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에서 넘어 오는 황사가 이번 주말에 나를 꼼짝 못하게 집에 붙잡아 두었다. 이제 추위도 많이 그 세력이 약해져서 이번 주말에는 어디 좀 나들이라도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눈이 침침해서 불편한데 황사로 더욱 심한 것 같고 게다가 가택 연금까지 당하니 내가 졸지에 유명 정치인이 된 것 같다.
'할 일은 없고 움직일 공간은 몇 평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죽으나 사나 이 좁은 공간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장수하는 비결이리라. 아마 황사도 없었다면 별 불평도 없이 집에 틀어 박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전에 하던 것 처럼.. 그런데 황사가 불평의 빌미를 준 것이다.
어제 밤에는 수채화 교본에 나온 그림을 따라 그리던 것을 완성하고 새벽 1시가 넘어서 잤더니 아침 8시 반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동창이 밝아 10시는 되었는 줄 알았는데, 자명종이 없어도 평소 습관 때문에 더 오래는 못 누워 있게 되는가 보다. 아침에 서재에 나와 보니 어제 밤에 스케치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초상화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다의 전기(傳記) 표지를 보고 스케치했던 것이다. 아직 세수도 하지 않아 부시시한 상태에서 스케치북과 책을 들고 이젤 앞에 앉았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프리다는 자화상에서 두 눈썹이 붙도록 그렸는데, 그녀의 사진을 보면 보통 사람보다 미간에 눈썹이 짙게 나 있다. 그녀의 조부모는 헝가리 유대인으로 독일로 이민한 보석 세공사였고, 아버지 빌헬름 칼로는 1891년 19세의 나이에 배를 타고 멕시코에 와서 전문 사진가로 자리를 잡는다.
프리다는 멕시코 혁명(1910-1920)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07년에 멕시코시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와 어머니 마틸데 칼로 사이에 태어났는데, 여섯 살 때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오른 쪽 다리가 불편하였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며 멕시코시에 있는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 프리다는 1925년 9월 17일,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탄 코요아칸행 버스가 전차와 충돌해서 척추에 심한 부상을 당하고 1년 여간 척추를 고정하기 위해 석고 보정기를 착용하고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으며, 이후로 평생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프리다는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지루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기예르모Gillermo는 빌헬름의 스페인식 표현)
프리다는 절망적인 사고 이후 그림을 통해서 새 인생을 발견했으며, 자연과 동물과 색과 과일, 아름답고 긍정적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되찾아 일종의 재탄생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그녀의 첫 자화상인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년)은 유럽 회화의 영향을 받아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우아하고 긴 목으로 그렸지만, 후기 초상화는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 전역에 퍼진 멕시코 주의에 의해서 멕시코의 국가의식과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1927년 말경에 건강이 많이 회복된 프리다는 1928년 초에 쿠바공산주의자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를 만나게 되며, 메야의 연인인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디에고 리베라는 화가가 되겠다는 프리다의 결심을 굳혀 주었고, 1929년 8월 21일에 스물한 살이나 연상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가 결혼하게 된다.
중국의 황사가 나를 가택연금 시킨 주말에 프리다 칼로의 전기 표지를 보고 그린 수채화(우측). 프리다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파란색은 털로 된 숄인가 했더니 원숭이의 팔이었다. 아침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고 나니 10시가 넘었다. 남의 자화상만 그릴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내 자화상도 그려봐야 겠다.
프리다는 남편이자 미술선생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1930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간 체류하게 되는데, 리베라가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의 벽화를 의뢰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멕시코 공산당이 금지되고 상당수 공산주의자들이 투옥되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그후 프리다는 임신을 했으나 두 번이나 낙태를 해야만 했으며, 1934년 말에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남편 리베라가 바람을 피워 큰 상처를 입었고, 1935년 말에는 결혼한 이후 바람기가 지칠줄 모르는 남편과 동생 크리스티나와의 관계가 끝이 났지만, 이번에는 프리다 칼로가 다른 남자는 물론, 말년에는 여자들과도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동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을 당시인1935년에 그린 그림이 '몇 번 찔렸을 뿐'(Unos Cuantos Piquetitos))
당시의 초현실주의의 수장 중 한 명인 앙드레 브르통은 프리다가 1937년 짧은 기간 연모의 정을 나누었던 레온 트로츠키에게 선사한 "사랑을 담아'라는 그림을 보고 감탄하면서 프리다를 초현실주의자로 평가하였는데, 프리다의 화풍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또한 프로이트적인 상징이나 공식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사로잡혀 있는 철학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칼로의 작품세계는 일종의 소박한 초현실주의로, 그녀 자신의 노력으로 직접 고안한 것이다. 공식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이 보통 꿈이나 악몽, 신경증적인 상징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반면, 프리다의 작품은 위트와 유머가 탁월하다."(버트램 D. 울프) 어쨌든 브르통 덕분에 프리다는 1938년에 미국에서 성공적인 첫 전시회를 갖게 된다. 미국에 온 프리다는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마음껏 즐겼고, 사진가인 니콜라스 머레이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프리다 칼로의 미국 여행은 프리다가 디에고와 헤어졌다는 것과 독립을 의미한다.
