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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문(備禦文) : 외침방비론(外侵防備論)
2022.9.15. 여천 정철중
□ 해제(解題)
이 글은 호서(湖西)의 사학(邪學)과 세작(細作) 발언으로 보아 천주교탄압 사건 즉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과 1841년~1842년 아편전쟁을 언급하고 있으나, 1866년 병인양요와 1872년 신미양요 등이 기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작성 시기는 대략 1842년부터 1866년 사이인데, 1847년 충청수사를 지낸 정위(鄭瑋 1784~1848)공이 지은 한시집 「서래만영(西來謾詠)」의 글씨체이므로 1846년~1847년간의 글로 추정된다.
정위 공은 무과급제 후 압록강변의 구갈파진 권관, 추파만호, 강화도 인화보만호를 거쳐 남해안 진도군수, 압록강하류의 신도진수군첨사, 평안도 숙천부사, 임진강변 장단현감을 거쳐 압록강변 창성(昌城)에서 청북병마좌방어사를 재직한 후, 1847년 6월 24일 충청수사에 제수되셨는데, 전임수사가 매제(妹弟) 이민덕(李敏德, 1789~?)공이므로 상피(相避)에 해당되어 8월 16일자로 체직을 청하게 된다.
이 글은 전반부에, 요동(遼東)의 비적(匪賊) 발생원인과 이들의 침입을 막는 방안을 기술하고 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이나, 청나라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폐해 등 수많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들의 동진(東進)에 대하여 강계 등 서북 접경지역에서는 평상시 대비책을 세우고, 유사시 임기웅변 방안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동 비적의 침입은 중원(中原) 세력이 불안할 때 발생하는데, 요동에서 밀려나 우리나라로 침범하는 세 갈래 경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자성·우예·장진·북청(慈城·虞芮·長津·北靑) 경로로서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남하하여 미군의 함흥철수를 유발한 길이고, 둘째, 만포·백산·희천(滿浦·白山·凞川)을 지나는 길로서 영변을 통한 남하와, 셋째, 위원·운산·영변·안주(渭原·雲山·寧邊·安州)을 통한 길이다.
이외에 제4경로로서 가장 중요한 의주·선천·정주·안주·순안(義州·宣川·定州·安州·順安)를 거쳐 평양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 글에서는 청나라의 침입을 가정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양국 간 안정적인 외교나 국제정세로 당시 청나라의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청천강 돌파 시, 한성에 이르는 침공로(侵攻路)는 평양·황주·개경(平壤·黃州·開京)의 길과, 평양·상원·수안(平壤·祥原·遂安)에 이르는 관북대로(關北大路)를 제시하고 있다.
중반부는 이 당시 서구 열강의 바다를 통한 공격과 이양선의 출몰에 대한 경계와 공포심 까지도 엿볼 수 있다. 바야흐로 대륙의 서북 육로로부터의 침입 보다 서구 해양세력의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이는 서구열강의 침략은 중동의 아덴, 동남아의 스리랑카, 싱가포르, 필리핀 루손 섬에 미치고, 아편전쟁 등 청나라에 대한 공격 소식 까지 너무나 광범위하게 발생하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해군력과 대포의 위력에 대한 위기감도 묻어나고 있다. 오히려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 시기인지라, 왜국의 침입에 대한 걱정은 약간 비켜나 있다.
후반부는, 구체적으로 서구열강세력은 상해 앞바다 발해(渤海)에서 남해와 서해로 진입하는데, 군함의 규모와 화력의 차이가 크므로 침범 시 적을 육지로 깊숙이 끌어들여 해군의 위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지상에서 지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호남 호서지방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태안반도 안흥진(安興鎭)의 전략적 중요성, 최악의 경우, 경기도 수원·부평·인천(水原·富平·仁川) 및 황해도 해안 및 한강을 통한 공격에 대한 방어와 한양도성의 방어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비어문은 왕조의 묘당을 모셔 나라를 위하는 것은 평화로운 평시의 일인데, 유사시에는 공포에 빠져 용기가 부족하거나, 노하여 지혜가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탄식할 일이라고 유비무환을 강조하고 있다.
국력이 쇠잔하여 외세의 침략이 예견되는 풍전등화의 위기감을 맞아 이 비어문에서는 지형을 이용한 방어책과 비세(悲勢)의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 대하여 승리의 지략에 대한 고민을 살필 수 있다. 이 글은 군비증강 및 무기개발의 언급이 없는데, 정치가가 아닌 무장(武將)의 관점에서 주어진 환경하의 고육지책의 방어 전략을 고찰한 것이다.
< 본 문 >
1. 요동의 비적
大國興替(주1)非所逆覩而以大勢論之若失中原勢必東迸於遼潘(주2)徵索(주3)於我勢所不免也 若復撤歸寧古塔(주4)之時則遼西(주5)以北非但道路之艱險亦有猜疑之自生必泾鴨江而去然近來靉東匪類(주6)充斥(주7)滋蔓(주8)則又不敢從冷井(주9)之北而自昌城楚山(주10)之境迨 此時酬應措處恐難臨時辨備 又江邊匪類乘時猖狂之慮亦不無矣 夫江界自渭原楚山之間去遼地 不遇殷三百里而地方千里俗尙義勇 比來年豊以積聚 論之南中一道莫可等於此州 早時擇文武具備者(주11) 預爲屯田鍊率當其遼潘請粮求救之時隨變區劃足可辨也 其所便宜比諸南運北調(주12)功相萬也 設令淸人假道(주13)而覘我隙知我有備不敢生意歸去益速也 至於流民之犯越一切嚴飭則自無元末紅巾之患(주14)也 今論者或曰本州公私所儲之穀不下(주15)數十萬石而粜他境者 但熙川長津楚山厚州等路而近來西北連豐不得粜於他境之仂畜者夥然(주16)也 但今年西北告歉(주17)惟江界獨占稍登豈非偶然也㢤 不失此時使牧民知兵者行仁屯田敎義指方積粟養兵俟 有來時隨機應之無缺於事大恤憐之義得筭於爲國固圉之策且事變不一他日此州安知非唐之朔方乎
중국의 흥망성쇠를 거꾸로 볼 것만은 아니어서, 대세에 따라 이를 논하자면 중원이 힘을 잃으면 반드시 동쪽의 요동 땅으로 쫓겨나 우리나라 땅을 내 놓으라 요구함을 피할 수 없다. 만약에 다시 철수하여 영고탑으로 물러날 때에도, 요서 이북은 비단 도로가 간험할 뿐 아니라 자생하기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니 반드시 압록강을 지나가게 된다.
