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일어선 사나이가 말한다
“당신 안에 있는 성공 본능을 일깨우세요”
김영식 회장처럼 극적으로 사업해 온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녔다가. 사업에 실패하고는 손수레를 몰아야 했다. 다시 일어나 번듯한 사업체를 차렸으나 또 다시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몰락해, 여관을 전전하며 몸부림을 쳐야 했다. 실패는 그의 성공 본능을 일깨웠고, 어두운 실패의 경험은 그의 성공을 더 화려하게 빛내 주는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텅빈 사무실에서 김영식 회장만이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200명이나 되던 그 많은 직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다. 얼마 전만 해도 드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사업가로 주목받았다. 건강식품 사업이 대박이 나고부터 여러 체인 사업에 손을 대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승사자도 같은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그러했다.
체인 사업이 줄줄이 무너지고, 만기가 된 어음과 맞물려 돈줄도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회사와 집이 압류될 위기에 처했고, 직원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다. 사업을 일구어 낼때는 그렇게 어렵고 힘들더니,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서울 서초동에 잇는 9층 빈 사무실에서 소주를 마시다 보니, 문득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돌이 일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세무서에서 온 전화로,“체납된 국세, 이번에도 안내면...”하는 협박성 내용이었다. 우는 애 한 대 더 때리는 격이었다.
“이봐요. 나, 세금 떼먹으려는 거 아니오. 계속 그렇게 사업 못하게 다그치면, 여기 9층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자살할 생각이었소.”
죽고 말겠다는 말에도 세무서 직원은 냉정했다.
“뛰어내리는 건 그쪽 사정인데, 세무서 전화 받고 뛰어내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사업한 지 14년 됐는데 그동안 전화번호 한 번도 안 바꿨어요. 그런 사람이 세금 떼먹는 거 봤습니까? 기다리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슨 수로 일어서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채업자에게 무릎을 꿇다
김영식은 처음부터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 군 제대를 하자마자 일일 학습지 사업을 시작했다. 판매 부수 90부수에 지나지 않은 한 지국을 인수해, 몇 달 만에 무려 550부를 내는 수익 사업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학습지를 보려는 사람이 있으면 산골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 부지런함의 결과였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100킬로미터나 달렸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던 1980년에 김영식은 큰돈을 만지는 사업을 벌이게 된다. 세계 금연의 해를 맞아 금연파이프를 만든 것이다. 자신이 먼저 담배를 끊은 그는, 하얀 모자에 하얀 장갑 차림으로 거리로 나가 금연의 필요성을 내세우며 금연파이프의 유용성을 설명했다. 효과는 매우 좋았다. 더불어 금연파이프에 대한 소문이 나자 업자들이 달려들었고, 6개월 한달 동안 무려 6천만 원원이나 벌어들였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도 안되었으니 엄청난 돈이었다.
사업이 잘되어 순식간에 돈이 모이자, 덩달아 자만심도 커졌다. 물 쓰듯 돈을 쓰고 다니며 교만해졌다. 그 교만함은 방만한 사업 확장으로 이어졌다. 장난감, 주방용구를 비롯해 여러 사업에 손을 대자,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당시 최고 국산차였던 포니 승용차를 타고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금방 몰락해 버렸다. 가족들 생계마저 막막해졌다.
그때 한 친구가 사업 아이템을 제안했다. 조끼 5천장을 헐값에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식이 보아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는 안면이 있는 사채업자를 찾아갔다. 물론 사업에 실패한 그를 만나 주려고 하지 않았다. 사흘 낮밤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만났다. 그리고 또 다섯 시간을 버티고 난 뒤에야 겨우 250만 원을 빌릴 수 있었다. 고급 승용차 대신 허름한 손수레에 조끼를 싣고 새벽부터 나가 거리에서 팔기 시작했다. 배수진을 치고 달려들자 열흘 만에 다 팔아치워, 빌린 돈을 갚고도 500만원이 남았다. 그 뒤로 이런저런 아이템을 잡아 열심히 팔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마침내 천호 식품이라는 회사를 차린다.
그렇게 아찔한 실패를 겪었으면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건만, 김영식 회장은 그보다 더 큰 실패를 겪는다. 건강식품으로 잘 나갈 때 사업을 확장하다가 외환위기를 만난 것이다. 잘 나가다가 몰락하니까 고통도 그만큼 더 컸다.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텅 빈 사무실, 텅 빈 공장만이 남았다. 1998년3월에는 당장 2천만 원을 구하지 못하면 부도가 날 위기에 처해,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 저녁에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소시지와 소주 한 병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실패의 괴로운 기억 때문에, 술기운에 기대지 않고는 잠들 수가 없기도 했다.
“이 쑥 못 팔면 죽어요”
그 위기에서 김영식 눈에 들어온 아이템이 바로 쑥이었다. 당장 돈은 없었지만, 제품을 담아 낼 포장재는 많이 남아 있던 터였다. 그는 빈손으로 쑥 재배지를 찾아가 공급 계약을 맺고, 파리는 대로 대금을 치르기로 했다. 이제 문제는 파는 것이었다. 광고를 낼 여려도 없었다. 그가 당장 생각해 낸 전략은 가격파괴였다. 원래 18만 원에 팔던 것을 5만 원으로 파격적으로 가격을 낮추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쑥에 관한 책이란 책은 모조리 구해 읽어, 언제든 세 시간 쑥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되었다. 이제 김영식은 쑥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일기장, 수첩, 명함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쑥을 팔자!”라는 글귀를 넣었다.
