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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의 꽃송이들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가는데, 나는 너에게 엽서를 쓴다. |
Postcard
Guillaume Apollinaire
I am writing from under the tent |
엽서
기욤 아폴리네르
여름 한 날이 기울었을 때, 저 요란한 포화는 |
이 시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이가 보낸 한 편의 엽서글이다. 엽서 한 장에 담긴 다섯 행의 짧은 문장은 전선(戰線)의 급박한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그러나 그 내용은 (砲火의 단어만 뺀다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평화롭고 여늬 연인의 사연처럼 사랑스럽다. 그런데 글월의 행간(行間)을 밝혀 다시 읽으면 이 엽서는 명분없는 전쟁에 끌려나온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엽서가 전하는 전쟁은 조국의 해방과 자유의 쟁취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애국시민의 거룩한 투쟁이 아니라, 지도자의 주사위놀음에 덧없이 생명을 바쳐야 하는 무모하고 참담한 전쟁이다. 그런 탓에 이 엽서의 핏빛 글에는 자신과 동료들을 죽음의 전장터로 내몬 국가권력과 적국의 지도자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다. 한 아비의 아들, 한 여인의 희망, 한 소녀의 아버지들이 정치명분과 영토야욕, 또는 종교적 이유로 들판과 고지에서 피를 흘렸다.
전쟁터에서 펜과 엽서를 꺼내어 연인에게 사연을 전하는 광경은 매우 절실하고 긴박하다. 총알이 빗발치는 긴박한 순간, 최후가 될지 모를 사랑의 고백과 안부의 인사를 전하는 이의 손은 떨리고 눈은 젖어온다. 한 청년의 생애와 존재가 어린 그 최후의 편지글은 그대로 한 편의 서정시가 되고 한 개의 묘비명이 된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5월 경, 김화(金化)지구에서 하사 이흥섭이 편지지 반 쪽에 급하게 답장을 써서 부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하사는 포탄의 파편에 맞아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그 보내지 못한 편지글이 50여 년 만에 발굴되어 2006년에 공개되었다. 글월은 옛 문체로 서둘러, 그러나 온 정성을 다해 쓰여졌다.
답 안해 전상서
세월은 여류하여 어언간 고향을 떠난지가 삼개月이 지나도록 고향집 내소식을 몰나 궁금하던 차애 편지를 밧듯서 방가이 여보니 父모님 양위(兩位)분 기체후 일량만강(氣體候 一向萬康)하옵고…언제나 충성을 다하여 조국애 평화가 도라오고 꿋꿋이 새로운 삼천만애 무궁화곳치 피면 고향을 도라가 운넌 낫츠로 서로 만나기를 바라오며…
이 사연은 전달되지 못하고 이하사의 상의 포켓에서 가족사진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하사의 숨이 멎은 후 시간은 정지되어 한 많은 육체가 썩고 정신마저 혼백으로 변했는데, 오직 한 장의 연서(戀書)만 영혼으로 남아 귀촉도(歸蜀道)처럼 울어 예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강산은 5천 년 역사동안 숱한 전투와 살육이 있었다. 그래서 초목마다 선인의 피가 어려 있고 흙과 돌마다 생명을 바친 이들의 얼이 묻어 있다. 한국전쟁 때에만 한국군,북한군,유엔군,중공군 합하여 17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였다. 그들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청춘과 생명을 바쳤다. 포성이 사라진 지 60년도 넘었건만 미욱한 정부는 최근에서야 국군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했다. 실종자와 납북자 조사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조국을 위해 몸바친 이들을 기리고 역사에 기억해야 하건만 아직 갈 길은 멀고 전쟁 미망인과 유가족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그리스 독립전쟁 때 산화(散華)한 전사자 명단이 적힌 비석
위 시로 다시 돌아가 본다. 주인공은 당당히 전선에 투입되어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은 공허했고 병사들은 마치 소모품처럼 희생되었다. 속절없이 하나 둘 죽어가는 전우들은 꽃송이가 바람에 떨어지듯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이성의 표상이라 일컫는 인간들이 졸렬한 구호와 무심한 진격나팔 소리에 죽고 죽이는 상황을 보고, 지식인인 주인공은 극심한 가치혼란과 존재의 회의에 빠졌다. 이미 주인공과 동료들은 전선의 수렁에 갇혀 개죽음을 당하거나 운좋으면 팔다리라도 다쳐 부상병으로 귀향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참전 용사의 눈과 그 글을 통해 명분없는 전쟁을 고발하고 있다.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수 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는 극심한 전투 현장에서 총알을 맞았으나 철모에 비껴 박힌 관계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전두엽에 손상이 와서 남은 생애동안 정신착란과 신경증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연인이자 화가였던 로랑생(Marie Laurencin:1885-1956)을 각박하게 대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연인 로랑생은 눈물로 삶을 보내며 평생 그를 원망했으나, 38년 후 시인의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폴리네르의 무덤
2차 세계대전 때만 하더라도 전선에는 휴머니즘이 흘렀고 그 명분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상대하여 싸우는 적이 명백했고 같은 민족이나 국민끼리 피를 흘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프랑스 소년병은 자진하여 포탄을 들고 독일군 탱크로 돌진하였고, 왕통을 이어받은 왕자들도 전선에 달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냉전체제 이후 그 충성과 미덕은 전설로 묻혀졌고 전쟁터에는 명예와 도덕심이 사라졌다.
