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안 parksa58@daum.net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제티엔커피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문예사조』 시, 『시조시학』 시조, 『한국동시조』 신인상 수상
시조집 『새 백악기의 꿈』, 『마음 첩첩 꽃비』
동시조 『풍선껌』. 『지구여행』
사)담양문인협회 회장 역임, 사)재능시낭송협회 광주지회장 역임
사)한국예총 담양 지회장
<수상 소감>
시의 언저리를 서성거린 지 근 40년입니다. 시를 썼다기보다 시를 읽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게 시는 밥 짓는 아궁이 앞이었습니다. 잠깐이라도 쭈그려 앉아 있으면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 냄새와 솔솔 피어오르는 김 그리고 아랫자락 앞자락 후듯후듯 데워주는 잉걸,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는 허기를 채워주진 못해도 허기를 잊게는 해주었던 거죠. 시 쓰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시 읽는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즐겨 씁니다. 고뿔 걸린 이가 숨 고르느라 외려 숨결을 거스르듯, 재채기처럼 기침처럼 몸부림한 흔적으로 몇 권의 시집과 동시조집이 있고 과분한 문학상도 몇 번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초보입니다. 백지에 검은 점을 하나 찍으려는 그 순간부터 저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처음 일어서듯, 처음 걸음 떼듯 뒤뚱거릴 때 앞에는 늘 물안개가 혼몽합니다. 그 혼몽과 미망의 순간이 어쩌면 열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혼몽의 손을 잡고 미망의 어깨에 기대어, 아직까지 서성거립니다. 이제 수필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칠십이 코앞인데 욕심을 내보는 것은, 몇 번 아팠고 몇 번 넘어진 경험으로 남도 구성진 판소리 한 자락 부르고 싶은 열망 비슷한 것입니다.
<수상작>
노랑나비 되어 오소서
돌담 골목길로 들어서면 지금도 하얀 모시 저고리와 옥색 치마 입고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어머님의 봄날은 제 기억의 필름에선 어제인 듯 생생하기만 하답니다. 나지막한 두런거림과 고운 눈 흘김, 차마 그립다고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년은 씨엄씨 부려 먹는 벱도 여러 가지여, 참말로 여러 갈래랑게.”
고무통에 뜨거운 물 부어놓고 손주들 죄다 씻기고 나서, 이리 와라, 소리치곤 며느리 등까지 밀어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어찌 잊히겠어요.
“나 죽으면 묏등 가서 도와달라고 할 거냐?”
거듭 눈 흘기시던 어느 겨울날, 그날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시를 썼을 것이며 찻살림을 한다고 동분서주할 수 있었겠어요. 설레발치며 나들이에서 돌아오면 어린 손자 업고 다정다정 빚어놓은 찐빵을, 김이 솔솔 오르는 따끈한 그 빵을 쟁반에 차려주셨지요. 뭣하다 아기 어미가 이제서 돌아오냐고 역정 한번 내시지 않아서 더 죄송스러웠답니다. 삼수를 하고도 운전면허에 떨어져서 의기소침 터벅터벅 걸어들어오니까, 어머니는 제 등을 두드리며 응원해 주셨지요.
“늦공부하느라 애쓰는구나. 다시 한번 해보면 되겄지. 상심 마라.”
어머님이야 환하게 웃으셨지만, 그 미소 속에 깃든 안쓰러움을 제가 왜 몰랐겠어요.
결혼 전 처음 인사 갔을 때도 어머니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셨지요.
“허리가 한 주먹인데 애기나 놓겠냐?”
큰형님이 그때 그러셨지요.
“어머니, 걱정 마셔요. 엉덩이가 큰께 아는 잘 낳겠어요.”
어찌나 부끄럽던지 저는 고개를 못 들고 무릎 꿇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담양으로 내려와 둘째와 셋째를 낳고 아이들만 돌보는 데도 쩔쩔매는 저를 어느 봄날 어머님은 부르셨지요. 그날 어머니와 마주앉은 마루에는 유독 햇볕이 순하게 들어앉았던 것을 기억해요.
“에미야,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살거라. 모질게 돈만 벌어도 잘 산 것도 없더라.”
어머니, 어린 나이에 시집와 층층시하 시집살이 고되셨지요. 시누이와 시동생, 시고모와 시부님 대가족의 의식을 다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확독에 보리 갈아서 밥 짓고, 어르신들 옷은 밤새워 등잔불 아래서 손바느질로 다 지어 드렸다.”
말씀은 그리하셨으나 늘 미소를 지으시니 회한 같은 건 없어 보이셨어요. 어떤 운명도 그저 순응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인생에서 꾸밈보단 진실을, 화려함보다는 검박함을 귀히 여기셨지요.