휴대전화 액정 화면에는 “쑥을 팔자, 못 팔면 죽는다!”라는 비장한 문구를 새겼다. 이런 생각으로 아침에 일어났고, 이런 생각으로 저녁에 잠들었다.
처음에는 광고 전단을 만들 여력이 없어서, 잘 나 갈 때 아내가 선물한 반지를 전당포에 맡겨 돈을 구해야 했다. 아침 6시 반이면 여관에서 나와 서울강남역 지하도 입구에서 전단을 돌렸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돌며 모든 선반에 전단을 올려놓았다. 비행기를 타도, 지하철에서 하듯 자리마다 전단을 올려놓았다. 승무원이 제지할라 치면 “이 전단 안 뿌리면 나 죽어요.”하고 양해를 구하며 전단을 돌렸다.
쑥을 주제로 한 노래도 지어 불렀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도 쑥색으로 맞추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쑥이 되려는 듯했다. 그리고 드라마로 인기를 끌던 이순재 씨에게 무료 광고모델을 제의를 했다. 재기하겠다는 불타는 열정에 이순재 씨는 단번에 허락했다.
쑥으로 일어서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달려든 결과는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매출이 쑥쑥 자라 주었던 것이다. 다달이 판매 수익이 가파르게 오르더니, 1년 만에 월 매출이 5억 원으로 뛰었다. 거기에서 또 다른 건강식품 아이템 ‘사슴한마리’를 내놓으며 다시 한 번 매출 증가에 불을 지폈다. 그리하여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빚 20억 원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은해에서 ‘적색경고’를 받은 지 3년 만에 신용 상태는 다시 최고 등급으로 올라갔고, 회사는 최우수 중소기업으로 뽑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회사와 집을 압류하겠다고 했던 은행이 그를 명예 지점장으로 위촉했다.
“달팽이, 인사하고 갑니다!”
한번은 음주 운전으로 큰 사고를 당했다. 전봇대를 들이받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갈 뻔한 것이다. 그때 좀처럼 뼈가 붙지 않아 걱정했는데, 달팽이를 달여 먹고서 큰 효과를 보았다. 그걸 그냥 볼 김영식이 아니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던 그의 머리에 달팽이가 또렷하게 들어와 박혔던 것이다.
새끼 달팽이를 개인에게 분양한 다음, 크게 자란 뒤에는 다시 사들여 식당과 레스토랑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걸 본 다른 사업자들이 마구잡이로 달팽이를 분양해 놓고 달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분양된 달팽이는 죄다 천호식품으로 몰려왔다. 누가 분양한 달팽이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다 받아 주었더니, 회사에 달팽이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때 김영식 회장은 달팽이를 엑기스로 만들어 파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음식재료가 아니라 건강식품으로 판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런 걸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만큼 달팽이 엑기스는 대중에게 생소했고 판매량이 미미했다. 잘 팔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생산은 계속 했지만 그만큼 재고는 쌓여만 갔다. 집을 옮기고, 그것도 모자라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했고, 나중에는 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했다. 달팽이가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꿈까지 꾸었다. 달팽이가 그를 말려 죽이려 하고 있었다.
막다른 길에서 김영식 회장은 가게를 내고, 길 가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열심히 달팽이의 효능을 설명했다. 입에서 불이 나도록 떠들어 대자 서서히 판매가 오르고, 대리점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방송을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갔다. KBS<6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적격이라는 생각에, 담당 PD를 만나 취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쉽사리 채택되지 않았다. 방송 관계자들을 죄다 만나고 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는 전략을 바꾸어 장기전으로 나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국에 들러 “안녕하세요. 달팽이, 인사하고 갑니다.”하고 얼굴을 비추었던 것이다. 방송국 PD들은 처음에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하고 생각했으나, 그게 계속 이어지니까 점차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관계가 좀 친밀해지자, 김영식은 PD 들에게 달팽이 엑기스를 한 상자씩 선물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삶이, 자신의 어머니가 달팽이 엑기스로 당뇨에 큰 효과를 보자 달팽이를 방송 아이템으로 추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6개월 만에 달팽이가 방송을 타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달팽이 세상이 되었다. 회사에 전화가 폭주했던 것이다.
도망갈 구멍을 막고 뛰어들어라
김영식은 한 번 목표를 세우면,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달린다. 그가 성공을 열망할 때 하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것이다. 어쩌다 직원들이 퇴근해 텅 빈 공장에 들어서서는 “기계들아, 내가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폭풍우 속에서 “해내고야 말겠다.”고 소리치고 다니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미친 듯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외침이었다.
외환위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김영식 회장은 ‘통마늘진액’, 산수유환, ‘석류액’을 잇달아 내놓으며, 꾸준히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통마늘진액’을 내놓을 때는, 쉰다섯이나 되는 나이에 마라톤에 참가하고 자전거로 국토 종단을 하는 등 스스로 제품 효능을 입증해 보이는 홍보요원이 되어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는 뭐든 새로운 제품을 내놓게 되면 모든 힘을 집중했다. 알릴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제품을 알렸다. ‘팔지 못하면 죽는다.’라는 생각은, 바닥에 떨러져 있을 때만 하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에게, 지난날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실수는 없을 듯하다.
“나도 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몇 번 겪었다. 완전 무일푼으로 벼랑에 내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고 일어섰다. 그것은 오로지 전력투구의 힘 덕분이었다. 아예 도망갈 구멍을 없애 버리고, 그 일에서 승부를 내겠다는 신념 반 오기 반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해 얻은, 나름의 성과다. 어떤 분야든, 눈 딱 감고 6개월만 인생을 걸고 매달리면 안 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