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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합쳐서 부르는 책 이름이다. 즉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하여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실록에는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의 주도로 편찬된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과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실록》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연산군 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와 같이 ‘일기’라고 한 것도 있지만, 그 체제나 성격은 다른 실록들과 똑같다. 대부분 왕대마다 1종의 실록을 편찬하였지만, 《선조실록》《현종실록》《경종실록》은 만족스럽지 않은 면이 있다고 하여 후에 수정(修正) 혹은 개수(改修)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광해군일기》는 인쇄되지 못한 정초본 (正草本: 鼎足山本)과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이 함께 전하는데, 중초본에는 최종적으로 산삭한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 |||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한 간본(刊本)으로 되어 있지만, 정족산본(鼎足山本)의 초기 실록 및 두 본의
한편, 북한의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이용하여 1975년부터 1991년까지 국역사업을 추진하여 총 400책의 국역실록을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일본으로 가져간 오대산본 실록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잔존본 74책 가운데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경대학 종합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실록의 편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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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그러면 여기서 사고에 대해 알아보자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하였던 기본 자료들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초와 중초 등은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초(洗草)되었다. 세초는 조선초기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하여 사초 등의 자료를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 담구어 씻어 내고 재활용한데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부터 종이의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세초는 대부분 소각처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성된 실록은 특별히 건축 관리되는 사고(史庫)에 비장하였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3년에 한번씩 꺼내어 포쇄(暴灑)하였다. 이때에도 전임 사관 1인이 파견되어 일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포쇄의 과정에서도 실록의 내용이 공개되거나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조선시대의 실록은 오랫동안 심산유곡의 격리된 사고에 비장되었고,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는 국왕이나 대신들도 사사로이 열람할 수 없었으며, 오직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로만 활용되었다. 실록을 고증할 필요가 있을 때는 특별히 사관을 사고에 파견하여 현안과 관련된 부분만을 등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실록은 당대 정치의 잘잘못과 왕과 신하들의 선악·간위(奸僞) 등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그 편찬과 관리가 이처럼 엄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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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의 실록은 모두 병화(兵火)에 소실되었다. 다행히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전주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에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
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모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내장산 이란 이름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옮긴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즉 깊숙히 감추는곳이라는 뜻이다. 국가에서도 하지못했던 일을 전주의 선비 안의와 손흥록이 사재를 털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기록문화유산으로 남아 후손들이 역사를 알게 된것이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아름답다고 한다.
전주사고 담장
예종 태실비
대나무 숲길이 정말 아름답다.
전주사고 좌측의 건물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첫댓글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목숨걸고 지키신분들이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