근래에도 동쪽의 비적 떼들이 어른거리고 점점 널리 늘어나고 있으나 냉정 이북 지역은 얼씬거리지 못하고 있다. 창성(昌城)·초산(楚山)의 경계로부터 그 영향이 미친다. 이때의 요구에 대한 조처는 임시로 단단히 방비하여도 심히 어렵다. 또 강변으로부터 비적 떼가 올라와 미쳐 날뛸 우려 역시 없지 않다. 저 강계(江界)는 위원(渭原)과 초산 사이에서 멀고 요(遼)의 땅으로 가는 길목이다. 불우하게 은나라로부터 삼 백리다. 사방 천리는 일찍이 의용(義勇)을 숭상하고 비교적 요즈음 풍년이 들어 풍족함을 쌓았다. 말하자면 이 지방은 남쪽의 한 개 도(道)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 없지만. 일찍부터 문무를 구비한 자를 택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미리 둔전하고 장졸을 단련하고 요동이 식량의 구제를 요청하여 올 때 지역의 변동에 따라 족히 변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변통하는 바는 모두 남에서 운반하여 북을 헤아리는 것보다 편리하니, 그 공은 상호 다대한 것이다. 설령 청인가도(淸人假道)로 우리나라의 틈을 엿보더라도 우리의 방비가 있음을 알면 감히 뜻을 못 이루고 철수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유랑민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에는 일절 엄히 경고하여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의 환란 같은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본주(本州:강계)가 공사(公私)간에 비축한 곡식이 수십만 석에 달하여 타 지방에 내다판다고 말한다. 희천(熙川)·장진(長津)·초산(楚山)·후주(厚州) 방면 등 근래 서북지방이 연달아 풍년이 들어 부득이 타 지방에 팔고 적지 않은 곡식을 비축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금년에 서북에 흉년이 들었는데 유독 강계만이 수확이 늘었다니 어찌 이런 우연이 있는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병법을 아는 목민관을 시켜 인(仁)을 행하고 둔전(屯田)은 의(義)를 본받도록 하며, 비축군량을 쌓고 양병하여 기다렸다가 때가 오면 형세에 응하여 아무 흠결이 없도록 하며, 백성을 구휼하여 ‘의(義)’를 얻고, 나라를 굳게 지켜 위국하는 일을 도모하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사세가 변화함은 한결같지가 않으니 후일 이 지방이 어찌 당나라(중국)의 북방이 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주1) 흥체(興替) : 성쇠(盛衰)
주2) 요반(遼潘) : 요동
주3) 징색(徵索) : (세금(稅金)이나 셋돈 따위를)내라고 요구(要求)함.
주4) 영고탑(寧古塔) : 여진족(女眞族) 본거지. 춘추전국시대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
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
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다.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정사(正史)에 기록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었는데, 기록에 나오는 영고탑 위치도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현재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와 해림시(海林市)에 속하는 지역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의 일부 지역을 가리킨다. 청나라 초기에 한족(漢族) 사대부로서 영고탑으로 유배된
오조건(吳兆騫)의 아들 오진신(吳振臣)이 쓴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서는 금나라 아골타(阿骨打 :금나라 개국 황제)가
기병한 곳으로 여섯 형제가 여섯 개의 주요한 마을을 이루어서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금의 아골타가 기병
한 곳으로 비록 탑이란 이름을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탑이 없다. 청조가 일어난 발원지는 현재의 흑룡강성의 영고탑이 아
닌 요령성 신빈현 소자하(蘇子河) 상류 일대이다.
회경개시 : 1406년(태종 6)에 경성·경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고 여진인에게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 때 이들은 우마(牛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조선으로부터 소금·철 등을 바꿔갔으며 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병자호란 뒤 1638년(인조 16) 영고탑(寧古塔) 사람들이 청나라 호부(戶部)의 표문(票文)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를 무역해 가면서 회령개시가 재개되었다. 만주동북의 변민(邊民)은 일상 생활용품을 이곳에서 조달하다시피 하였다. 주로 영고탑·오라(烏喇) 지방의 상인이 모여들었다. |
주5) 요서(遼西) : 요동·요서는 요수(遼水) 즉 요하(遼河 라오허)을 경계로 나뉜다. 이 요수의 동쪽이 요동인데 만주지역으로 고조
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다.
주6) 비류(匪類) 비도(匪徒) : 무기(武器)를 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해(害)치거나 재물(財物)을 빼앗는 무리
주7) 충척(充斥) : 1 많은 사람이 그득함. 2 그득한 것이 퍼져서 넓음.
주8) 자만(滋蔓) : 점점 늘어서 퍼짐
주9) 냉정(冷井) : 평안북도 남서부의 청천강 하류지방 북쪽 골짜기의 우물. 평안북도 운전군 원서리(과거 정주군 마산면, 냉정
리)의 동북쪽 백벽산과 원통산 사이에 있는 마을. (조선향토대백과, 2008. 평화문제연구소)
주10) 창성·초산(昌城·楚山) : 두 지역은 압록강 수풍댐이 건설되어 수몰된 지역이 많다. 창성은 조선시대 광해군조에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강홍립 도원수로 하여금 일만 오천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 정벌을 떠나 도강했던 곳이다. 창성에 청북병마좌
방어사를 강계(江界)에 청북병마우방어사를 두었다. 초산은 한국전쟁 때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지역이다.
주11) 택문무구비자(擇文武具備者) : 재난이나, 소요 등이 있는 지역을 무마할 수 있는 적임자를 특별히 뽑아 보내는 것을 택차
(擇差)라고 한다. 강계부(江界府)는 지방관으로서 방어사를 겸하는 주요 변지(邊地)이므로 외교적 능력도 겸비한 문과 출
신이 제수되곤 했다.
주12) 남운북조(南運北調) : 남쪽 지방에서 식량 물자를 운반하여 북쪽 지방을 구제하다.
주13) 청인가도(淸人假道) : 임진왜란 때, 정명가도(征明假道)와 상응하는 어귀로, 청나라가 비적을 토벌하기 위해 길을 빌려는
것이다.
주14) 홍건지환(紅巾之患) : 14세기 원나라 말기 정치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고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반원 운동. 중심 세력은 백
련교도들로 머리에 붉은 띠를 매었기 때문에 홍건적(또는 紅頭賊)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 군대에게 쫓겨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1362년 고려 공민왕
은 복주(福州 안동) 까지 피란하고,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하여 물리쳤다.
주15) 불하(不下) : 1 무엇보다 못하지 아니함. 2 모자라지 아니함. 3 항복하지 아니함.
주16) 과연(夥然) : 매우 많은 모양(模樣)
주17) 고렴(告歉) : 흉년의 소식
2. 비적의 침입경로
靉東匪類跋扈之意已有年矣 尙未生意(주18)者盖在於兩國之間也 萬一淸事多艱至於鞭不及腹之時則彼之投隙恐在十分於我也 彼自厚州沿江西南之昌城等地密邇屈强然渡江之路只有三處 一自慈城虞芮王長津北淸(주19)也 一自滿浦由白山向凞川也 一自渭原達雲山寧邊然料敵之事本不出乎 理外適必以厚州之溪澗險仄(주20)動費日月畏北淸(주19) 先有備必不由此路也 雲山之路彼若沿江六七百里之下憚我先覺 又欲自魚川(주21)而价川中有狗嶺楸嶺(주22)之險又憚我守地也 欲犯寧邊則堅城在前安州(주23)之援不遠 彼若曠日持久情見勢屈且去柵門呼吸相望之間慮有挾攻之憂則彼雖至愚必不由也 滿浦之路彼以迃直之計晨夜渡江出界之兆卽指柔院(주24)一枝侵凞川一枝逼寧遠*若有扶順天陽德以北勢難支吾平壤亦隨此而扈也 彼若乘平壤之路直來向谷山新溪等地去畿輔不遠㝡憂者也 又自寧遠東出定平卽不過百餘里之地而在北靑南數百里則有關北之險阻(주25)更無枳碍 江黃兩省守備單虛 若當此時雖智者難善其後矣 使知兵者預守凞川任其方略狗揪 無犾踰之患(주26)白山設殲賊之策 寧邊坐守定平應機 是設穽待獸之義庶可輔西北(주27)保障
어렴풋이 동쪽 비적 떼들이 성하여 발호할 기미가 이미 여러 해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생각이 없는 것은 대개 양국에 만연되어있다. 만일 청나라 상황이 어려움이 많아 채찍질이 미치지 못할 때, 즉 저들이 틈을 타서 가해오는 위협은 십분 아국에 상존한다.
