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종 벽이나 지하철, 기차 차량,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휘갈겨 쓴 글자 혹은 드로윙 식의 그림을 말하는 그래피티는 학술적인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상형문자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그래피티의 구체적인 어원은 이태리어의 'graffito'라는 어원에 기초하며,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의미처럼 고대 미술의 벽화를 의미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그래피티는 자동차산업의 발전과 함께 일반인들도 쉽게 스프레이 페인트(Spray paint)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60년대 후반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이러한 모던 (Modern) 그래피티는 도시에서 먼저 출현했으며, 특히 뉴욕의 할렘가 뒷골목에서부터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스프레이 캔(Spray can)을 이용한 그래피티가 시작되면서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끼 있는 문자나 그림'을 'Spray can Art', 혹은 'Aerosol Art'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래피티를 이야기할 때 힙합이라는 문화를 배제할 수 없는데, 흔히들 힙합 문화를 구성하는 것들로 디제잉(DJing), 엠씽(MCing), 비보잉(B-boying) 그리고 그래피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힙합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단순한 정의로는 의미전달이 어려울 것이다. 디제잉, 엠씽, 비보잉과 마찬가지로 그래피티 역시 즉흥적이며 대중과 근접하고 있다는 점, 기존 틀 안에서의 형식을 탈피하고자 한다는 점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힙합 문화의 일부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래피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의 변화에 따른 구분을 하려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 독자들이 그래피티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다른 힙합의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발생적인 흑인문화로서의 그래피티가 60년대 후반에 발생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태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태동기의 그래피티를 거쳐 70년대로 넘어가면 뉴욕 브롱크스의 젊은이들은 MTA(the Metropolitan Transit Authority)의 모든 지하철의 내부를 스프레이와 마커(Marker) 등을 이용해 알아보기 힘든 일종의 서명(Signature)들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이것을 태그(Tag)라고 불렀다. 휘갈겨 쓰여진 사인과도 같은 이 태그는 자신의 애칭이나 별명, 이름의 이니셜 등이 주를 이루었고, 몇몇의 갱 멤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태그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법의 영역에 도전하며 낙서를 즐기던 젊은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작가(Writer)라 불렀고 그들의 작품활동을 라이팅(Writing)이라 불렀는데, 작가들에게 태그란 낙서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인 동시에 라이팅의 뿌리이기도 했다.
지하철 차량의 내부를 가득 메운 태그들은 이전보다 좀더 과감하게 법에 도전하면서 그 장소가 내벽이 아닌 외벽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수많은 태그들 중 자신만의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크기와 색채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그래피티를 존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작가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태그를 남겼다. 그리고 이렇게 태그를 남기는 활동을 태깅(Tagging)이라고 불렀다. 이후 발전하게 되는 모든 작품들의 뿌리가 되는 태그를 통해 작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으로 영문자를 확장하고 장식하며 새롭게 디자인하여 창조적으로 스타일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태그는 라이팅 세계에서 작가 자신의 얼굴이며 정체성이므로, 작가들에게는 단순한 서명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의 태그들은 TAKI 183, JULIO 204, FRANK 207, JOE 136 등과 같이 3∼6개의 영문자들과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영문자들은 자신이 만들었거나 다른 이들에 의해 불려지던 애칭들이며 뒤의 숫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를 의미한다. 