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수와 호칭
각자의 생활에 바쁜 현대인에게 명절은 모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그런데 즐겁고 뜻깊은 이 자리에서 촌수와 호칭을 헷갈리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 게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이라면 새롭게 형성된 가족관계는 너무도 어렵고 힘든 숙제다. 하지만 어렵게만 보이는 촌수와 호칭도 몇 가지 원칙만 기억하면 쉽다는 사실. 지금부터 가족관계도를 읽는 노하우를 익혀보자. #1. 평소 활달한 성격의 현미래 씨. 3년간 열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달콤한 신혼생활에 푹 젖어 있지만, 다가오는 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차례를 지낼 음식 마련은 어찌어찌 한다 해도 평소에 왕래가 드물던 먼 친척들까지 설을 맞이해 시댁으로 찾아올 텐데 촌수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말수 없고 얌전한 새댁’ 노릇만 하다가 와야 할지도 몰라 걱정이다.
#2. 여느 엄마들처럼 자녀교육에 열심인 주부 10년 차 고전미 씨. 평소에도 초등학생 두 자녀의 숙제를 도와주는 자상한 엄마다. 그런데 설을 앞두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내준 숙제를 보곤 아득해졌다. 탐구생활의 주제는 ‘일가친척 사이의 촌수와 올바른 호칭’을 조사하는 것. 늘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면서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봤지만 머쓱하니 딴청을 부린다. 식당 아줌마가 ‘이모’이고, 마트의 아르바이트 남학생이 ‘삼촌’인 줄 아는 아이들에게 자신도 잘 모르는 친척 사이의 호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설은 한가위와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로 꼽힌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설이 되면 집안 어른이 계신 집에는 평소 왕래가 뜸하던 먼 친척들까지도 세배를 드리러 오곤 한다. 4촌만 넘어가도 잘 모르는 게 요즘 세상. 이러니 어린 자녀가 찾아온 친척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슬그머니 다가와서 “엄마 근데 나와 어떻게 돼?”라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을 못해주고 “아빠의 가까운 친척이야”라고 얼버무리기 일쑤다.
4촌 형제들 얼굴 보기도 가물가물한 세상에서 이보다 먼 인척이라면 촌수 계산도 쉽사리 안 될 터이고, 당연히 호칭도 낯설다. 어쩌다 부모님 모시고 친척집 경조사라도 가게 되면 ‘대고모(大姑母)’ ‘재종숙부(再從叔父)’ ‘내재종숙(內再從叔)’ ‘외종숙(外從叔)’ 등 소개받는 친척에게 ‘네, 네’ 하며 건성으로 인사를 드릴 뿐 암호 같은 호칭 때문에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모르기 십상이다.
이번 설을 기회로 촌수와 호칭에 대해 한번쯤 알고 넘어가보자.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촌수와 호칭에도 원리가 있다. 이 원리만 알면 비교적 쉽게 촌수와 호칭을 이해할 수 있다.
촌수 계산, 민법에도 있다고? 제대로 된 호칭을 알려면 우선 촌수의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촌수는 ‘혈연적 거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호칭과는 구분된다. 세계의 다양한 친족호칭체계 중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친족 성원을 촌수로 따지고, 그것을 친족 호칭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촌수는 어느 친척이 나와 어떤 거리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제도다.
민법에서는 ‘배우자, 혈족 및 인척을 친족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혈족이란 직계존비속(직계혈족), 형제자매와 형제자매의 직계비속, 직계존속의 형제자매 및 그 형제자매의 직계비속(이상 방계혈족)을 말한다. 그리고 인척이란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를 말하며, 친족의 범위는 8촌 이내 혈족과 4촌 이내 인척, 배우자다.
호칭을 알기 전에 먼저 촌수부터 정리해보자.
할아버지가 나와 2촌이라고? 촌수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부부는 무촌이고, 부모자식 사이는 1촌, 형제자매 사이는 2촌’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나와 몇 촌인가? 조부모와 자신의 촌수를 묻는 질문에 성인의 대부분이 ‘2촌’이라고 답한다. ‘아버지와 내가 1촌 관계이니 그 윗대인 조부모는 당연히 2촌이겠지’라는 생각에서다. 그렇다면 증조, 고조 등 세대가 올라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민법의 친족 규정을 적용한다면 9대조 조상부터는 아예 ‘남’이 되는 모순이 생긴다.
직계혈족 간에는 촌수를 따지지 않는 게 맞다. 실제로도 촌수 대신 세(世)나 대(代)를 쓴다. 한 대가 올라갈수록 1촌을 더하는 촌수 계산법은 방계친족 간에 쓰는 것이지 직계혈족에게는 옳지 않다. 다만 방계혈족과의 촌수를 계산하기 위해 편의상 한 대마다 1촌씩 간주할 뿐이다. 형제자매 사이를 2촌으로 계산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따라서 할아버지와 나의 촌수는 2촌이 아니라 1촌이며, 이는 증조와 고조 등 대를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한편 촌수는 친족간 혈연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 만큼 핏줄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남남이 만나 이루어진 관계인 부부는 무촌이 되는 것이다.
삼촌도 삼촌, 이모와 고모도 삼촌? 촌수에 대해 대충 알아봤으니 친척 간에 부르는 호칭을 알아보자.
4촌 이내 친족들끼리의 호칭을 헷갈리는 경우는 대부분 없을 터다. 다만 무심코 범하기 쉬운 잘못된 호칭에 대해서만 짚어보겠다.