저들이 후주에서 강안을 따라 서남의 창성(昌城) 등지로 몰래 가까이 방향을 돌릴 것이 명백한데 도강하는 길은 오직 세 곳이다. 제일은 자성(慈城)·우예(虞芮)·장진(長津)·북청(北靑)에 이르는 길이고, 제이는 만포(滿浦)·백산(白山)을 지나 희천(凞川)으로 통하는 길이요, 제삼은 위원(渭原)에서 운산(雲山)·영변(寧邊)에 이르는 길로, 적의 일을 헤아려보면 본래 일어나기 어렵다.
이치로 보면 외적들은 후주(厚州)의 계곡이 험하고 좁아 움직이는 일수가 많이 소요되어 북청(北靑) 길을 꺼려하므로 미리 준비하면 반드시 이 길은 지나지는 않을 것이다. 운산(雲山) 길은 저들이 강 연안으로 육칠백 리를 따라 내려가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 어천(魚川)과 개천(价川) 중간에 구령(狗嶺)·추령(楸嶺)이 험하여 꺼리는 곳이므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곳이다.
영변(寧邊)을 침범한다면 성을 굳건히 하고 안주(安州)가 바로 앞에 있어 지원받기에 멀지 않은 곳이다. 저들이 헛되이 시간을 보내며 오래 버티어 정황을 엿보다, 잠깐 책문(柵門)으로 가 호흡을 고르며 관망하다가는 협공 받을 우려가 있은즉, 비록 저들이 어리석어도 반드시 이 길을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포(滿浦)의 길은 비적이 우회계책을 써서 심야에 도강하여 경계를 침범할 조짐이 있는바, 유원(柔院)에서 한 무리는 희천(凞川)으로 한 무리는 영원(寧遠)으로 내려올 수 있다. 만약 북쪽 적의 세력이 순천(順天)·양덕(陽德)에 있어 막기 어렵다면, 우리 평양은 즉시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 저들이 평양의 길을 직접 타고 곡산(谷山)·신계(新溪) 등지로 오면 경기 지방(畿輔)이 멀지 않고 가장 우려되는 일이다. 또 영원(寧遠)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정평(定平)인데 불과 백 여리에 북청(北靑)이 있다. 남쪽으로 수 백리는 관북으로 오는 험지가 있어 막는 데는 장애가 없다. 강원과 황해로 가는 데는 수비는 외롭고 허술하다. 만약 이러한 때는 비록 지자(智者)라도 매우 난감하여 그 후를 잘 대처하기가 어렵다.
병법을 잘 아는 자로 하여금 미리 그에게 구령(狗嶺)과 추령(楸嶺)을 지키는 방략을 맡겨 희천(凞川)을 굳게 지키고, 백산(白山)에서는 적을 섬멸하는 방책을 써서 적유령의 패배가 없도록 해야 한다. 영변(寧邊)에서는 기다려 지키고 정평(定平)에서는 형세를 살피는 전략을 써야한다. 이는 함정을 만들어 적을 기다리는 설정대수(設穽待獸)의 뜻으로 가히 경기 서북을 보장하는 것이다.
주18) 생의(生意) 생심(生心) : 하려는 생각을 냄. 또는 그런 생각.
주19) 북청(北淸) : 함경도 북청(北靑)이 바르다.
주20) 험측(險仄) : 지세가 험하고 가파름
주21) 어천(魚川) : 평안도 영변에 있다. 역(驛)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어천도(魚泉道)의 중심 역이었다. 동쪽 육십 리에 영변이 있
다.
주22) 구령·추령(狗嶺·楸嶺) : 구령은 백산(白山)의 서쪽 고개로 위원(渭源)에서 내려오는 고개이고 추령은 희천(熙川)의 서쪽에
있다.
주23) 안주(安州) : 평안도병마절도사의 병영(兵營)이 소재한 곳이다. 희천·영변에서 오는 길과 의주에서 오는 길이 합쳐지는 전
략상 요충지로 청천강을 북쪽으로 접하고 있다.
주24) 유원(柔院) : 평안도 희천(熙川) 소재
주25) 험조(險阻) : 1 지세(地勢)가 높고 가파르며 험하여 막히고 끊어져 있음. 2 사람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부딪치게 되는 어
려운 일.
주26) 적유령(狄踰嶺) : 강계와 희천 중간에 백산(白山)이라는 큰 산이 있는데 적유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백산의 서쪽은
위원에서 희천으로 오는 길의 구령이 있다.
평안북도 희천군(지금의 자강도 동신군) 동창면과 강계군 화경면(지금의 전천군) 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963m. 적유령산맥의 백산(白山, 1,875m)과 증봉(甑峰, 1.258m)간의 안부에 위치한다. 남북방향의 고개로 남쪽사면은 명당진(明堂津)에서 분기하는 청천강의 상류 백산천(白山川)의 깊은 계곡으로 이어지고, 북쪽사면은 독로강(禿魯江)의 상류 이만(梨滿)에서 분기하는 계곡으로 연결된다. 이 고개는 적유령산맥으로 격리된 청천강 유역과 자강고원(慈江高原)을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특히 청천강 상류지역과 자강고원의 남부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며 부근의 강계는 목재·산삼의 집산지이고, 흑연의 산지가 많다. 또한 분지의 중심을 이루는 희천에서는 좋은 명주를 산출한다. |
주27) 보서북(輔西北) : 경기 서북지방. 도읍 부근의 땅을 기보(畿輔, 畿内)라 하였다.
