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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역사속 리진의 삶을 추적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83 14.04.27 2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몇 주 전 토요일에 TV를 유심히 보던 중 <한국사전>이란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때마침 <리진>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전부터 <리진>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문헌기록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머릿속에서 잊혀져가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두 작가의 손에 의해 소설이 출간되더니 급기야 두 소설을 토대로 KBS 방송에서 리진의 삶을 조명했다. 확실한 그녀의 실제적인 삶을 그릴 수 없었지만, 과거 역사에 한 부분을 살다간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한 궁녀의 삶. 무희로서의 삶, 파리 외교관의 아내로서의 삶. 조선 신분제도에 얽매어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여성의 발자취를 지금부터 떠나가 보자. 이 글은 지난 방송대본 글이다. 그대로 옮겨봤다. 아울러 신경숙 작가의 <리진>과 김탁환 작가의 <리심>을 읽어보시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韓國史傳]


조선의 무희 파리의 연인이 되다 - 리진


어느 프랑스 인이 남긴 단 4쪽의 기록. 이것은 조선 무희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에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한 조선 여자의 삶과 사랑, 기구한 운명의 순간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 조선의 궁중 무희였던 한 여성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갑니다. 프랑스는 오늘날에도 비행기로 족히 열 시간이 걸릴 정도로 먼 나라이다. 19C 말에 조선 땅에서 프랑스까지 갔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힘들 만큼 대단히 먼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궁중무희였다는 그 여성은 어떻게 프랑스 파리까지 건너가게 됐던 것일까요. (한상권 진행자)


이것이 바로 조선 무희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다. 책에서는 그 무희의 이름을 ‘리진’이라고 적고 있는데 우리가 ‘리진’이라는 여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오로지 이 한권의 책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사람은 과연 누구이고 왜 여기에 조선 무희에 얘기를 남긴 것일까?


취재진이 찾은 곳은 프랑스 파리. 이곳에 ‘리진’을 기록한 인물에 후손이 살고 있다. 그에 집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한국의 전통 장(장은 원래 약방에서 쓰던 것임)이다. 그가 꺼낸 것은 100년도 더 된 사진 첩 한권. 클로드 칼메트(이폴리트 파랑댕의 후손)의 말을 들어보면,


“사진들을 한 번 볼까요. 이 사람이 이폴리트 프랑댕(주한 제2대(1892.4 ~ 1894.2) 프랑스 영사 겸 정부대표)입니다. 저에 대고모부(할아버지 누이동생의 남편)님인데요. 프랑스 영사이자 정부 대표이셨던 분입니다. 한국에서요. 그 직위 때문에 이렇게 관복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왕에 옷은 아니지만 상당히 높은 관직에 옷을 입고 있지요.”


이폴리트 프랑댕은 1892년부터 2년간 2대 프랑스 공사로 한국에서 근무했다.


“그 책은 여기 있습니다. 한국에 관한 책이죠.” : 클로드 칼메트씨의 말 

 

       <한국에서>(1905, 이폴리트 프랑댕, 보티에 부인 공저)

 

1905년에 출간된 이 책은 프랑댕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와 풍습 일상생활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책에서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조선 무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그 무희의 이름을 ‘리진’이라고 밝히고 있다. 클로드 칼메트씨의 말을 들어보면,


“대 고모부님은 그 무희에 이야기를 이 책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녀는 실존인물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설도 아니구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쓴 것입니다.”


프랑댕은 자신이 직접 만났다는 조선 무희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궁궐에 소속된 무희들 중 한 사람이 빼어난 미모로 유난히 돋보였는데 유럽인이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한 젊은 대리 공사가 그 여인의 우아한 매력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는 고종에게 그 무희를 자신에게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왕은 이를 너그럽게 허락했다.” - <한국에서>(1905)


외국 공사에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리진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무희였다. 프랑댕은 자신조차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영혼의 꽃’이라고까지 칭송받았던 리진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클로드 칼메트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건 흔치 않은 무희들 사진입니다. 대고모부님께서 직접 찍은 것들인데 이 어린 무희들은 잔치에서 대신들을 위해 춤을 춰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중에는 제가 직접 찾아 본 사람들도 있죠. 여러분이 현지 알고자 하는 그 무희가 혹시 이 사진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여섯 명 중에 말이죠.”