오쿠쯔 쿠나미치가 쓴 '수채화 프로의 숨겨진 비법'에 나오는 저자의 작품을 보고 그린 풍경 수채화. 볼펜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프리다는 1939년에 브르통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전시회는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전시는 '라 플레슈'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고, 자화상 '액자'(1938년경)는 20세기 멕시코 미술가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었다. 멕시코로 돌아온 프리다는 1939년 11월에 리베라와 정식으로 이혼한다. "죽을 때까지 그 어느 남자의 돈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프리다는 이혼 후 몇 년간 자화상 연작을 그렸는데, 거의 똑같아 보일 정도의 유사성이 두드러지는 이 그림들은 멕시코 민중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이혼 후 프리다는 '짧은 머리의 자화상'(1940년)을 그려 새롭게 얻은 독립을 묘사하였는데, 그녀가 리베라와 1940년 12월에 재결한 직후 '땋은 머리의 자화상'(1940년)에서 상징적으로 제거하고 거부했던 여성성이 부활하였다. 프리다는 1940년 이전에 리베라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그린 뎃생. 서양사람이 이목구비가 확실해서 그리기가 더 쉽다.
1939년 말엽에 등의 통증이 심해지고, 오른손에 균성 질환으로 고통에 시달려 1940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으며, 마침 금문교 국제 엑스포의 벽화작업 때문에 미국에 와 있던 리베라는 그해 12월에 프리다에게 두 번째 청혼을 하여 리베라의 생일인 12월 8일에 다시 결혼한다.
리베라와 두 번재로 결혼한 후 프리다는 다소 고요하고 일상적인 생활로 접어들었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은 멕시코에 경제적 호황을 안겨주었고, 이 시기에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에서 굉장한 대중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위원회에 선발되어 강의 계약을 했으며 상을 받고 잡지 기고 청탁이 들어왔으며, 1940년 1월 17일 멕시코에서 개최된 '국제 초현실주의'전을 통하여 프리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42년에 프리다는 25명의 예술가와 지식인들로 구성된 교육부 산하 단체인 멕시코문화협회의 위원으로 선출되며, 회화조각학교의 교수로 선임되었다.
오른쪽 그림 : '부러진 척추'(1944)
프리다는 1949년 9월에 Bellas Artes 예술전당에서 열리는 연례 전시회에서 '모세'(1945년)라는 작품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프리다는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1946년에 받은 척추 수술 후에 육체적인 고통과 깊은 절망감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프리다의 작품은 초창기부터 상당히 섬세한 방법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 내왔으며, 말년에 들어 공공연하고 더 직접적으로 정치선전 역할을 수행하였다. 프리다는 멕시코 미술가로서, 혁명을 따르고 국가적 정체성 찾기에 일조하는 가치의 재정립에 동참했다. 그녀는 독립적인 멕시코 문화를 강조하는 정치적인 입장을 통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의 라틴아메리카의 뿌리를 찾게 되었고, 이를 작품세계에 반영하였다.
1940년대 말에 프리다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1950년에 프리다는 아홉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그 해에 총 일곱 번의 수술을 받았고 지팡이나 목발의 도움을 받아 아주 짧은 거리를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화가는 주로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고, 죽기 전까지 자화상은 거의 그리지 않고 정물화만 집중적으로 그렸다. 1951년 이후 화가는 진통제 없이는 작업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생의 마지막 해인 1954년에 프리다는 전혀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가 많았다.
1954년 6월 프리다의 건강은 일시적으로 호전되고, 그녀는 회화의 새로운 세계와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한 디에고의 투쟁에 함께 한다. 그녀는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과 아르벤스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비를 맞았고 결국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되면서 프리다는 47번째의 생일이 지난 지 7일 만인 1954년 7월 12일과 13일 사이의 밤에 숨을 겨둔다.
그녀의 일기 마지막 줄에는
"이 외출이 행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라고 적혀 있었다.
프리다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에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가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 집'을 미술관으로 국민에게 유증했고, 푸른 집은 1958년 7월 12일에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결혼하였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프리다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프리다의 뒤를 따라 갔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디에고는 프리다 생전에 수많은 바람기로 많은 고통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를 매우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프리다의 정치색과 화풍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생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는 숙명적으로 그러한 화풍으로 그릴 수 밖에 없다고 이해를 한다. 나는 그녀만큼 어려운 생을 살아오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은 아름다운 장면을 사진에 담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
프리다 칼로의 약사
(2010년 3월 21일, 서울에서) |
출처: 나의 과테말라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Serg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