***州平時處必由之路故論者以爲要衝今之勢與古**唐之時自遼東欲抵平壤故渡江必先於義州則 瀋陽在義州之北四百餘里 假令淸人當搶攘(주28)之時欲歸寧古塔應自渭朔之境不失一步之道而去矣 豈可南走義州回達千里之地而轉向東土然則彼此設有相競之事 此州斷無受兵之慮但得名於春秋經術(주29)者主之善處 事變多沒間牒(주30)也
安州壓在滻水(주31)之東宣川東林寧邊鐵甕南北布列自是重關然 義州無緩急之警雲山小橫逸之冠則遊兵(주32)上下所在接應而已重厚勤幹者莅之使土兵(주33)恳田(주34)於義龍宣鐵沿海空地則一年之內可具數萬穀於塞上矣 平壤據形勝且無西衝之憂使廉明威德者處之謹備箕城(주35)以北東渡之敵而道內沿海之地多有空棄 募兵恳田隨處積峙(주36)
而己黃州前朝時都城在於開城故西來必爭之地而今則不然自本州去京城三百餘里而前有洞仙靑石之天險敵若知其州之難越必自祥原遂安之路取關北大路(주37)卽來其時使伊川激遏鐵原依險黃州斷歸路而松京之兵出積城(주38)之右敵必成擒矣 然黃州一面海也 長山(주39)之北椒島以南無異樣船之出沒者亦可控制(주40)也
*** 의주는 이곳을 반드시 경유해야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논자들은 지금의 적들에게도 요충일 뿐 아니라, 옛적의 수당(隋唐) 때에도, 요동으로부터 평양(平壤)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의주(義州)에서 반드시 도강을 하여야 했다. 심양(瀋陽)은 의주에서 서북으로 사백여리 되는데, 가령 청인들이 내부 문제로 영고탑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위원(渭原)·삭주(朔州)의 땅을 한 발자국의 길도 걸어갈 수 없도록 잃지 말아야 한다. 어찌 남진하여 의주(義州)에 도달해 천리의 땅으로 동쪽을 향하도록 피차간 서로 다투는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이 고을(此州)에서 끊어서 무단으로 적병을 들이는 우환을 끊어야 한다. 다만 춘추경술(春秋經術)로 이름을 얻은 자의 출입은 선처하고, 사변이 나면 왕래(간첩 間牒)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안주(安州)는 산수(滻水:청천강)가 막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선천(宣川)·동림(東林)·영변의 철옹성(寧邊 鐵甕)이 남북으로 줄을 지어(布列) 있어 관문이 중첩되어 있다. 의주(義州)가 응원이 없는 위급지경이면 운산(雲山)은 안심할 수 없는 횡일지관(小橫逸之冠)이 되므로 남북으로 유병(遊兵:게릴라)이 접응하여야 한다.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重厚勤幹者)은 이에 임하여 지방군에게 의주(義州)·용천(龍川)·선천(宣川)·철산(鐵山)의 연해(沿海) 공지의 농사일을 맡김으로써 일 년간 국경지방에 수만 석의 곡식을 비축할 수 있다. 평양(平壤)은 기댈만한 지세가 뛰어난 곳이고 또 서쪽에서의 침범을 우려할 바 없으므로, 청렴하고 덕 있는 사람이 기성(箕城:평양) 북동쪽에서 건너오는 적을 성실히 방비하도록 하여야 한다. 도내 연해의 땅은 다수 공터로 버려져 있는데 병졸을 모집하여 농사짓게 하여 곳곳에 군량을 많이 쌓아야 한다.
황주(黃州)는 고려 때 도성을 개성(開城)에 두었으므로 서쪽에서 적이 오면 반드시 다투는 곳이다. 지금은 즉 그러지 아니하나, 황주로부터 경성이 3백리이다. 앞에는 동선령(洞仙嶺)과 청석(靑石)의 험한 지형이 있어 적이 황주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상원(祥原)에서 수안(遂安)에 이르는 관북대로(關北大路)를 택할 것이다. 이때에는 이천(伊川)에서 격퇴하고 철원(鐵原)의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고 황주(黃州)에서는 퇴로를 끊고 개성의 병력은 출병하여 적성(積城)의 우측에서 적을 사로잡아야 한다. 황주(黃州)의 한쪽 면은 바다이다. 장산(長山:장산곶) 북쪽의 초도(椒島) 이남 까지는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 없으므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주28) 창양(搶攘) : 몹시 혼란(混亂)하고 수선스러움
주29) 춘추경술(春秋經術) : ‘춘추’는 공자(孔子)가 엮은 것으로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11권이며, ‘경술’은 경서(經
書)에 관(關)한 학술(學術)을 말한다.
주30) 간첩(間牒) : 양국 간 오가는 공문·서신
주31) 산수(滻水) : 청천강, 살수(薩水)로 알려져 있다.
평안북도 희천군 석립산(石立山) 북서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평안북도의 남부를 남서로 흘러 황해로 흘러드는 강. 총 길이는 약 199㎞이다. 희천 남부에서 희천강(熙川江)과 합류하고 묘향산맥과 적유령산맥 사이를 지나 영변 남쪽에서 구룡강(九龍江)과 합류한다. 이 강은 하류에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안주·박천의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이곳을 살수(薩水)라고 불렀으며, 수나라 양제의 100만 대군이 침략하여 왔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크게 승리한 곳이기도 하다. |
주32) 유병(遊兵) (유군)遊軍 : 유격(遊擊)하는 임무를 맡은 군대. 게릴라
주33) 중후근간자(重厚勤幹者) : 감사, 병사, 지역 수령 및 장수 * 중후 : 태도(態度)가 점잖고 마음씨가 너그러움.
* 근간 : 부지런하고 성실(誠實)함
주33) 토병(土兵) : 본시 그 땅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 가운데서 뽑은 군사(軍士).
주34) 간전(恳田) : 땅에서 농사짓다
주35) 기성(箕城) : ①평양(平壤)의 다른 명칭. ②전라도 영광군(靈光郡)의 다른 명칭. ③전라도 함풍현(咸豊縣)의 다른 명칭. ④
경상도 평해군(平海郡)의 다른 명칭.
주36) 적치(積峙) : 높직하게 겹쳐 쌓음.
주37) 관북대로(關北大路) : 평양에서 황주를 거치지 않고 기보에 접근하는 경로로 관북대로가 있다. 평양-상원-수안-신계(新溪:
옛 수곡성)-금천-개성-파주(또는 신계-토산-적성-파주)로 이르는 길이다.
주38) 적성(積城) : 파주의 적성과 인접 연천의 마전(麻田)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 설인귀 장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고, 한국전쟁 때 역시 격전이 벌어졌다.
주39) 장산(長山) :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海岸面 : 현 황해남도 용연군) 서단에서 황해로 돌출한 곶. 장산곶은 길이 21㎞, 너비 7
㎞이며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다. 도(道)의 중앙을 횡단하는 산맥이 서쪽으로 길게 뻗쳐 황해 연안에 돌출한 첨단부(尖端
部)이다. 조선시대 아랑포영(阿郎浦營)과 조니포진(助泥浦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치된 국방상 요지였다. 장산곶 앞
바다에는 백령도(白翎島)와 대청도(大靑島), 소청도(小靑島)가 있다. 심청전의 배경이 된 임당수도 장산곶 앞바다이다.
주40) 공제(控制) : 마술(馬術)에서 고삐를 잡아당기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일.
< 지도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한국학자료포털, 동여도 >
■ : 관문(關門), 산성(山城)
* 녹색 부분 : 정위(鄭瑋) 공 변지(邊地) 재직 처
* 1번 경로는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침입 및 미군의 북한정부 피난처인 강계에 대한 북진 경로이다. 창성 경로는 광해군 때 후
금정벌을 위한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 도원수와 김응서 장군이 도강하였던 곳이며, 4번 경로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수
많은 대륙 발 침입 경로이다.
