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TRA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은 지난 4월 한국 식품을 수입 유통하는 전문가를 초청, ‘러시아 식품 유통시장’을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비록 4월에 이뤄진 강연이지만, 여전히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라고 판단, 그 내용을 소개한다. 참고자료: 코트라 시장뉴스
러시아 유통시장은 소위 재래시장과 새로운 슈퍼마켓 체인으로 나눌 수 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러시아에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구소련의 마가진 Магазин 이라고 불렸던 국영 상점은 급격히 쇠퇴하고, 다양한 수입상품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자유시장인 재래시장 рынок 혹은 ярмарк 가 인기를 얻었다. 동시에 지하철 역과 버스 정류장 부근에는 작은 가판대인 키오스크 киоск 가 늘어났고, 아파트 주변에는 작은 식품점 Продукты 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재래시장은 한국의 전통 시장과 비슷하고, 키오스크 역시 서울 지하철역이나 도로변에 설치된 가판대와 다를 바 없다. 신문잡지 가판대, 식료품 가판대 등으로 대부분 특정 분야에 특화돼 있었다. 한때는 술과 담배 가판대가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 러시아 정부 당국의 술담배 판매 제한 정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아파트나 오피스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식품점은 소련 시절의 국영 마가진이 사유화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러시아에서 대형 슈퍼마켓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혼란했던 러시아가 안정을 되찾고, 국제 유가 상승으로 경기가 살아나면서 서구식 대형 유통체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대형 슈퍼마켓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
러시아 최초의 대형 유통체인은 터키 자본의 ‘람스토르’였다. 모스크바에 진출한 람스토르는 2006년까지 영업을 계속했으나, 후발주자인 프랑스계 ‘Auchan’, 러시아 토종 유통체인 그룹인 ‘X5’ 등에 인수되고 말았다. 이후 독일계 창고형 대형할인 유통체인인 ‘Cash n Carry METRO’가 러시아에 진출하면서 러시아 유통시장은 이제 무한경쟁 시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을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좁혀보면, 모스크바의 유력 유통체인이 진입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토종 ‘블라제르’라는 대형마트가 2002년에 등장했다. 이후 Fresh25, Remi, Samberi 등이 뒤를 이었다.
대형 유통체인의 등장으로 기존의 재래시장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쇼핑센터 торговый центр 이름으로 실내 공간으로 들어갔고, 10만 개 이상 난립했던 키오스크는 술담배 판매가 금지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러시아 유통시장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그에 따른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로 경기가 급격히 침체하면서 또 한번 변화를 겪었다. 당시 루블화 가치 급락에 소비자들의 구매력 감소로, 소비자들은 화려한 대형 유통체인보다 인터넷 쇼핑몰과 저가형 대형 창고 마트를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 쇼핑몰의 확산은 세계적인 현상이라, 굳이 러시아 유통시장 변혁에 포함시킬 이유는 낮지만, 여하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러시아 인터넷 쇼핑몰도 엄청난 수요자들을 끌여들었다. Data insight사에 따르면, 2018년 러시아 인터넷 쇼핑몰 시장 규모 추정치가 1조1500억 루블(23조원)에 달한다.
러시아 인터넷 쇼핑몰의 선두 주자는 중국의 알리바바 자회사인 Aliexpress(ru.aliexpress.com)와 러시아 토종 Ozon, 최대포탈 얀덱스의 얀덱스 마켓, 또 전국적인 오프라인 네트워크를 보유한 유통회사 DNS와 M-video 의 온라인 쇼핑몰등이 있다.
동시에 값싼 제품을 찾는 러시아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러시아식 대형 창고형 마트도 생겨났다. 이 매장에서는 샴푸라고 하면 XX 샴푸만 판매하는 'one item one brand' 전략으로 단가를 낮춘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스베토포르' Светафор Svetofor라는 유통체인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한국식품의 러시아 진출은 잘 알다시피, 1990년대 초 부산에 입항한 러시아 선원들이 한국 식료품을 사가기 시작하면서 부터. 즉석라면과 초코파이, 마요네즈로 상징되는 라면류, 제과류, 소스류가 주류를 이뤘다. 이후 보따리 상들이 서울과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커피프림 등 크리머류와 음료, 스낵 등도 러시아 시장에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인들이 수입회사를 세워 정식으로 한국 식품을 수입하기 시작했고, 서울과 부산에도 전문 수출기업이 등장했다. 매출이 증가하자 각 식품제조사들도 전문조직을 꾸려 본격적인 대러시아 수출에 나섰다. 대표적인 성공사례가 초코파이의 오리온과 도시락 라면의 팔도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경기가 살아나면서 기존의 인기 상품외에 마요네즈, 크리머, 밀키스 등 음료 제품들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때쯤 팔도 도시락(2004년)과 오리온 초코파이(2006년)는 러시아 내 현지 공장을 세웠다.
강연 참가자들은 한국 식품의 대러시아 시장 진출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 이유로 우선 유통구조가 계속 선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경우, 지역 유통체인인 레미와 삼베리가 꾸준히 매장을 확대 중이며 2019년 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에 최초로 등장한 대형 복합 쇼핑몰인 '칼리나 몰' 등에 한국식품이 진출할 기회가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식품유통에 10년 이상 종사한 K지사장은 러시아 유통시장이 선진화 된 계기로 2017년 상법 개정을 들었다. 2017년 상법 개정 전까지 러시아 유통시장에는 소위 ‘백 마진(Back Margin)’이 일반적이었다는 것. 백 마진이란 광고 선전비, 진열비, 가공 포장비 등의 명목으로 공급업체가 유통체인에 제품단가의 15% 내외의 웃돈을 주는 관행이다.
공급업체는 공급가에 미리 백 마진을 반영해 놓고 유통업체에 납품 후 결재금액에서 15% 내외를 떼어 다시 유통업체에 돌려줬다. 당연히 백 마진을 잘 주는 공급업체의 입김이 강했으며, 이런 업체들의 제품이 좋은 장소에 진열됐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실제 단가보다 비싼 가격에 상품을 구입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정부는 2017년 연방법 N273-FZ로 상법을 개정해 소위 '백 마진'이라고 하는 광고선전비는 최대 5%만 줄 수 있도록 하고, 회계에 합법적으로 반영토록 했다.
K 지사장은 “그후 러시아 유통시장에서 세를 과시했던 '백 마진 큰손'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소비자들은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물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강연 참가자들은 한국 식품이 여전히 러시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 식품 전시회’(Prod Expo 2019)에 참가했던 한 참가자는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식품은 이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CJ의 ‘비비고 만두’가 참가했는데 인기가 좋았다. 러시아식 만두인 뼬메니 시장도 석권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또 ‘하이트 라면’의 사례를 들면서 “기존에는 ‘하이트’라는 브랜드가 맥주로 꽤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라면에 붙여 기존 브랜드의 인지도를 활용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참가자들은 “한국 식품의 러시아 진출은 이미 30년 가까이 된 만큼 품질은 인정받고 있다”면서 “러시아 유통시장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제2, 제3의 초코파이, 도시락 라면을 히트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에 생산기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만 C 지사장은 “생산공장을 구축하기 전에 시장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면서 “공장은 시장이 가깝고 원료 수급이 원활한 지역으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처음부터 대규모 공장을 짓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면서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을 지어 원료 수급부터 제품 판매까지 테스트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