프랑댕이 남긴 조선 무희들의 사진. 이중에 그가 말한 리진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떤 사진에서도 리진을 추정할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는 그 외국 공사는 누구일까? 작가는 그를 한 젊은 대리 공사가 부르며 그가 살아 있어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 대리 공사를 찾는다면 리진의 삶을 쫓을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외무부에 도움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역대 외교관들 중 문제의 대리 공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누구인지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대리공사란 말 그대로 대사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는 외교 책임자를 말한다. 주한 외교관들 중 대리 공사의 직함을 처음 받은 사람은 콜랭 드 플랑시(1853~1922). 그는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6년. 그 다음에 콜랭 드 플랑시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당시 그는 양국에 조약 비준서를 교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도미니크 방두루스 레이스네(프랑스 외무부 고문서 담당)씨의 말을 들어보면


“문제의 대리공사는 콜랭 드 플랑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프랑댕이 그 대리공사가 한국에 2번 주재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의 행적과 일치합니다. 확실합니다.”


1888년 프랑스 정부는 콜랭 드 플랑시를 한국에 초대 공사(1888.4~1891.2 - 프랑스 영사 겸 정부 대표)로 파견한다. 그리고 그는 2대 공사였던 프랑댕의 뒤를 이어 1896년 다시 3대 공사(1896.4~1906.1 - 프랑스 총 영사 겸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문제의 대리 공사가 콜랭 드 플랑시라면 그에게 리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그의 유품이 보관된 고향 마을의 박물관. 포르냉 부인(트르아 예술 역사 박물관 유물 담당)씨의 말을 들어 보면,

 

                       (1)                                                (2)

 

        (1) 플랑시가 수집한 조선 여인도자기 상

        (2) 플랑시가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1등훈장> 


“콜랭 드 플랑시씨에게 공식적으로 수여된 훈장입니다. 한국 정부가 수여한 것입니다.”


그녀가 꺼낸 것은 놀랍게도 고종이 콜랭 드 플랑시씨에게 수여한 대한제국의 훈장. 그가 한국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유품이 있었다. 포르냉 부인의 말을 들어보면,


“젊은 한국 여인의 도자기 상입니다. 1900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 소개 된 것인데 콜랭 드 플랑시가 세운 한국관에서 판매되는 것입니다.”


한국 여인상 : 1903년 조각가 클레르제가 콜랭 드 플랑시에게 기증한 것.


콜랭 드 플랑시씨는 조각가로부터 이 한국의 여인상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조각상을 간직했다. 그 마음이 바로 리진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프랑댕은 어느 날 우아한 파리에 여인처럼 차려 입은 리진을 보게 된다.


“머지않아 그 대리공사는 발령을 받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젊은 한국 여인에 지적인 품성에 나날이 반해가던 대리공사는 차마 그녀와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데리고 가게 된다.”


마침내 콜랭 드 플랑시씨는 리진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것임을 밝힌다. 그는 리진이 한국의 여신 같은 존재며 파리에서도 천사처럼 대우 받을 것이라 말한다. 리진은 말없이 콜랭 드 플랑시씨의 결정에 따랐다. 그녀의 운명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1891년 리진은 한국을 떠난다. 40일 간에 항해 끝에 리진은 마침내 지구반대 편에 낯선 나라 프랑스에 도착했다.


“지금에야 해외여행도 자유롭고 국내외서도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만 리진이 떠날 당시는 조선이 서양에 문을 연지 불과 10년도 안될 때였다. 대부분에 조선인들에게 서양이라는 나라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낯선 세계였고 더구나 서양 사람을 처음 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씨가 조선에 부임한 1888년에도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을 납치해서 팔아먹는다거나 심지어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겁에 질린 주민들이 외국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때 프랑스로 떠나야 했던 조선의 무희 리진. 파리로 간 그녀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요.” (이상호 진행자의 말)

 

 

1893년 5월 4일.

리진과 콜랭 드 플랑시씨는 마르세이유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탄다. 당시 프랑스는 나라 전체로 철도가 뻗어 있어 기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난생 처음 기차에 몸을 실었던 리진 그녀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기차는 미래로 질주하는 서구 사회에 꿈과 열망을 싣고 있었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 이곳이 바로 리진이 만난 신세계였다. 당시 파리는 화려한 시대라 불리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리진의 눈에 비친 파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학생으로 그녀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유길준은 이렇게 말했다.


