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출 32장 19-29절
설교제목 : 주님 편에 서서
깨어진 돌판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가을 바람의 정취가 조석으로 부는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코로나의 답답함 속에서 이 한 해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결실을 거두는 이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백신접종을 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하며 되뇌였습니다. “코로나야! 같이 살자!” 고단한 코로나의 일상이지만, 이제 같이 살기로 결심해야 할 듯 합니다.
지난주 출애굽한 히브리 백성들은 아론을 추동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금송아지를 주님이라 부르며, 그 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며 즐겼습니다. 산 위에 있는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당황스런 소식을 듣습니다. 이 백성들이 내가 명한 길에서 빨리 벗어나 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며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어서 내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에서 친히 새긴 두 돌판을 주었습니다. 모세는 진에 가까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 쏘았을 것입니다.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는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던져서 깬 것은 백성들의 배신적이고 광적인 행동을 향한 분노의 표시입니다. 모세의 분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행위와 그릇된 행동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정동반응일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은 심리적 법칙에서 적합한 말입니다. 제대로 된 정서적 반응을 하지 못할 때 오히려 사태는 악화될 수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분노를 통한 정동반응은 에너지가 발산되고 주위에 영향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상태를 다시 원래 상태로 복원 혹은 질서를 가져옵니다. 모세는 이런 분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백성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다시금 질서가 재조정됩니다.
또한 돌 판을 던져 깨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주님으로 받드는 자들에게 그 돌판은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이자 준행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 아무짝에 쓸모없는 그저 글자이고 돌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시적 하나님과의 계약의 증거인 돌판은 충성으로 하나님과 계약관계 속에 있는 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금가루를 마시다
모세는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금가루가 탄 물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행동은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백성의 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금송아지를 빻은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게 했을까요?
금송아지를 빻아서 만든 가루를 먹는다는 것은 금송아지의 특성을 동화시키는 내용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그들이 경배하고 주님으로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동화시켜야 할 본능과 물질성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송아지가 지닌 본능적 충동과 금으로 숭배되는 금송아지의 물질성은 신으로 추앙받아서도 안되고, 그것을 억제하고 거부해서도 안됩니다. 이런 것들에게 대한 억제와 거부는 오히려 인간에게 더욱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정신적 조건을 형성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빻아 만든 가루를 물에 타서 책임적으로 동화시켜야 합니다. 현대인은 자신도 모르게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신으로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금송아지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먹는 행위는 우리에게도 유용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본능성과 물질성을 잘 동화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육적, 정신적 건강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금송아지 가루를 마시는 행위는 “흔적을 지움과 동시에 백성들이 그 참담한 기억을 몸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과거에 글을 겨루던 선비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도 글을 짓지 못하는 이들에게 먹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먹통’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먹물을 마신 사람은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며 절치부심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루가 된 우상을 물에 마신 이들은 그날의 부끄러움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이기석(2015) :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p377.] 내 실수와 아픔을 마시어 몸에 새긴다면 그러한 삶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삶을 더욱 온전하게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임전가
모세는 아론을 불러서 어떻게 백성들이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두었는냐고 말합니다. 아론의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모세에게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론은 자신의 잘못을 백성들 모두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아론의 변명은 구차하고 옹색해집니다.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 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변명이 길어지니 말도 안되는 소리로 모세에게 대꾸하고 있습니다. 모세에 이어 2인자로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책임을 백성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면 그 나라와 조직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잘못을 자꾸 누군가에 책임을 전가하면 관계도, 인생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 우리가 성숙해간다는 것은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라난다는 것은 기도와 말씀보면서 오직 영적인 것에만 매달린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적 수행은 자신의 무의식성을 짊어지고, 더불어 누군가의 짐을 함께 짊어지며 책임적 존재로의 변환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개성화된 존재로의 삶의 이행과정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회피하고 다른 이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래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모든 화살을 타자에게 돌립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은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내 탓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책임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아직도 문제가 네 탓이라는 마음이 든다면 우리는 아론의 모습을 기억하며 책임적 존재로서의 삶을 다시끔 곱씹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편에 서서
모세는 진 어귀에 서서 외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편에 설 사람은 나에게로 나오십시오.” 그러자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을 따르며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허리에 칼을 차고 이 금송아지 축제에 참여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 명령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친족과 친구와 이웃을 가리지 말고 찔러 죽이라고 합니다. 섬뜩하고 비정함이 느껴집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친족과 친구를 죽여야만 하는 싸움은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과 죽임은 우리 안에서 반드시 이행해야만 하는 원형적인 전투입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세계에서 가장 긴 대 서사입니다. 판두왕이 죽은 후에 벌어지는 일련에 왕권과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하바라타 안에 쿠루크세트라 들에서 벌어진 전투에 앞서서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대화가 서술된 것이 바가바드기타입니다. 1장에 보면 전쟁을 앞둔 아르주나의 고민이 등장합니다. 싸움할 상대를 보니 스승들,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아들들, 손자들까지 그리고 백숙부들, 장인들, 내외종형제들, 그 밖에 여러 친척들이었습니다(34). 그래서 내가 죽을지언정 그들을 죽일 수 없어서 싸울 수 없다(35)고 합니다. 그런 그의 갈등에 대하여 2장에서 크리슈나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싸우라고 독려합니다. 결정적으로 “네가 만일 이 정당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요 죄를 얻게 될 것이다”(33) [함석헌 주석(2016): 바가바드기타, 한길사, pp71-115] 싸움의 대상, 죽음과 삶에 대한 고민은 아르주나의 마음이 집착이고, 애욕이라 설명합니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싸움이고, 이 싸움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언명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동일하게 싸움에 참여한 레위인은 복을 받습니다.
이런 말씀은 실제적으로 비도덕적인 행태를 조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로부터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가바드키타에게 그들과 전쟁을 하여 죽여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죽임은 부모의 세계, 이미 익숙했던 기존적 가치나 무의식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부모, 친척, 형제의 세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인간이면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근원적인 전투이자 인간의 운명에 지워진 정당한 의무입니다.
모세는 주님 편에 선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이 싸움은 내가 추동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선 전투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자아가 아니라 자기Self 편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하는 잔인한 전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 편에 선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내가 동일시하고 의존했던 부모의 세계, 형제, 아내, 남편을 객관화하여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 편에 서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당한 싸움을 잘 해나갈 수 있는 우리의 인생 여정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