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亞 경기 후보선수 80%가 영양실조…
"선수들에게 비타민·우유 지원을" 호소
◀ 국가대표 선수들의 첫 훈련 기지로 1963년 서울 동숭동에 문 연 ‘우수 선수 합숙소’(위·조선일보 1963년 6월 28일자)와 합숙소 식당에서 식사하는 선수들(동아일보 1964년 6월 5일자). 합숙소 음식은 영양에 신경 썼지만 선수들로부터는 맛이 없다는 불평을 얻었다.
1973년 5월 25일 전국 주니어 테니스 선수권대회 준결승전 도중 여중생 테니스 스타 김광숙양이 스매싱을 날린 직후 갑자기 쓰러졌다. 선수가 경기 중 코트에 쓰러진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이유였다. 진찰 결과 '영양실조에 의한 위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김양은 홀어머니 곁을 떠나 중1 때부터 단칸방에서 자취해 왔으며, 가난 때문에 밥을 제대로 못 먹어 평소에도 만성 빈혈로 쓰러진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조선일보 1973년 5월 27일 자). 그런 환경에서도 김양은 1972년 도쿄에서 열린 전 일본 주니어 테니스대회에서 9전 9승을 거두며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고, 한국 주니어 테니스 챔피언 자리에도 올랐다. 이 사연을 듣고 한 시민은 "다섯 식구가 점심 굶고 교통비 등을 아껴서 모았다"며 1만2980원(오늘날 물가로 약 22만원)의 성금을 김양에게 전해달라며 신문사에 가져왔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1950~ 1960년대엔 정상급 스포츠 스타들 중에서도 충분히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1962년 고교 장대높이뛰기 최고 기록을 세운 경남의 고교 3년생은 가난 때문에 끼니를 종종 거르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엔 농구 국가대표 2개 팀이 주한 미군 팀과의 친선경기에서 모조리 참패했다. 그때 지적된 2가지 패인은 '단신(短身)'과 '영양부족'이었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후보 선수 186명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했더니 선수들 중 80%가 영양실조 상태였다. 93.4%의 선수는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보도 며칠 뒤 김순환 대한체육회 체력관리과장이 조선일보에 기고문을 보냈다. 그는 글을 통해 "이런 영양 상태로 현재까지의 기록이 나온 게 기적"이라며 "우리 선수들을 위해 비타민이나 피로회복제, 영양 보충에 좋은 목장 우유를 제공할 독지가는 없느냐"고 사회에 호소했다(조선일보 1962년 3월 28일 자).
국가대표 선수들이 함께 생활하며 체력과 영양을 관리할 훈련기지는 도쿄올림픽을 1년 앞둔 1963년 처음 마련됐다. 그해 6월 태릉선수촌의 전신인 '동숭동 우수선수 합숙소'가 완공돼 85명의 선수가 입소했다. 합숙소 운영 방침의 첫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루에 4800칼로리의 영양을 섭취시킨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 엘리트 스포츠 분야에 대한 지원이 늘어갔지만 가난한 선수들의 성공 스토리는 끊이지 않았다. 새끼줄로 농구공을 만들어 연습했다는 섬마을 분교 어린이들이 1972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준우승했던 일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온 국민을 몇 번씩 울렸다.
한때는 제 나라 선수도 충분히 먹이지 못했던 나라가 이젠 세계의 선수들을 불러 최고의 메뉴로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선수촌 식당에서 90여 국 선수들에게 뷔페식으로 제공하고 있는 갈비·비빔밥·스테이크 등 400여 가지 메뉴가 특급호텔 수준이라고 한다. 배고픈 선수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뛰었던 역사는 점점 잊혀 갈지 모른다. 하지만 어려움 참아가며 이를 악물었던 그때의 투혼만은 선수들 모두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