“시내에는 누대(樓臺)와 시장이 바둑판처럼 즐비(櫛比)하고 연못과 정원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는데 도로의 청초함과 가옥의 화려함이 세계의 으뜸이다. 런던처럼 웅장하거나 뉴욕처럼 부유한 도시도 파리에는 사흘거리 쯤 뒤떨어진다.” - 서유견문 제20편 ‘프랑스의 여러 대 도시’중 파리


파리 7구역에 바빌론가.

리진과 콜랭 드 플랑시씨의 파리생활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살았던 58번지. 프랑스 외교관과 조선 무희의 신분으로 만난 두 사람. 그러나 둘은 행복했다. 콜랭 드 플랑시씨는 미리 약속했던 데로 리진과 결혼을 했고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파리는 리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리진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리진에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봉 마르세 백화점. 프랑스 최초의 백화점으로 당시 파리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었다. 백화점은 빠르게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유럽의 수도로 문명에 첨단을 달리던 파리에는 대형 백화점들이 앞 다투어 들어섰다. 에릭 망숑 리고 교수(파리 소르본느 대학, 근대사)의 말을 들어보면,


“파리는 대형 백화점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봉 마르세, 쌩 마르탱, 프랭탕와 같은 대형백화점은 당대의 건축양식에 대명사가 되기도 했는데 바로 아레느고라는 건축양식입니다.  백화점들은 성장에 건축양식을 모방하며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사치스러운 상품들을 판매했는데 말하자면, 여성 패션 잡화용품들이죠. 파리는 정말 사치스럽고 즐거움이 넘치는 예술의 도시였습니다.”


눈부신 물질문명과 더불어 리진을 더욱 깨우친 것은 파리의 지성이다. 남편인 콜랭 드 플랑시씨는 가정교사를 들여 리진이 불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매우 빨리 배웠으며 그 적응능력에 교사들도 감탄하며 정도였다. 언어는 지식의 통로였다. 리진은 불어를 통해 프랑스적 가치를 접해 나갔다. 특히 그녀를 감명시킨 것은 기독교였다. 리진의 집 가까이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이교회의 소임은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질 레이팅제 신부의 말을 들어보면


“여기가 순교자의 방입니다. 프랑스인 신부와 한국인 신부의 사진이 있군요.”


이곳에서 파견된 많은 신부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펼쳤다. 한국과 관련된 자료들 중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여성신도들의 사진이다. 질 레이팅제 신부의 말을 들어보면,


“여성들을 복음을 더 잘 받아드리고 믿음에 매우 신실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여성들은 그런 경향이 강했죠.”


조선의 여성들은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녀들에게 자신에 존재는 없었다. 그들의 삶은 늘 누군가에 부인 혹은 어머니로서만 존재했다. 함민재 신부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데 이때 그리스도교는 여성들에게는 본인들 개개인이 고유한 인격을 가진 개별적인 독립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게 됩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가르침은 리진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법률적으로 모든 시민의 권리가 보장된 나라였다. 이는 조선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다. 에릭 망숑 리고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아주 상황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스위스와 함께 유일한 공화국이었습니다. 유럽에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 제국형태의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헝가리 제국처럼 말이죠. 그런데 프랑스는 공화국이라는 독특한 정치형태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에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리진은 프랑스의 법과 기독교의 사상에 크게 감명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변화시킨다. 리진은 스스로에게 눈을 떴고, 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숨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교수로 있는 김경일씨의 말을 들어보면,


“춤추는 궁전 안에서 춤추는 댄서로서 기본적으로 남에게 비추어지기 위한 것이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강했겠지만, 일단 프랑스에 가서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에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는 아 이 몸이 ‘내 것이구나’ 하는 자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자각, 자신에 신체 대한 어떤 의식”


파리는 리진의 삶과 정신,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리진은 이 놀라운 경험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리진은 당시 파리에서의 경험을 직접 글로도 썼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그 기록은 지금 전하질 않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1920년대 소위 신여성(新女性 : 신식 교육을 받고 서양식 옷차림을 하며, 근대적 가치를 추구하던 개화기와 일제시대의 여성)들에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틀에 머리를 했고, 숄과 양산을 애용했다. 이렇듯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과 머리 모양을 통해서 신여성들은 당시 근대 서구문물에 대한 열망과 적극적인 수용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한상권 진행자의 말)


“신여성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나혜석(1896~1948, 서양화가, 시인, 최초의 여권 운동가)과 윤심덕(1897~1926)이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이고, 윤심덕은 사의 찬미로 유명한 성악가이다.  이들은 모두 시대를 앞선 선각자 같은 존재였지만, 또 그만큼 순탄치 않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리진은 이들보다 30여 년 전에 서구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은 바로 리진이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녀의 파리 생활을 계속해서 따라가 보겠다.” (이상호 진행자의 말)


리진의 남편 콜랭 드 플랑시가 남긴 것들은 대부분 그의 고향 마을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수아 베르케씨(트루아 도서관장)의 말을 들어보면,


“여기가 콜랭 드 플랑시씨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는 서고입니다. 콜랭 드 플랑시씨의 가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인데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책은 이쪽에 있습니다.”