3. 서구열강과 대외정세
我國雖三面阻海古昔以來不見外國人之來泊近則異樣船出沒亦一氣數也 西洋諸國英佛㝡强性且無厭周環瀛海(주41)所到之處初以利誘終乃戚怵* 自嘉慶(주42)以來通洋之各國一未有保全者如西印度之亞丁(주43)南印度之錫蘭(주44)呂宋(주45)之一皮一令(주46) 廣東之臺灣許浦頭之地失廣大地之域通洋之日國隨而危卽擧天下所共知然而四海之內皆通貨焉 行赦教焉 至於楛敗及而不敢拒絶者特畏其枝之巧而礮之威因循(주47)姑息(주48)終受其毒 此何異於腹朽扝而呑烏喙(주49)哉 人非不知呑烏喙則******爲目前之計豈不大加傷心處乎 六國(주50)之割地******智士千古之恨此非前車之戒(주51)也
今則洋募已*勢在交與絶之間交通之日卽禍國 難言之日先賢每挍攷斥異端者或恐斯民淪於禽獸之域也 今若許和其學毒流後世無論智愚其見易於射準而豈以目前苟安忽國家之大計乎 旣不與交則勢將若兵而 言者皆曰日本之强悍中國之廣大亦不能當 況我國之單弱何能相持(주52)乎 此自㥘之言若應之曰蘇錄之地(주53)不過三百里而處南海洋人必由之路而終始戒備屢破洋船 安南(주54)以﨑嶇數千里之地 南拒東誘(주55) 數百年來數受洋人殆萬計洋人莫敢誰何 此亦强悍廣大而然乎 言者其有辭乎 天下之患莫大於引誘失義而成敗在於擇人得地勢之如何
우리나라는 비록 삼면이 바다에 막혀 옛 부터 외국인이 도래하여 가까이 정박함을 볼 수 없었고 이양선 출몰은 운에 맡길 정도였다. 서양제국 영국, 불란서는 최강(㝡强性)이고 주변 큰 바다에서 막을 수가 없다. 처음에 도착한 곳에서는 이권으로 유도하여 물러나도록 하였으나 근심스럽고 두렵다. ****
가경(嘉慶) 이래로 서양 각국과 통교하였으나 마치 서인도(西印度)의 아정(亞丁:아덴)과 남인도(南印度)의 석란(錫蘭:실론), 여송(呂宋島:루손섬)의 한 곳(一皮一令)도 보전된 곳이 없다. 광동(廣東)의 대만(臺灣)이 항구를 허가하였는데 그 곳은 광대한 지역을 잃었고 통상을 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위험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나 세계가 모두 교역하고 사교(赦教)하였다. 쓰라리게 패배하여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특히 그 기술이 두렵다. 대포의 위협으로 인하여 임시방편으로 내키지는 않으나 결국 그 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이 어찌 독약인 오훼(烏喙:초오)를 삼켜 배를 썩히(腹朽扝)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은 오훼를 삼킨다는 뜻을 모른다. 우리******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 있으니 어찌 상심이 더 커지지 않겠는가! 여섯 나라가 땅을 나누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천고의 한이니 이전에 실패한 일과는 다르다.
현재 서양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어 거절하여도 통교하는 날에도 나라에 화가 미치니 이를 말하기 어려우므로 선현들을 매양 견주어 헤아려보고, 이단자는 명백히 물리쳐야 한다고 하였다. 혹 백성들이 금수의 무리에게 빠지는 것도 두려워해야 한다 했다. 지금 만약 그들 학문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여 그 독이 후세에 퍼지면 지식인이든 우매한 자를 불문하고 따르고 본받을 것을 쉽게 볼 터인데, 어찌 목전의 구차함으로서 백년지계를 소홀히 한단 말인가! 기왕에 교류하지 않은 것은 외세가 장차 군사에 미치는 바가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본은 강하고 사나우며 중국은 광대한데도 역시 당할 수 없었는데, 황차 우리나라 같이 약한 나라가 어찌 의견을 관철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겁에 질려 이들에 응한다는 말과 같은데, 소록(蘇錄之地:수루)은 불과 삼 백리이고 남해 곳곳은 양인(洋人)이 필히 지나가는 길이므로 결국 매양 경계 준비하고 더러는 양선을 격파해야 하는 것이다. 안남(安南)까지는 험하고 수 천리 되는 땅이다. 남쪽은 막고 동쪽은 달래야 한다. 수백년래 양인이 발 들이는 것은 만계(萬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어서 양인은 어느 누구라도 안 된다. 이 서양세력은 광대하고 사납기는 마찬가지이다. 천하의 우환을 달리 살펴보면 유혹에 넘어가 의를 잃음(引誘失義)이 막대하다. 성패는 누구를 택하고 어느 세력을 얻느냐에 있다.
주41) 영해(瀛海) : 큰 바다
주42) 가경(嘉慶) : 청(淸)나라 인종(仁宗) 때 연호(年號). 1796년부터 1820년까지
주43) 아정(亞丁) : 아덴(aden). 중동 아라비아반도의 예멘에 있는 항구(港口) 도시(都市)
주44) 석란(錫蘭) : 실론(Ceylon)의 음역어(音譯語). 스리랑카의 옛 이름
주45) 여송도(呂宋島) : 필리핀 루손(Luzon) 섬, 1802년 3월 루손 섬 사람 흑인 5명이 제주에 표착하여 1809년 6월에 본국에 송
환되었다.
주46) 일피일령(一皮一令) : 가죽 한 장. ‘어느 작은 지역 까지도’의 뜻
주47) 인순(因循) : 1 머뭇거리고 선뜻 내키지 않음. 2 낡은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함.
주48) 고식(姑息) : 글자가 보이지 않는데, 문맥을 살펴 ‘고(姑)’로 보충하여 ‘고식지계(姑息之計)’ 즉 임시방편으로의 뜻으로 추정
하였다.
주49) 오훼(烏喙) : ①초오두(草烏頭), ②천오두(川烏頭), 투구꽃. 오두(烏頭)는 모양이 까마귀 머리와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새의 부리와 같기 때문에 오훼(烏喙)라고 하는 것이다. 훼(喙)는 까마귀의 입이다. 쌍떡잎식물 미
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투구꽃이라고 불린다. 뿌리는 새발처럼 생기고 줄기는 곧게 선다. 잎은
어긋나며 손바닥 모양으로 3~5개로 갈라진다. 각 갈래조각은 다시 갈라지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잎이 작아져서 전체가 3
개로 갈라진다. 관상용으로 심는다. 유독식물로서 뿌리에 강한 독이 있는데, 초오(草烏)라고 하며 약재로 쓴다.
주50) 육국(六國) :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서강열국
주51) 전거지계(前車之戒) : 앞서 실패한 일이 뒷날에 교훈이 됨
주52) 상지(相持) : 서로 자기(自己)의 의견(意見)을 고집(固執)하고 양보(讓步)하지 않음.
주53) 소록지지(蘇錄之地) : 중국 유기백과(維氣百科)에 의하면, ‘소록소단국(蘇祿蘇丹國: Sulu)’은 1405년 건립되어 1915년 미국
에 병탄되었는데, 필리핀 남쪽과 보르네오 동북쪽지역을 통치했다. 삼 백리는 거리를 잘못 표기한듯하다.
주54) 안남(安南) : 인도(印度)-차이나(china) 동쪽의 한 지방(地方). 또는 이곳에 세워진 베트남인(Vietnam人)의 국가(國家)를 이
르기도 함.