“에미야, 나 죽으면 묏등 꾸민다고 꽃나무 심지 말거라!”
뜬금없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 당황한 제가 고개를 돌렸더니 뜨락의 영산홍이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더군요.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요즘 며칠 봄볕이 무척이나 화창하네요. 눈만 감으면 부쩍 어머니 산소가 환하게 보입니다. 아무래도 연분홍 영산홍 한 그루 심어드려야겠어요. 영산홍이 어머니 닮은 미소를 짓지 않겠어요. 사랑이 충만한 미소를 어디 가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혹 어머니가 노랑나비 되어 훨훨 날아오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못난 며느리 마음이 또 분주해집니다.
<심사평>
박지안의 「노랑나비 되어 오소서」
박일천
박지안이 응모한 작품 중에서 「노랑나비 되어 오소서」를 등단작으로 선정한다. 이 작품은 화자가 어머님의 봄날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움을 담아 글을 쓸 때 어린 시절 어머니를 회상한다. 하지만 화자는 시어머니에 대한 정을 못 잊어 글을 써 내려간다. 돌담 골목길로 들어서면 하얀 모시 저고리와 옥색 치마 입고 환하게 웃고 계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고무통에 뜨거운 물 부어놓고 손주들 죄다 씻기고 나서, 이리 와라, 소리치곤 며느리 등까지 밀어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어찌 잊히겠어요.
“나 죽으면 묏등 가서 도와달라고 할 거냐?”
거듭 눈 흘기시던 어느 겨울날, 그날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시를 썼을 것이며 찻 살림을 한다고 동분서주할 수 있었겠어요. 설레발치며 나들이에서 돌아오면 어린 손자 업고 다정다정 빚어놓은 찐빵을, 김이 솔솔 오르는 따끈한 그 빵을 쟁반에 차려주셨지요. 뭣하다 아기 어미가 이제서 돌아오냐고 역정 한번 내시지 않아서 더 죄송스러웠답니다.
화자의 어머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어머니하고는 거리가 먼 손자와 며느리까지 챙기는 따뜻한 분이다. 글 서두에 나오는 골목길 돌아서면 하얀 모시 저고리와 옥색 치마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는 나의 어머니와 너무나 닮아서 친정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직장 생활로 바쁠 때 우리 집에 오셔서 손주들 보살피셨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 뒤 돌이켜보니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딸이 좋아하는 호박전을 부치고 겉절이 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아린 가슴을 달래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수필로 풀어내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화자도 시어머니가 따스한 찐빵을 쪄서 주는 모습을 떠올려 글로 쓰면서 애틋한 심정을 달랬으리라. 그래서 수필을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문학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박지안의 시어머니는 꼭 친정어머니처럼 며느리를 다정다감하게 챙겨주니 그 집에는 항상 웃음꽃이 활짝 피었으리라. 추억은 자신의 경험,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새롭게 재인식하여 정갈하게 기억하여 저장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 시어머니들이 화자의 어머님처럼 며느리를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면 이 세상 고부갈등은 없어지리라. 손주를 돌보는 것을 넘어서 며느리까지 친딸처럼 챙기는 시어머니 인간미는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이다. 화자의 어머님처럼 이타 정신이 많으면 이 세상은 얼마나 훈훈할까. 그런 어머님 행동을 저절로 몸에 익힌 박지안 작가도 세상을 다사로운 눈으로 보기에 시어머니의 좋은 점만 기억의 나이테에 새기는 것이 아닐까.
옛날 어머니들은 오로지 시부모와 남편, 자식과 손주까지 돌보느라 자기의 인생은 없었다. 하물며 화자의 어머님은 며느리까지 챙기는 헌신적인 삶이었다. 그래서 박지안 작가는 묘지에 영산홍이라도 심으면 시어머니가 노랑나비 되어 훨훨 날아오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다. 아재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다. 글을 번지르르하게 문장만 세련되게 쓴다고 수필가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고부간의 역사를 생생하고 담백하게 글로 풀어 내려가는 솜씨는 어느덧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지안 작가의 등단과 에세이스트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한다. 일상의 거미줄에서 빠져나와 틈틈이 글을 쓰는 순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생을 다시 조명하는 시간이다.
꾸준히 글 밭을 가꾸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글을 써주길 기대한다.
첫댓글 참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ᆢ연산홍 같은 시어머니 미소를 떠올리는 ᆢ고운 며느니 마음은 처음 보는 ❤️ 마음 입니다 ᆢ그 마음이 정말 곱습니다. 이쁩니다 ᆢ더 좋은 글을 기다려 봅니다 ᆢ감사합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