이때의 초기 작가 중 한 명인 TAKI 183은 지하철 내부에 자신의 태그를 남김으로서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 )'와 같은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라이팅의 역사가 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 세계에서의 명예(Fame)를 얻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의 태그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태그에서도 스타일이 고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서체가 개발되었고 시각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장식적인 도안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도안들의 대표적인 것으로 별 모양, 왕관 모양, 거품 모양 등이 있는데 이 중 왕관은 스스로가 라이팅 세계의 제왕(KING)임을 공언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디자인적 시도로 자신만의 독특한 태그를 만들게 된 것이다.태그는 스타일에 이어 크기 면에서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일반적인 태그들과의 변별력을 갖춘다는 면에서 스케일은 스타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자신의 태그를 점점 더 크게 그려가기 시작했다. 두께를 강조하기도 하고, 외곽선(Outline)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일반적인 태그와의 차등을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스케일의 변화는 넓은 면적의 분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작가들로 하여금 노즐(Nozzle:스프레이 꼭지)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만들었다. 작가들의 명예를 향한 경쟁이 태그의 이러한 모든 부분의 발전을 가져왔고, 지하철 차량 내부에 조그맣게 끄적거리던 낙서에서 출발한 태그가 차량 외벽 전체를 한 사람의 작품으로 가득 메워지게 한 매스터 피스(Master Piece)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매스터 피스 작품을 통해 최초로 명예를 얻은 작가는 Super Kool 223이며, 그는 브로드웨이 구역에서 성행했던 블록 버스터(Block Buster) 스타일의 문자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크루(Crew) 활동이 증가하고 그래피티가 점점 많아지면서 작가들은 독특한 스타일과 색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작가들은 스타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뉴욕과 그 자치구들의 작가들은 개성이 강한 스타일에 고심하게 되는데 Phase 2와 같은 작가는 버블 레터(Bubble Letter-물방울 무늬의 문자 스타일)를 처음 스타일화 했다. 그래피티가 스타일 전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절정기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아이디어들이 작가들에 의해 쏟아져 나왔고 서로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과 비판이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섬세한 선을 외곽선으로 삼기도 하고, 글자가 뒤엉키는 복잡한 디자인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발전되기 시작했다. 기술과 스타일의 발전은 거의 읽을 수 없는 글자의 디자인, 즉 와일드 스타일(Wild Style), 또 어두운 톤의 그림자를 사용한 입체 효과, 글자가 갈라지거나 깨진 듯한 스타일, 컴퓨터의 여러 문양의 글자체 등의 스타일을 낳게 했다. 많은 스타일을 발전시킨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가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과 불문율이 존재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다른 작가의 스타일과 디자인을 그대로 흉내내는, 이른바 모방(Bite)이라는 것을 굉장히 경시하는 풍조가 팽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앞서 설명했듯이 크루들 간에도 다른 크루와 스타일을 리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고,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많은 스타일이 등장하게 됐다.
초기에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면, 이후에는 점차 약간의 장식을 가미하게 되면서 스타일의 발전과 함께 와일드 스타일이 등장하게 된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디자인의 와일드 스타일은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태거(Tagger)들의 생활 방식과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단순한 스타일이 여기저기에서 쉽게 접해지면서 다른 느낌의 디자인이 요구되었고, 또한 이것은 명예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와일드 스타일은 훌륭한 표현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의 와일드 스타일 작가로 꼽을 수 있는 74년의 TRACY 168은 마치 글자가 엉켜있는 듯한 디자인과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것은 향후 그래피티의 스타일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시기에는 작가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있어 와일드 스타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으며, 작가들은 글자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내세워 스타일화 하기도 했다.