주55) 남거동유(南拒東誘) : 남쪽은 서양세력, 동쪽은 일본
4. 양이(洋夷)의 침입 예상경로
耳紅夷(주56)之天下以大礟驕誇張於平原易地以終不得志於鄂羅斯(주57)者以有高山峻嶺重重疊疊也 我東錐小山水稠疊陣無百里之場車難百輛之列則胡之馬馳聘 猶難洋之礟擡放何施 彼無弓矢 手中長技只爲半尺短鏡銃(주58)其致不及三十步之遠且步武不及於傾仄之地 其實(주59)天下之弱寇 我國昇平(주60)日久武備弛廢(주61) 京外軍士雖未諳坐作進退之節制 至於禦此據險守要抱岩依石發致遠之器械 雖愚婦駭童足可用也 若水戰則彼大我小難可抵當然下陸之後淸野(주62)守險彼豈能運粮於數萬里之外而決難必之勝乎 如是數年我有固圉之良策彼絶窺窬(주63)之奸計則東海之朝鮮(주64)卽南海之安南五百年禮義之邦亦無愧於天下矣 彼之求市未知早晩而雖設埠頭於東南之海 畔禍機必先發於湖南湖西(주65)之間 彼若循嶺左而來非但鳥竹嶺之難越步本不利費歲月 至於行船雖發自東萊不過半月已泊湖西之境******而取短於陸乎 兵法奪其所憂則聽之者******也
듣기에, 서양인의 침범 시(紅夷之天下)에는 대포를 사용하였으므로 평지의 땅을 쉬운 곳(易地)으로 교만하게 과장하여 보았으나, 러시아(鄂羅斯)는 높은 산과 준령이 중첩되어 끝내 굴복시킬 수 없었다. 우리 해동(我東)은 험한 산과 물이 겹겹이 포개져 진을 치고 있으며, 백 리 되는 곳이 없으므로 수레는 백량이 늘어서기 힘든 즉 북방 오랑캐의 말이 지나가기 쉽다. 오히려 서양의 포대(礟擡)를 어떻게 쫒아내는가는 더욱 어렵다. 저들은 궁수는 없고, 수중에 아주 우수한 무기가 있는데, 다만 반 척의 권총은 불과 삼십 보의 거리에 미치지 못하고 또 보병의 무기는 경사진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실제로는 가장 약한 외적이다.
우리나라가 평화로운 기간이 오래되었고 군대의 준비상황은 피폐해졌다. 한양 밖의 군대는 비록 깨닫지 못하여 앉아서 진퇴를 절제하고, 방어함에 있어서는 험지에 은거하여 지키고 돌을 장착하여 포석을 멀리 발사하는 기계(器械 투석기)에 의존한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부녀자 아동(愚婦駭童)이라도 족히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수전(水戰)을 한다면 저들은 배가 크고 우리는 작아서 방어하기 어렵다. 적들은 상륙한 후에는 들판을 비우고 험지를 지키도록 한다면 저들이 어찌 수만리 밖으로 운량(運粮)할 것인가? 틀림없이 이기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 해 우리나라는 국경을 굳게 지키는 방책(良策)을 세워 외적이 틈을 엿보는 간계를 차단해 왔다. 동해의 조선(朝鮮), 남해건너 안남(安南)은 오백년 예의지국(禮義之邦)이고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저들이 요구하는 도시를 조만(早晩)간 알 수는 없으나 비록 동남부 바다에 부두를 설치하더라도 재앙이 일어나면 반드시 호남과 충청도(湖西)에 우선 발생할 것이다. 저들이 만약 영남의 좌측을 돌아오는 것은 조령·죽령(鳥竹嶺)을 걸어서 넘기 어렵고 날짜가 지체되어 본래 불리하다. 배를 타고 이동하면 비록 동래(東萊)로부터 출발하더라도 보름 불과하여 이미 충청도에 이른다. *** 육지의 짧은 길을 택하게 된다. 병법에 우환이 되는 곳을 빼앗으면 이를 다스리는 자가 된다. ****
주56) 홍이(紅夷) : 1604년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투할 때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붉은 머리를 한 오랑
캐)'라고 불렀고, 이때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하던 대포인 컬버린을 ‘홍이포(紅夷砲)’라 부르게 되었다. 네덜란드와 싸울 당
시 중국인들은 이 대포의 파괴력에 크게 압도되어 1618년에 이를 수입하였고 1621년에는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 홍이지침(紅夷之侵), 홍이지천하(紅夷之天下) : 아편전쟁 이전의 서구열강의 침략
주57) 악라사(鄂羅斯) : 러시아
주58) 반척단경총(半尺短鏡銃) : 손안의 무기로서 반 척(15cm)의 권총
주59) 기실(其實) : 1 실제(實際)의 사정(事情). 2 실제(實際)에 있어서
주60) 승평(昇平) : 나라가 태평(太平)함.
주61) 이폐(弛廢) : 이완(弛緩)되고 황폐(荒廢)해짐.
주62) 청야(淸野) : 적의 침입 시, 보급을 끊고자, 침입 예상로의 가옥, 사람, 가축, 곡식 등을 철수하여 비워두는 것
◼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견고(堅固)히 지키고, 들의 작물(作物)을 거두거나 가옥(家屋)을 철거(撤去)하여 쳐들어오는 적(敵)에게 양식(糧食)이나 쉴 곳의 편의(便宜)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優勢)한 적에 대(對)한 작전(作戰) 수단(手段)을 말함 |
주63) 규유(窺窬) : 틈을 엿봄
주64) 동해지조선(東海之朝鮮) : 서구 열강이 침략하고 있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
주65) 호남호서(湖南湖西) : 현재의 금강을 호강(湖江)이라 불러, 호남은 전라도를, 호서는 충청도를 말한다. 충청도 보령의 충청
수사를 호서수군절도사라고 불렀다.
紅夷之侵他國(주66)每多沿海之邊雖下陸不深入於數百里之險者 非但技長於水亦惜其所愛(주67)而然矣 彼之戰爭於東南諸國與本洋隣國界者所謂挾板船(주68)可用卒五百餘人而非水深三十丈不得行 故彼雖有忿怒之處所發之船不過十隻者 非特數萬里外事多不逮亦*於船路之難均 道光(주69)年中濘波之戰(주70)必欲甘心中原而所來之船只八隻也 近者彼益掂婆羅(주71)以西新波(주72)以東 雖勢力比前梢勝(주73)然所來之船不得過於此矣 來泊於大洋之中出船中所藏小艇數十駕而蟻附(주74)於岸人皆不量 其元額(주75)之如斯而憚船隻之多也 彼之移船下陸雖或得勝 宜不敢深入者 船守旣空虛恐人斷其歸 欲連綴於首尾則所來之兵元不過萬人 分合俱爲掣肘(주76) 故每狼顧梟視遠不移船則卽其所愛者(주77)在此故也
홍이지침(紅夷之侵) 때, 타국 군함은 연해변에 많이 있었는데, 비록 상륙하였더라도 수 백리 깊은 험지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비단 바다에서는 기량이 출중하였으나 그 물을 애용하는 전략으론 애석한 일이다. 저들이 동남제국과 서양 인접국과 전쟁을 치를 때 이른바 협판선(挾板船)은 병사 오백여명이 승선했고 수심이 삼십 장이 넘지 않으면 운항이 불가능하였다. 그런 연유로 저들은 비록 분노하게 하는 곳이라도 나서는 병선은 십 척에 불과했다. 특별할 것도 없이 수만리 밖의 일이 많아도 지체가 없었고, 역시 항로가 어렵거나 쉽거나 무관하였다.
도광 연간의 영파전쟁(아편전쟁) 때 중원을 침범할 욕심이 있었으나 침범한 배는 단지 8척이었다. 근자에 저들은 파라(婆羅:보르네오) 서쪽, 신파(新波;싱가폴) 동쪽(以東)을 더욱 겨냥하고 있다. 그 세력은 전에 비하여 줄어들고 들어오는 군함도 이전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대양에 출범한 배 중에 소장한 작은 함선 수십 척에 들어와 정박하고, 해안에 사람이 개미떼처럼 붙어 모두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본디 수효가 이와 같고 배의 척수가 많아 두렵다. 저들이 배를 떠나 상륙하여 혹 승리를 하여도 감히 깊숙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배를 지키는 것이 어렵고 귀로를 차단당함이 두렵기 때문이다. 선수와 선미를 연철한즉 침입병력을 나누고 합쳐도 1만 명에 불과하여 모두 나누고 합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매양 서양 오랑캐가 사나워도 멀리 보아 배를 떠나지 않는 이유인 즉 본선을 떠나지 않음(其所愛者)은 여기에 있다.