그는 동양의 많은 책들을 수집했다. 가져간 책 중에는 한국에 서적도 적지 않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 등 극동지역에서 인쇄된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예를들어 이 책은 조선시대에 인쇄된 것인데 군대에 전술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18C 말에 작품이죠.”


정조에 명으로 편찬된 이 책은 한성에 주둔한 4개 군영에 훈련절차를 정리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책들을 상당수 수집해갔다. 프랑수아 베르케의 말을 들어보면,


“우선 한국, 일본, 중국과 같은 극동 국가들에 관한 서적들이 170권 정도입니다. 프랑스 서적도 있구요, 다른 유럽국가나 미국에서 출판된 것들도 있습니다. 극동국가에 서적들도 30여권 정도 있는데 그중 일부는 한국에서 인쇄된 것들입니다.”


콜랭 드 플랑시씨의 첫 이력은 중국어 통역관이다. 중국어를 전공한 그는 ‘갈림덕’이란 한자이름을 썼을 정도로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수집한 책마다 ‘갈(葛)’자를 표시하곤 했다. 콜랭 드 플랑시가 가져간 책 중에는 세계 최고에 금속활자본인 직지도 포함되어 있다. 직지(直指)에 가치를 한눈에 알아 봤을 만큼 그는 동양과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것이다. 마크 오랑주씨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책들을 수집하는 것은 전혀 공적인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외교관 업무 중에 그런 업무는 없었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중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시아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것에 많은 경탄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집한 것이죠.”


리진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를 만난 한국도 특별한 나라였다. 콜랭 드 플랑시 외에도 당시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인류학자와 군인들이 한국을 다녀갔고 우리의 문화를 서양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이들이 보고 전한 많은 이야기들은 동양에 대한 더 큰 호기심과 환상을 부르기도 했다. 에릭 망숑 리고씨의 말을 들어보면,


“19C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거리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이들은 여행지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져왔고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19C 말 프랑스에서는 동양의 여행기가 붐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관한 책도 적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라는 똑같은 제목에 책만 3종류가 출간되었다. 또 우리에 대표적 고전 소설인 춘향전도 불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정절에 달한 때였다.


동양은 당시 프랑스 상류 사회에 가장 큰 화두였다. 이들은 카페에 모여 자신들에 경험을 나누고 토론에 장을 열었다. 카페는 파리의 모든 지성인들이 모이는 열린 공간이었다. 파리의 어느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파리의 지성인들이 이곳에서 오랜 시간동안 여러 분야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불행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얘기를 했죠. 문학과 철학의 거장들이 이곳에 자주 들렀습니다. 프랑스 문학에서 중요한 많은 운동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학과 철학, 정치와 이념이 카페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동양이라는 미지에 세계는 카페에 지성들을 더욱 자극했다. 프랑스 외교관을 남편으로 둔 리진도 이런 파리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리진은 극동의 나라에서 온 여성. 이것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에릭 망숑 리고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살롱의 여성은 여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살롱에 여성들은 우화하고 부드러우며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리진은 파리의 사교 모임에서 상류계층과 자주 어울렸고 많은 프랑스인들을 만났다. 어느 자리에서나 리진은 돋보였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리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프랑댕은 이 시기 그녀가 육체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김경일 교수의 말을 또 다시 들어보면,


“그 서구문명이 가진 압도적인 위용과 더불어 그것을 건설한 주체로서 그 어떤 서양인들에 대한 신체에 대한 어떤 열등감 혹은 거기에 대한 자기 비아감 이런 것들이 같이 대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아마 리진이 느꼈던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서구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자 그들의 신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들은 자신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의 여성에 비해 조선의 여성은 작고 초라한 존재로 여겨졌다. 파리를 동경하면 할수록 조선은 미약한 나라가 되었다. 프랑댕은 리진이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 전한다.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은 이 가련한 한국 여인은 너무나 야윈 나머지 마치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 - ‘한국에서’ 중에서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콜랭 드 플랑시는 파리에 한국식 규방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곳은 프랑스 최고의 동양전문박물관(기메 박물관)이다. 아시아 각국에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한국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한국관을 세운 사람이 바로 콜랭 드 플랑시다. 기메 박물관 한 큐레이터에 말을 들어보면,


“지금 보시는 것은 기메 박물관에 한국 박물관입니다. 여기 가구가 몇 점 있는데요. 콜랭 드 플랑시의 수집품입니다.”