전쟁에 관하여 2차대전 참전자들(우리의 경우는 한국전쟁 참전자들)과 그 이후의 세대들의 의식과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상을 경험한 노년세대들은 열혈한 애국자가 되어 국가를 분열케 하는 전쟁회의론과 평화공존론을 질타한다. 그러나 전후에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세대들은 반전론자의 입장이 되어 군비증강과 해외파병을 반대한다. 195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교육 자유화 열풍이 불어 일체의 강압과 체벌이 금지되었다. 전제정치 또한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과거의 유물로 사라졌다. 전후 경제재건으로 물자는 풍족했고 궁핍의 시절을 보낸 부모세대들은 아낌없이 자녀들에게 헌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적(公敵)의 개념이 달라져 버렸다. 냉전과 그 이후의 평화공존을 통해 우방과 적국의 경계선은 사라졌고 한 나라의 시민들 사이에도 적의 세력이 존재했다. 세계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각국은 분쟁의 현장에 병사를 파견하였지만 시민들은 무의미한 이데올로기에 자식들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항의하였다. 가장 극심한 대립은 월남전에서 나타났다. '남을 위한 전쟁'에 수십 억 달러의 전비와 수천 명의 병사가 희생되고도 결과는 비판적이었다. 그런데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과 집단은 끊이지 않았고 그에 맞추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패권주의 또한 커져만 갔다. 역사학자 슐레진저(John Richard Schlesinger:1926-2003)가 말했듯, 오늘날의 전쟁은 "공룡처럼 거대하고 유령처럼 실체가 없고 악마와 천사의 얼굴이 겹쳐져" 있다.
피카소( Pablo Picasso) 작,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951)>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보다 심각하게 전쟁의 후유증이 다가왔다. 우리는 동족끼리 죽고 죽였다. 형과 동생이 총칼을 겨누었고 연인끼리 서로 고발하였다. 한국전쟁은 민족 정체성과 도덕성에 심각한 파탄을 초래했다. 강대국의 시소게임에서 우리가 연루되어 그들이 차린 전쟁의 잔치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나기만 했다. 그 결과 아직껏 북쪽은 주체라는 가면을 쓰고 중국을 흠모하고 있고, 남쪽은 자주라는 미명으로 친미성향을 띠고 있다. 해마다 현충일이 될 때 참전세대들과 민주화세대들은 다른 구호가 쓰여진 기치를 들고 서로를 매도하며 애국심의 정통성을 따졌다. 젊은이들은 그 부모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고, 전쟁을 목격했던 노인들은 오늘날 세대들이 평화와 번영의 일상에 빠져 전쟁을 잊고 있음에 분개하였다. 한민족을 고통에 처하게 한 근본 원인은 저 멀리 있는데 그 피해자들이 서로 다투고 갈등한 양상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 61돌을 맞이하는 이즈음에 우리는 섣부른 이데올로기와 세대간 갈등으로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부역자(附逆者)'라는 논리로 동족을 매도하고 학대해 왔다. 이 부역자(Corvee)라는 말은 원래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무보수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점령기(혹은 침탈기) 때에 적대세력에게 동조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이되었다. 이 부역자의 연원은 매우 오래되었고 또한 뿌리깊다. 우리에게서 부역자는 망국민, 즉 디아스포라(Diaspora)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이들 망국민은 한편으로는 포로가 되어 변방으로 유배에 처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점령국에 회유되었다. 이들은 국가가 재건되었을 때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유독 우리 역대 정권은 이들에게 더러운 이름을 붙여 내치고 학대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내응했을 때 지도층 6두품 관리들은 그들을 천민거주지에 살게 했고, 원(元) 간섭기와 병자호란 때 끌려가서 수모를 당했던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치욕스런 이름으로 불리며 세상에서 잊혀졌다. 한국 전쟁 때 이러한 역사는 되풀이 되었다. 남북의 정권은 점령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선량한 백성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 21세기가 되어 그 상처가 아무려 할 때 이제는 친일논란으로 세상이 어지럽고, 보수단체는 빨갱이라는 말로 서슴없이 상대를 질타하고 있다. 이 어찌 기막힌 우리 민족의 원죄(原罪)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이 당했던 비극의 원인은,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역대 정권에게 있다. 부역과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동족을 단죄할 때 우리 역사는 과거의 원죄를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동족을 적으로 삼았고 민족끼리 반목했다. 이제 동족이라는 말을 가장 유의미한 최상의 가치로 두고 남과 북을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 역사는 동족상잔의 억울한 역사의 고리를 풀어 버리지 않을까 한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은 1947년 원산에서 월남해 6.25전쟁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전선 도처에서 병사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며 열 다섯 편의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한때 노벨 문학상의 대상 작품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특히 여덟 번 째 시는 북한군 병사가 묻힌 묘지에 서서 분단 현실에 대한 통한을 그려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오호, 여기 줄 지어 누워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히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삼십리면
가로막히고,
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구상 시인의 작품에 등장한 북한군 묘지는 6.25 전쟁 직후 전국에 산재해 있다가 1996년 7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번지 한 곳에 모아졌다. 이 곳에 북한군 709구와 중국군 255구 등 모두 964구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확인된 것은 2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무명인(無名人)으로 처리되어 덧없는 영혼만 무덤의 꽃으로 피어 원한을 달래고 있다. 삼가 한국전쟁 때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프랑스어 원시)
Carte postale
Je t'ecris de dessous la tente
Tandis que meurt ce jour d'ete
Ou floraison eblouissante
Dans le ciel a peine bleute
Une canonnade eclatante
Se fane avant d'avoir ete
110625 포화의 꽃송이들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