주66) 타국(他國) : 서양의 군함
주67) 석기소애(惜其所愛) : 군함은 장거리 포격에 장기가 있으나, 육지에 상륙할 수가 없으므로 이를 애용할 수 없음이 유감이
다.
주68) 협판선(挾板船) : 널빤지로 만든 목선
주69) 도광(道光) : 청나라 선종(宣宗) 연호, 1821~1850년
주70) 영파지전(濘波之戰) : 1839년의 아편전쟁(阿片戰爭), 1차 광동대전 시 영국군 병력 4천명, 군함 14척, 1841년 영파전쟁 시
병력 1만 명과 증기선 14척이 침입하여 청나라의 피해가 막심하였으며, 1842년 난징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파와
난징이 개방되었다.
주71) 파라(婆羅) : 보르네오 섬
주72) 신포(新波) : 싱가포르(新加坡)
주73) 초승(梢勝) : (정도(程度)ㆍ역량(力量) 따위가) 조금 나옴
주74) 의부(蟻附) : 개미떼처럼 달라붙음. 개미떼처럼 한 마음으로 장수(將帥)에 복종함
주75) 원액(元額) : 본디의 수효(數爻)나 분량(分量)
주76) 철주(掣肘) : 「팔 굽을 당긴다.」는 뜻으로, 간섭(干涉)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함
주77) 기소애자(其所愛者) : 배를 떠나지 않는 것
彼之窺窬未知的然而假論受兵之處則湖西洪州在十之三畿內南水富仁(주78)在十之七 彼若自洪州下陸初頭之勢難可抵遏則新昌天安之間或不無受其害而待其深入之後使水營搗其海中扳船安興焚其擊岸小舟 淸州之兵邀前勿戰公州之卒中間奪據海美之卒依險斷路 可謂失水之魚(주79)出穴之鼠 此不勞而坐斃其敵也 若水原高浪津南陽諸夫島之水深可容其船則彼益喜國都之不遠且幸扳船之近岸利小艇之出沒便近仁富也 來則必由於此如是南陽之東如水原之西南廣州之險要預爲備戎庶無萬一之失也 險要各處邑鎭多備弓弩可具後日之用
저들이 엿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가령 병력이 침투하는 곳을 말하면 그 곳은 충청도의 홍주(洪州 홍성)가 십 분의 삼이요, 경기 남부의 수부인(水富仁:수원·부평·인천)이 십 분의 칠이다. 저들이 만약 홍주에 상륙한다면 초기의 기세를 신창(新昌)과 천안(天安) 사이에서 막아내기 어렵고 그 피해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깊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수영(水營)으로 하여금 바다에서 판선(扳船)을 공격하여 (태안반도) 안흥(安興)에서 불사르고, 해안의 작은 배를 격퇴하도록 하여야 한다. 청주(淸州)의 병력은 마주치기 전에는 전투를 하지 말며, 공주(公州)의 병졸은 급습하여 그 근거지를 빼앗고 해미(海美) 지역의 군사는 험지를 이용해 길을 끊으면, 가히 ‘물을 벗어난 물고기요, 구멍을 나온 쥐(失水之魚出穴之鼠)’의 형국이 될 터인즉 이는 ‘불로소득으로 앉아서 그 적을 격퇴하게 되는 것(坐斃其敵)’이다.
만약 수원(水原)·고량진(高浪津)·남양(南陽)·제부도(諸夫島)의 물이 깊어 병선을 쓸 수 있다면, 저들은 국도(國都)가 멀지 않으므로 더욱 기뻐할 것이다. 또 요행히 판선(扳船)은 가까운 연안에서 작은 선박을 보내는데 유리하므로 편히 인천·부평에 접근할 수 있다. 적선이 온다면 반드시 이 지역을 지날 것이므로 이는 남양(南陽)의 동쪽이고 수원(水原)의 서남쪽이므로 광주(廣州)의 험한 요새를 미리 방비하여 막으면 만일의 패배는 없다. 험요 각처의 읍과 군진은 궁노(弓弩)를 많이 준비하고 갖추어 후일 사용토록 해야 한다.
주78) 수부인(水富仁) : 수원, 부평, 인천
주79) 실수지어(失水之魚)·여어실수(如魚失水) : 물고기가 물을 잃음과 같다는 뜻으로, 곤궁한 사람이 의지할 곳이 없이 괴로워
함을 비유하는 말
耳近來邪學(주80)大熾(주81)於西湖間云或不無我國之人爲細作(주82)於彼而必曰我國弛武無備 雖下陸深入無所爲忌迨 此時我暗暗約束歸其計取之豈非兵家所謂仍敵而制勝者乎 江華之京城卽海路砥柱而彼若從渤海之口(주83)向東北而來可抵洪州外煙於靑之間水營(주84)足爲關隘然回坐海口甚非形勝之地 安興(주85)扼三南(주86)之吭(주87)可謂用武之地 雖斗入(주88)海曲如江淮(주89)之盱眙 數萬之士莫可以歲月破者 其城北高出三南潮水起落敵 若乘船而攻則有淺閣之慮以馬步而來則有潮起之患眞南方保障之地 若所任失人則非但安興之有失自平薪(주90)一葦可達於江華無安興是無江華~~~乘舟之敵又自西海直指黃海道界則必先甕津長淵等地而去江華之北不過一航之間也 喬桐(주91)西北諸島必擇可堪者別備器械(주92)嚴以防之則彼於北求戰不得於陸計無所施 此兵家之所謂以長擊短不戰而屈人之兵是也
요즘 들리는 말은 서호(西湖 : 충청도 서부)에는 사학(邪學)이 크게 성행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저들의 세작(細作)질을 한다고 한다. 국방이 느슨하고 방비가 없다고도 말한다. 비록 적들이 배에서 상륙하여 깊이 침범해도 꺼릴 바가 없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암암리에 약속하는 계책을 취하면 이 어찌 병가에서 말하는 소위 ‘적의 의도를 간파하여 이기는 것(仍敵而制勝者)’이 아니겠는가!
강화도는 경성으로 향하는 해로를 지키는 기둥과 같다. 저들이 발해(渤海)의 입구에서 동북으로 향하여 내도하면 홍주·외연도(外煙)·어청도(於靑) 사이에서 막고 수영은 족히 좁은 관문을 막고 바다입구를 향해 돌아앉으면 가히 형승지지이다. 안흥(安興:태안반도)은 삼남의 목을 쥐고 있는 곳(扼三南之吭)으로서 가히 무력을 사용할 곳이다. 비록 산세가 툭 튀어나와 바다의 굴곡을 이룬 것은 마치 강회(江淮)를 보는 듯하나, 수만의 군사도 가히 오랜 기간이 걸려도 깨뜨릴 수 없다. 안흥성 북쪽은 높고 남쪽 삼면으로 나오면 조수가 일어 적을 떨어뜨린다. 만약 배를 타고 공격하면 얕은 바다에 갇힐 천합지려(淺閤之慮)가 있고 기마병과 보병으로 공격하면 조수의 우려가 있으므로 진실로 남쪽을 지키는 요지이다.