이 가구들은 1893년 콜랭 드 플랑시가 가져온 것들이다. 그는 한국의 책이나 도자기는 물론 이런 가구들까지 프랑스로 들여왔다. 특이한 것은 남성인 그가 여성용 가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기메 박물관 한 큐레이터에 말을 들어보면


“당시 그는 부드러운 느낌과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바로 한국적 분위기라 얘기 할 수 있겠죠. 이 가구들은 바로 그런 한국적 느낌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런 역할을 하죠.”


이 가구들은 리진의 것이었다. 그녀를 위해 꾸민 한국식 규방의 물건인 것이다. 스스로를 잃고 방황하던 리진에게 콜랭 드 플랑시는 뭔가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만든 규방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낯설게 만 느껴졌다. 그것은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리진은 자신도 더 이상 파리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파리의 이방인이었다.


“남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진의 우울증은 나아지질 않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힘들게 했던 것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문화적 환경에 처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얘기치 못한 변화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낯선 문화 속에서 자신을 결국 이방인에 불구하다는 한계를 느끼면서 의욕을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 정신분석학에선, 이것을 문화충격적응장애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리진은 이런 종류의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후에 그녀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한상권 진행자)


파리로 떠나 온지 4년 만에 리진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 1896년 남편 콜랭 드 플랑시가 주한 프랑스 3대 공사로 임명된 것이다. 리진을 만났던 첫 번째 근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리진에게 이해할 수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고위관료가 나타나 리진을 데리고 갔다.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기록한 프랑댕은 리진이 돌아간 곳이 왕실 무희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리진이 몸담았다는 왕실 무희단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서울시 을지로 2가.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로 근무를 하고 있는 서인화씨의 말을 들어보면,


“네, 이곳은 조선시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장학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본래 장학원은 서부 여경방(종로구 광화문 일대)자리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러?일 전쟁 무렵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장학원은 조선시대 무희와 악공들이 소속되어 있던 기관이다. 리진이 돌아갔다는 왕실 무희단은 바로 장학원을 말한 것이다. 국가에 주요행사나 궁중연회가 있을 때마다 장학원에 무희들은 공연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 무희들은 ‘여기(女妓 : 여자 기생은 3년마다 여러 고을의 관비 중에서 어린 자로 선발한다. - 경국대전)’ 즉 기생이었다. 경국대전은 이들이 지방 관아 노비 중에서 선발된다고 규정한다. 신경숙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은 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관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공노비라고 부르고 또 관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공가지물(公家之物 : 공적인 기관에 소속된 물건)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건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들의 계층이 최하층 노비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의 무희였던 리진은 결국 노비의 몸이었다. 리진이 노비였다는 사실은 프랑댕의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노비의 삶은 나라의 것이었다. 리진도 다르지 않았다. 외교관의 부인으로 돌아왔지만 리진은 다시 관가의 기생이 되어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1907년까지도 관기들이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의 행사에 불려 다녔고 무희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졌지만 그녀들에겐 관습의 굴레가 여전했다. 중앙대 교양학부에 있는 신현규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1907년 까지는 관기제도는 엄연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비의 별개로 리진이 돌아와서 앙심을 품었던 고위관료에 의해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관기의 제도인 妓籍(기생의 호적)에 올라가 있었다는 리진을 다시 복귀시켰다는 명분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리진은 다시 궁궐의 무희가 되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찾았던 그녀의 삶은 사라져 갔다.