흔히 아버지의 손아래 형제나 어머니의 남자 형제를 ‘삼촌’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촌수는 혈연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니 ‘삼촌’이라는 것은 호칭이 아니라 ‘관계’를 뜻하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고모나 이모도 ‘삼촌’이 된다.
따라서 정확한 호칭은 아버지의 손위 형제이면 ‘큰아버지’나 ‘백부’, 손아래 형제면 ‘작은아버지’나 ‘숙부’라 칭해야 옳고, 엄마의 남자 형제는 ‘외숙부’라고 해야 한다. 다만 ‘삼촌’이라는 호칭이 너무 자주 사용되면서 이미 굳어졌기에 ‘아버지의 미혼 형제’나 어머니의 남자 형제(외삼촌)를 부를 때 관습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호칭공식: ‘종·재종·외’만 알면 호칭이 보인다 4촌을 벗어나게 되면 호칭 문제가 녹록지 않다. 그러나 수학공식처럼 호칭에도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종·재종·외’라는 공식만 알아두면 적어도 어떤 관계인지 몰라 당황할 일은 없어진다.
복잡한 친족관계에서 숙(叔)은 아저씨, 질(姪)은 조카를 뜻한다. 다만 ‘숙’의 경우 부계 쪽에서는 촌수의 대상보다 나이가 많으면 ‘백(伯)’이라 호칭한다.
아버지 형제의 자녀는 나와 4촌 형제인데, 다른 말로 ‘종형제’라고도 한다. 그리고 ‘재종’은 아버지 4촌 형제의 자녀와 나와의 사이, 즉 6촌 형제를 부르는 말이다. 8촌과 10촌으로 멀어지면 삼종형제, 사종형제가 된다.
윗대를 호칭할 때는 한 단계씩 앞당겨 종을 붙이면 된다. 3촌지간인 아버지의 형제를 ‘백부’나 ‘숙부’로 불렀으니, 아버지의 4촌 형제는 ‘종 백·숙부’, 6촌 형제는 ‘재종 백·숙부’, 8촌 형제는 ‘삼종 백·숙부’가 되는 것이다.
‘내’는 아버지의 여자 형제, 즉 고모 쪽에 붙는 호칭이다. 흔히 고모의 자녀와 나의 사이를 ‘고종사촌’이라고 하는데, 촌수에 맞는 호칭은 ‘내종사촌’이다. 앞서의 ‘종형제’에 ‘내재종형제’ ‘내삼종형제’처럼 ‘내’자를 붙이면 고모 쪽 호칭이 된다. 마찬가지로 윗대에 대한 호칭은 촌수에 따라 ‘내종숙’ ‘내재종숙’ 등으로 호칭한다. 다만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고모’라고 불렀듯 할아버지의 여자 형제는 내게 ‘대고모’가 되고, 증조할아버지의 여자 형제라면 ‘증대고모’가 된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외’는 어머니의 남자 형제 쪽에 붙는 호칭이다. 우리가 흔히 외사촌간이라고 부르는 외숙부의 자녀는 나와 ‘외종형제’이고, 앞서처럼 ‘외재종형제’ ‘외삼종형제’ 등으로 퍼져나간다. 다만 어머니와 자매관계인 경우 ‘이모’라고 부르듯 이모의 자녀와는 ‘이종형제’라고 한다.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윗대에는 촌수에 따라 ‘외종숙’ ‘외재종숙’이라 부른다.
실수하기 쉬운 가까운 사이의 호칭 예절
배우자 가족에 대한 호칭은 배우자를 기준으로 따진다. 배우자보다 항렬이 높은 가족은 나이와 상관없이 존대하는 것이 전통이다. 아내의 남자 형제는 ‘처남’이라고 부르는데, 아내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처남’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아내의 여자 형제 중 언니는 ‘처형’, 동생은 ‘처제’라 부르고, 형부가 나이 어린 처제에게 처음부터 말을 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결례다.
남자 형제 입장에서 남동생의 아내는 ‘제수’나 ‘계수’, 형의 아내는 형수, 여동생의 남편은 매부나 매제 혹은 ‘~서방’으로 부르면 무난하다. 누나의 남편은 원래 ‘자형’이 올바른 표현이지만 최근에는 매형, 매부가 더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동생을 삼촌으로 부르는 것도 잘못된 호칭이다. 미혼이면 ‘도련님’, 기혼이면 ‘서방님’이 제대로 된 호칭이다. 남편의 형은 결혼과 상관없이 ‘아주버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여자 형제의 경우 오빠의 아내는 나이가 어려도 ‘언니’이며 어색하면 ‘올케’라 해도 무방하다. 남동생의 아내는 ‘올케’ ‘자네’ 등으로 부른다. 다만 ‘연상연하 커플’이 늘어나다 보니 남동생의 아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도 종종 있다. 이때는 말은 높이되 호칭은 ‘올케’로 하는 것이 좋다. 역으로 남편의 누나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도 ‘형님’이라고 부르며 서로 존대하는 것이 좋다.
이 바쁜 세상에 촌수는 왜 따지고, 편하게 부르면 되지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알면서 친소 여부에 따라 친근하게도, 다소 경직되게도 부를 수 있는 것과 몰라서 예의에 벗어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듯, 호칭에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담겨 있으니 올바른 호칭 사용은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점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