만약 지휘 장수가 패하게 되면 안흥이 무너질뿐더러 순식간에 평신(平薪)으로부터 강화(江華)에 이를 것이니 안흥(安興)이 없으면 강화(江華)도 없다. *** 적이 배를 타고 서해로부터 황해도계까지 이르면 반드시 옹진(甕津)·장연(長淵) 등지로 오게 되며, 강화(江華) 북쪽까지는 불과 한 번에 건너는 ‘일항지간(一航之間)’이다. 교동(喬桐) 서북의 모든 섬은 감당할만한 자를 뽑아 포대를 준비하여 엄히 적을 막고, 북에서 적들이 교전해올 경우 상륙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 이는 병가에서 말하는 ‘장격단부전이굴인지병(長擊短不戰而屈人之兵)’으로 ‘오래 버티고 단기전은 피하며 적을 굴복시키는’ 방책이다.
주80) 사학(邪學) : 1 요사스럽고 간사(奸邪)한 학문, 못된 학설(學說). 2 조선시대에 주자학(朱子學)에 위배(違背)되는 학문(學問)
을 가리킨 말.
주81) 대치(大熾) : 기세(氣勢)가 버썩 성(盛)함.
주82) 세작(細作) :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을 지칭하는 듯, 1801년(순조 1)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선
교사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발생한 사건. 신유사옥이 발생하여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이 처형되고 정약용이 귀양 갔다.
주83) 발해지구(渤海之口) : 이 글에서 발해의 입구에서 동북으로 향하면 서해의 어연도, 어청도, 충청도 홍주에 이른다 하므로,
양자강 강구, 상해 앞 바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84) 수영(水營) : 보령 오천(鰲川)의 충청수영
주85) 안흥진(安興鎭)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程竹里)의 안흥성 내에 설치한 수군첨절제사 진영(鎭營)이다. 안흥진의
원류는(源流) 고려시대에 지금의 신진도(新津島)에 세워진 요아진(要兒鎭)으로, 이후 1467년(세종 12)에 소근진첨사(所斤
鎭僉使)의 파견대인 안흥량수(安興梁戌)가 1655년(효종 6) 안흥성 축조와 더불어 성내로 옮겨와 진영으로 독립함으로써
안흥진이 설치되었다. 안흥진의 군비 실태를 보면 첨사무종3품(武從三品)1명, 진방졸(鎭防卒)87명, 지고관(知鼓官)1명, 선
창대장(船倉代將)2명, 기패관(旗牌官)10명, 교사(敎師)2명, 포도관(捕盜官)4명, 훈도(訓導)2명, 화포교사(火砲敎師)2명, 군
졸(單卒)304명 그리고 거북선(龜船)1척, 병선 1척, 방선 1척, 사후선 3척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주86) 삼남(三南) : 충청·전라·경상도
주87) 액항(扼吭) : 목을 조름, 급소를 누르거나 요해지(要害地)를 점령함을 비유
주88) 두입(斗入) : 산세(山勢)가 유난스럽게 굽어 바다 쪽으로 쑥 들어간 형세(形勢).
주89) 강회(江淮) :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일대에 해당함.
주90) 평신(平薪) : 서산시 대산
주91)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지역으로 1172년(명종2)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1395년(태조4) 만호(萬戶)를 두고
지현사(知縣事)를 겸임시켰다가 뒤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629년(인조7) 부(府)로 승격시켜 그 수령을 수사(水使)가 겸
임하였다.
주92) 기계(器械) : 여기서는 포대(砲臺)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녹색 부분 : 정위(鄭瑋) 공 재직 처
都城當初築障(주93)時少有欠於守御規模也 今若自鞍峙慈山而南至石隅築石灰三物(주94)土城則城形如前朝時㚄駞橋外城之形城 雖無濠外城因爲牛馬之困內無外窺之峯而南漢從陸江都乘潮造相應援此天下 金陽興仁之東雖曰卑下前坪無非水田則攻具莫得 備列而步騎魚貫之行亦難着足 自城中先據枉尋里高壘守之可謂(주95)閼 與之北駱山東開啞門登高應枉尋里之聲援則 雖公輸班之巧難可其所攻之時矣 此大旣數件事卽 庙謨爲國平時常例則民不騷動而敵已制於無形無跡之中也 若遲回過時或恐有勇不及怒智不及謀之嘆也
한성 도성은 성곽을 쌓았을 때 방어하는 규모에 있어 약간 흠결이 있다. 이제 만약 안치(鞍峙)·자산(慈山)에서 남쪽으로 석우(石隅:여주)·축석(築石:의정부·포천 경계) 까지 회삼물(灰三物)로 바른 토성의 지형이 마치 고려시대의 곱사등 다리(체타교:㚄駞橋) 외성(外城)의 형상이다. 비록 해자로 싼 외성은 없으나 안으로는 우마가 지나기 어렵고 밖으로는 도성을 엿보는 산봉우리가 없고, 남쪽 한강은 육지를 두르고, 강화도(江都)는 조수가 있어 상응하여 응원하니 이는 천하지세다.
금양문(金陽門)·흥인지문의 동쪽은 코 아래 앞뜰이 물 논(水田)이 아닌바 없으므로 공격하여도 얻는 바 없고, 열 지어 행군하면 보병과 기병이 마른 물고기 꿴듯하니 역시 발붙이기 어렵다. 이에 성중에 우선 왕심리(枉尋里:왕십리) 고루(高壘)에 진치고 지키면 가히 막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북쪽 낙산(駱山), 동쪽의 개아문(開啞門)의 높은 곳에 올라 왕심리를 성원하여야 한다. 비록 수송하는 방안이 어렵기는 하나 그곳의 공격이 있는 때이니 어찌하겠는가!
이는 대개 여러 건의 일인즉 묘당을 모셔 나라를 위하는 것은 평시의 상례인데, 이는 백성은 소동이 없고 적이 이미 형세가 없이 제압되어 아무런 흔적이 없을 때 그러하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는데 지체되거나 혹여 공포에 빠져 용기가 부족하거나, 노하여 지혜가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탄식할 일이다.
주93) 축장(築障) : 성곽·방어선을 쌓다.
주94) 회삼물(灰三物) : 석회(石灰), 잔모래, 황토(黃土)의 세 가지를 한데 섞어 회곽묘 등에 쓰는 콘크리트
주95) 가위(可謂) : 거의 옳거나 좋다고 여길 만한 말로 이르자면, 「어떠어떠하다고(라고)할 만함.」을 이르는 말.
< 한성부 : 한국학자료포털, 동여도 >
3. 원본 사진
< 이하 생략 >
첫댓글 감사합니다.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의 고강도 군사작전 시행을 위한 전쟁 시나리오인 작계(Operation Plan, 작계5030, 작계5015 등)를 세워 운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매년 적의 침공에 대한 방어 시나리오인 을지연습을 시행하고 있다. 적어도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개념의 작전계획이 실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비어문이 국가 기밀사항으로 관리되었다면 이러한 개념이 될 것이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면 참으로 군사 지리학적인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할 것이다. 정위공의 변지이력과 군경력으로 볼 때, 전략적 지식을 가진 장군이다. 이러한 자료는 전쟁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