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명예는 물거품… 남는 건 믿음뿐”
김영명(55) 권사. 이렇게만 적어 놓으면 김 권사가 누구인지 알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앞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면 “아하, 그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 여사.’
현대가의 며느리, 현대중공업 대주주의 부인, 2남2녀의 어머니,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막내딸. 직업 외교관의 딸로 화려한 해외 생활을 했고 한국의 대표 부자이자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그녀였다. 훤칠한 키에 호감 가는 미인형 얼굴의 소유자. 그녀를 보면서 사람들은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천적인 관점에서 그녀는 다른 모든 믿음의 사람들과 동일한 삶을 살고 있다. 새벽기도 나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 말씀을 읽으며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중보하는 것 등 여느 평범한 신자들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
믿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모든 것 다 소유한 것 같은 김 권사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바로 답이 왔다 “믿음이지요. 오직 믿음.”
자신의 삶을 관통했던 것은 믿음이었으며 그 믿음만이 영원히 남는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시아버지인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이 10년전 이 땅을 떠날 때 그녀는 깨달았다. ‘결국 인간은 빈손으로 가는 것이구나. 그 많은 재물을 가져가지 못하는구나.’ 부친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은 2004년 식도암 수술을 받고 회복하지 못한 채 6개월 동안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별세했다. 그때 김 권사는 스러져가는 부친의 모습을 보며 그 화려한 명예도 물거품 같고 참으로 ‘풀은 마르고 꽃은 진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임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됐다.
김 권사는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김해성결교회를 세웠으며 할머니 조원통 권사는 남대문교회의 주축이었다. 자연적으로 집안에는 신앙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인생을 되돌아볼 때 ‘만일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 언제나 기도하시던 할머니야말로 신앙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저와 형제들이 이만큼 사는 것은 할머니가 뿌린 기도의 씨앗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5시까지 교회로 간다. 과거에는 서울 압구정동 소망교회를 다녔지만 정 의원이 서울 동작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한 이후에는 동작구내 여러 교회를 돌아가며 출석하고 있다.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가 정 집사(정몽준)와 김 권사를 동작구에 파송했다’면서 허락해 주셨어요. 고마운 일이지요.”
할머니는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로 시작되는 찬송을 늘 부르셨다. 그 찬송가는 지금도 김 권사 귓가에 맴돈다. “정말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 소망합니다. 저와 남편, 아이들, 더 나아가 이 사회와 민족이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편과의 만남, 그리고 시아버지
김 권사는 1978년 정 의원의 넷째 형수와 친분관계가 있었던 언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둘은 2년 사귄 뒤 결혼했다.
“5살 차이가 나서 처음에 대하기가 꽤 어려웠어요. 남편은 말수가 적었고 특히 여성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심하고 자상한 모습에 끌렸던 것 같아요. 남편은 겉으로 보기에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이 착한 사람입니다. 솔직하고 눈물도 잘 흘려요. 정이 많지요.”
김 권사는 이 대목에서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를 했다. “시아버님도 참 자상하셨습니다. 큰 사업을 하시면서도 집안일을 섬세히 챙기셨습니다. 저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어요. 그거 아세요? 시아버님이 임종하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그녀에 따르면 정 회장은 유교를 중시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열려 있었다. 정 회장은 동생들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다섯째 정신영이 독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신영의 부인 장정자 여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서울 정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동생이 죽은 후 과부가 된 장 여사를 생각하며 온 가족과 함께 정동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김 권사는 정 회장이 임종 전 당시 온누리교회 담임이었던 고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 목사님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셨어요. 자신이 병약했기에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마음이 컸습니다. 시아버님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함께 복음성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시아버님은 특히 복음성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즐겨 부르셨습니다. 참 소탈하신 분이셨습니다. 시어머님도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두 분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정 의원의 형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했을 때 온 가족이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말로 안타까운 비극이었습니다. ‘시숙님에게 믿음이 들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은 모든 역경을 돌파하게 하는 힘이잖아요. 현대가가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이 나라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아내, 그리고 꿈
정 의원은 1988년 울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울산에서 내리 5선을 했고, 서울 동작구에서 6선에 성공했다. 김 권사는 20년 넘게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왔다. 그 사이 정 의원은 대선에도 나갔다.
“제가 30대 초반에 남편은 초선의원이 됐습니다. 너무 어리다 보니 고민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하는 것이기에 따라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인의 아내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공인으로서 희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빚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우리의 가야 할 길이라면 반드시 가야 되는 것이겠지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손 안의 진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빚어주시는 대로 살아가야지요. 그리 생각하니 마음 편합니다.”
2002년 대선에서 정 의원은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선거 전날 결별을 선언했다. 그 선언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정몽준을 버린 것 같았습니다. 월드컵 성공의 환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앙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지를 철회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 이들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지방 모처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점차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정말로 기도에는 힘이 있어요. 좌절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신자에게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축복’이라는 역설적 말이 성립 되는 것 같아요.”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정 의원이 다시 대권에 도전하기를 원하십니까?” 답은 김 권사의 뜻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과 국민이 허락해주신다면 해야겠지요.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녀는 무엇보다도 남편과 자신, 가족들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뤄드리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권사에게서는 크리스천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솔직했고 인터뷰 내내 타인을 향한 깊은 배려가 돋보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그녀. 자신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드리려 하는 마음이 귀하다. 앞으로 더 큰 믿음의 행보를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