그래피티를 이야기 할 때에는 기차를 빼놓을 수 없는데, 작가와 기차의 관계는 그래피티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작용을 하게 되었다. 그래피티가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서의 뉴욕은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로 세계적인 도시의 모습을 보인다. 맨하튼의 뉴요커, 브룩클린의 번잡한 극장가, 자유로운 사고의 SVA 미대생들, 하지만 이러한 면모 뒤에는 브롱크스, 할렘의 도시빈민들과 마치 폐허처럼 버려진 건물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화려한 뉴욕의 이면에는 대접받지 못한 자들과 평등치 못한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계층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그래피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뉴욕을 지나는 기차나 지하철로 점차 이전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작업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지하철이나 기차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태그 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래피티가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한 시기에서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남들과 차별적인 태그가 필요했고, 좀더 주위의 인정을 받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명예가 작가들에게 필요했다. 따라서 위험을 무릅쓴 작업을 더 높은 명예로 여기게 되었고, 더욱이 시교통당국(MTA)에의 도전 행위 자체가 철길의 위험함이나 밤 몰래 기차 차량에 그리는 것만큼 이들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기차나 지하철은 움직이는 벽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래피티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흥기의 스타일과 명예에 대한 고심도 절정기를 지나 8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래피티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버핑(Buffing)이라고 불리는 시 교통당국이나 반 그래피티 단체들의 작품을 지우는 행위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이것은 예전의 버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직화된다. 지금도 그렇듯이 미국과 유럽의 사회는 그래피티를 하는 작가들도 많고 산업도 크게 발달되어 있지만, 반면에 반 그래피티(Anti- Graffiti)의 움직임 또한 크다. 실례를 들어보면, 그래피티의 스프레이 페인트 색상이 300∼400가지 정도 개발되어 있고 기타 그림도구들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버핑 약품의 개발과 그 산업도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 어쨌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반 그래피티의 성향은 엄격한 법률로 스프레이 판매마저 금지시켰고, 이에 작가들도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낳게 됐다. LEE나 DONDI
, ZEPHYR는 유럽으로 갤러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이러한 일들로 유럽에 작가들이 생겨나면서 서로 교류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유럽의 문화스타일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또 한가지, 유럽에 그래피티를 널리 퍼지게 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스타일 워(Style Wars)'와 '와일드 스타일(Wild Style)'이란 영화였다. 스타일 워는 순수 그래피티 영화였다는 점이 주목되었고, 와일드 스타일에서는 실제로 LEE와 LADY PINK가 주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암흑기에서의 그래피티는 자연적으로 작가들의 활동무대가 기차나 지하철이 아닌 벽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많은 역경이 도래하면서 PHASE 2와 같은 작가는 최초의 잡지 '그래피티 타임즈(The Graffiti Times)'를 발간하면서 다른 방법으로의 시도를 모색하게 된다.
한편 유럽에서는 초창기의 미국 그래피티처럼 정치색을 갖거나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자기자신과 주변의 개인적인 소재가 주를 이루는 작품 색을 띄게 된다. 이것은 뉴 스쿨 스타일(New School Style)로의 발전을 점차 가속화시키고 다양한 스타일의 작가를 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올드 스쿨(Old School)과 뉴 스쿨(New School)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80년대를 기점으로 하는 시기의 변화도 있겠지만, 사실 그래피티라는 Vandalism(기존 질서의 파괴)이 초창기 발생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과정이었고 이것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그래피티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단순한 낙서로만 인식되어 그 가치가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시기 구분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근래 들어 나타난 작가주의적 성향의 그래피티 작가들과 대중의 문화인식 개방성은 뉴 스쿨의 작가들에게 힘을 제공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전의 지하철이나 기차 안의 빼곡한 낙서와 태깅에서 점차 팝 아트(Pop-Art)의 한 장르로 발전되어 갤러리 전시와 퍼포먼스 행사를 통해 친숙한 그래피티로 전환되었다는 점은 시기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의 가늠점이 되었다. 더 이상 낙서가 아닌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있고, 유럽과 미국의 유명 작가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장소에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을 열기도 하며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활동도 꾀하고 있다.
신 그래피티기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인터넷의 보급과 인식이 기반이 되어 94년 최초 그래피티 전문 웹(Web)인 '아트 크라임(Art Crimes)'의 등장으로 컴퓨터 네트워크 그래피티( Computer Network Graffiti )라는 것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많은 작가들이 웹을 이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알리게 되었고, 전세계적인 글로벌 크루(Global Crew)들이 등장하고 있다. 많은 국가의 작가들이 연계되고 작업을 같이 공유하는 빅 프로젝트 그래피티(Big Project Graffiti)가 생기고 오지의 나라에서도 반대편 국가의 그래피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그래피티의 범위와 문화가 넓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