“리진은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위 관료에 의해서 다시 무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남편인 콜랭 드 플랑시의 태도입니다. 그는 리진이 끌려가는 동안에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리진이 다시 무희로 돌아가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을 보면 혹시 그가 리진을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이상호 진행자)


“예,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19C 조선시대 노비문서인데요. 콜랭 드 플랑시가 프랑스 보낸 보고서와 함께 첨부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야만적인 관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의외에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현재의 관습을 버리고 문명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상하기 힘듭니다.’ 이렇듯 콜랭 드 플랑시는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하여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진이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했던 것이죠. 헌데 그랬던 그가 왜 리진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것일까요.” (한상권 진행자)


취재진은 콜랭 드 플랑시의 행적을 좀 더 찾아보기로 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그의 인사기록 문서를 최초로 공개했다. 콜랭 드 플랑시의 이력과 직무, 가족 사항이 모두 기록된 문서다. 여기서 취재진은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다. 그가 ‘독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도미니크 방두루스 레이스네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콜랭 드 플랑시의 개인 서류 기록에서는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성과 결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죠. 어쩌면 프랑댕이 잘못 알았던 것일 수도 있죠.”

“공식적으로 콜랭 드 플랑시는 결혼하지 않은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인사 기록문서는 1902년. 그러나 이때까지도 콜랭 드 플랑시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어찌 된 영문일까? 한불 외교사에 정통한 마크 오랑주씨 교수는 독신 기록을 이렇게 해석한다.


“두 사람이 결혼하려면 프랑스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외교관은 항상 첩보전에 노출될 위험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는 여자가 한국 정부에 소속된 사람이고 그녀가 외교관 남편과 같이 사는 것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니까 남편과 대화를 통해서 얻은 정보를 자기 조국에 줄 수도 있다는 것이죠. 프랑스 입장에서는 그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죠. 따라서 어떤 외국 여성이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려면 그녀는 프랑스 외무부에 조사를 받아야 한다.”


외교관이었던 콜랭 드 플랑시가 리진과 결혼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리진이 국가에 소속된 신분임을 생각할 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과 정식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운명은 가혹했다. 리진은 다시 조선의 무희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근대를 경험한 그녀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파리에서 리진은 한 인간으로 그리고 예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신분의 굴레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3)                                                      (4)

 

         (3) 비극적 최후를 맞는 조선 최초의 근대여성, 리진   

         (4) 프랑스 파리에서 리진의 흔적을 취재 중인 "한국사 傳" 제작진>


<한국에서> 중에서

“문명사회의 도덕에 깊이 매료되었던 리진은 다시 던져진 사슬에 자신의 영혼이 상처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금조각들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리진은 파리로 인해 살았고 파리로 인해 죽었다. 그녀에게 조선은 눈과 귀가 막힌 낯선 세계였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던 리진. 선택은 죽음이었다.


“리진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앞선 시대를 살았고 혼자서 그 엄청난 경험을 감당해야 했던 리진에게 더 이상의 출구는 없었습니다.” (이상호 진행자)

“비록 비운의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그녀는 그녀에게 다가온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무희로 자신의 삶에 누구 보아도 치열했던 그녀는 최초의 근대 여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리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상권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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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댕이 1905년에 쓴 회고록.

그는 1892년부터 2년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당시의 문화, 풍습, 일상생활 등에 대해 썼는데, 그 중에 제1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와 함께 프랑스에 간 조선의 무희, 리진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 조선 500년사에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로맨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프랑스 대리공사와 조선 무희, 리진의 사랑

▶ 봉건사회 조선의 관기였던 무희가 프랑스 파리의 근대 문물을 경험하며, 조선 최초의 근대여성으로 거듭나게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 그리고 그 비극적 최후.

신경숙의 <리진>, 김탁환의 <파리의 조선궁녀, 리심>을 통해 널리 알려진 리진의 드라마틱한 인생. 프랑댕의 4세손 클로드 칼메트, 한불 관계사의 권위자 마크 오랑쥬 교수 등과의 인터뷰, 파리 현지 취재와 역사 자료 분석을 통해 역사적 관점에서 리진을 조명. 리진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조선과 프랑스의 시대상황과 미묘한 외교관계 조명.

▶ 리진의 연인, 프랑스 대리공사 콜랭 드 플랑시의 조선 관련 수집품 취재

▶ 드라마 재연을 통해 리진의 일생을 재구성. 현 경기도 무용단원 박지혜씨가 리진역을       맡아 19세기 말 궁중무용을 완벽히 재현.

■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1372)'을 수집한 플랑시. 그가 조선에서 가져간 유품이 소장돼있는 프랑스 최고의 동양 전문 박물관, 기메 박물관(Musee de Guimet) 취재.

■ 플랑시의 고향, 트루아에 있는 생루 (Saint-Loup) 박물관을 방문하여 고종황제가 플랑시에게 직접 하사한 1등 훈장과 플랑시가 수집한 조선의 서적과 사진 등 유품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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