사업도 같이 하고 있어 자꾸 바빠지네요. 농촌 사람들과 산지가 8년이 넘어서 이젠 서로 익숙한 편입니다. 조금 외딴 곳에 살고 있어 나름대로 프라이버시 유지를 하면서 살면서 보름 윷놀이나 마을 잔치 등 동내 행사가 있으면 참여합니다.
Q. 구들 온돌문화가 대안적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구들 온돌문화는 우리 전통 주생활의 근간입니다. 의생활 식생활도 두한족열의 좌식생활문화로 건강한 삶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근로 시간을 줄이면서도 생산성은 충분히 유지 됩니다. 근로하지 않는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관건이지요. 오로지 자신의 건강과 삶을 위하여 매일 등산 가고 낚시하는 것보다는 상생을 위하여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구들 온돌 문화는 상생의 문화입니다. 서로 품앗이로 돕고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하는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Q. ‘건강한 삶’과 전통 구들 온돌 문화의 대표적인 ‘한옥’과는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 한옥의 핵심은 건강건축입니다. 그리고 건강건축의 중심에는 온돌 구들문화가 있습니다. 한옥은 목조로 지어집니다 이 목조건축은 사람에게도 이롭지만 각종 벌래가 서식하기 쉽고 습기에 썩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구들이 있어 한옥을 보존하고 한옥 또한 구들을 보존하는 구조입니다. 이 온돌문화가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한옥과 온돌이 서로 지속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한옥과 온돌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저에게는 온돌이 없는 한옥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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