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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부문 : 수필 2편
성명 : 안 영식
연락처 :
주소 :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로 15번길 195-5
전화번호 :
직업 : 중장비 기사
프로필 :
제 16회 영남문학 시조부문 신인상
제 40회 지필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15 사람과 환경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문학상 (시 부문 등단작가 특별상)
사진 : 별도 파일 첨부
봄 소풍 그리고 보물찾기
새싹 돋는 봄철이 되면 나는 가슴 한편에 비집고 나오는 서러움이 있다.
우리 집은 낙동강 물이 한 바퀴 휘 돌아가는 도래란 곳에 있었다.
몇 학년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화창한 어느 봄날, 도래 강변에 전교생이 소풍 오는 날이 있었다.
그 날 소풍을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소를 몰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길들여 지지 않은 부룩송아지는 밭을 갈 때 앞에서 코뚜레를 잡아줘야 하기에 형님들은 힘든 다른 일을 하고 나는 항상 코뚜레 잡이를 했다.
「이랴 이랴」 하면 앞으로 가고, 「워워」 하면 서야한다.
「어뒤야, 어뒤」 하면 위 고랑으로 올라서거나 아래 고랑으로 내려서야 한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께서는 동부레기나 길들여 지지 않은 부룩송아지를 사다가 코뚜레를 하고 밭을 가는 부림소로 길들여 파는 소 장수가 본 직업이었고, 농사는 어머님과 우리 형제들의 일이었다.
삼천 평이나 되는 밭농사를 지으려 하니, 학교는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소가 길이 들어 일을 좀 할 줄 알만 하면 내다 팔아서 항상 우리 집에는 길들여 지지 않은 동부레기와 부룩송아지만 있었다.
그 날도 소풍을 못 가고 소를 몰고 밭으로 나온 것 이었다.
오전 열 시쯤 되니 바로 우리가 일하고 있는 밭둑 옆 신작로로 우리 학교 전교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소풍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숨고 싶으나 코뚜레를 잡고 있으니 숨을 수도 없었다. 소풍가는 아이들은 모두가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알록달록한 행렬이 노래를 부르며 신작로로 지나가고 있었다. 반 친구들이 “영식아!” 하고 불렀을 때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그 순간은 담임선생님과는 조금 떨어진 밭에서 같은 방향의 밭고랑을 타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께서 일부러 다른 쪽을 보셨을지 모른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밭갈이가 서툰 소가 얼마 자라지도 않은 고추뿔을 이리저리 흔들며 나대는 바람에 소 고삐 하나 제대로 못 잡는다고 아버지께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 날 오후, 밭갈이는 끝나고 강가에 싸리나무로 엮은 다래끼는 손에 들고 주루막을 짊어지고 온종일 밭갈이 하느라고 고생한 소에게 먹일 햇 풀을 뜯으러 강가에 나왔다.
오늘 소풍 와서 놀다간 자리에는 과자 봉지며 신문지 비닐봉지 나무젓가락 등 많은 쓰레기가 있었는데, 누군가 흘리고 간 사탕이 하나 있었다.
얼른 호주머니에 넣고 사방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다.
씹다가 돌에 붙여놓은 껌도 있다. 물에 헹궈서 씹어보니 달콤한 단물이 아직 남아 있다.
저 쪽 나무 밑에서 세모난 비닐봉지에 조금 남아있는 노란색의 액체를 발견했다. 입에 갖다 대보았다. 처음 느껴 본 짜릿한 맛이다.
지금 생각하니 오렌지 주스다. 그 맛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보이는 봉지마다 들어보았지만 매정하게도 빈 봉지뿐이었다.
돌 틈에 먹다 버린 비과 한 개에 개미들이 붙어 있다. 물에 몇 번 흔들어 씻어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모래가 몇 알 씹힌다.
“퉤퉤.”
모래를 뱉어내니 달짝지근한 사탕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간다. 단 맛에 빠져 소 먹이 풀을 얼마 뜯지 못하고 소여물이 끓고 나서야 금방 뜯어온 햇 풀을 넣어 끓일 수가 있었다.
그날은 야단을 맞았어도 달디 단 사탕을 먹었기에 그리 서럽지 않았다.
소풍 이튿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나는 오전에 주루막을 등에 지고 다시 어제의 소풍자리로 가 보았다.
작은 개미 때가 모여 있는 곳이면 틀림없이 먹을거리가 있었다. 먹다 버린 하얀 돌 사탕을 주워들고 강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검정고무신짝 만한 꺽지가 깜짝 놀라서 바위 속으로 얼른 숨는다.
꼭 내가 뭘 주워 먹다가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건빵과 비과도 주워 먹었다. 어제 주워 씹다가 돌에 붙여놓았던 껌을 찾아서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만의 보물찾기는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돌 밑에서는 노트 한 권이라고 적힌 쪽지가 나왔고,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연필 한 자루라고 적힌 쪽지도 발견했다. 그 작은 종잇조각이 진짜 보물찾기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강가 너럭바위에 돌단풍 꽃이 하얗게 피는 봄이면, 지난 어린 시절 소풍을 못 가고, 밭 갈고 소먹이 풀을 베러 다니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 못 가본 소풍놀이를 한 풀이라도 하듯,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소풍 가는 기분으로 40년째 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있다.
보물찾기 하듯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퉁가리 낚시
소백산 희방골 골짜기 개울가에 검붉은 철쭉이 만발 할 때면 연화봉 산철쭉은 분홍 꽃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머지않아 소백산이 분홍빛 철쭉으로 물들 것이다.
철쭉꽃이 필 때면 지난 시절 개울에서 퉁가리 낚시하던 생각이 난다.
소백산 연화봉 희방골과 도솔봉 우랑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류하는 지점, 풍기에서 남원 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이 갈라지는 곳이 있다.
이곳 지명을 「갈라지」라 부른다.
갈라지 개울에는 1급수에 사는 퉁가리(탱가리), 버들무치, 꺽지, 꾸구리, 강피래미 등 많은 물고기가 있었다.
모심기 끝나고 농촌이 조금 한가해 지면 어둑어둑 저물녘에, 낮에 개울에서 잡아 깡통에 담아 놓았던 물벌레로 갈라지 물도랑 바위틈 사이에서 퉁가리 낚시를 한다.
낚싯대도 없이 쑥을 뽑아서 가장 튼튼해 보이는 쑥 뿌리를 손톱으로 훑어내면 겉껍질은 벗겨지고 하얀 속 뿌리만 남는다.
그 하얀 속 뿌리에다 낮에 잡아 두었던 물벌레를 묶어서 바위틈에 살짝 밀어 넣으면 잠시 후 바위 속에 있던 퉁가리가 애벌레를 물고 당긴다.
그 때 세숫대야나 냉면 사발 같은 널찍한 그릇을 잽싸게 갖다 대면서 잡아당기면 낚싯바늘이 없기에 그릇 속에 ‘툭‘ 하고 떨어진다.
잡은 퉁가리는 노란 주전자에 넣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식으로 낚시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예민한 촉감과 빠른 손놀림이 필요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낚시질이다.
퉁가리는 지느러미 마다 독한 가시가 있어 잘못 하다가 쏘이기라도 하면 손가락에 붉은 피가 흐르고 잠시 후에는 퉁퉁 붓고 아린 것은 물론이고 팔까지 저리다.
얼마나 아픈지 「무당 세 명이 사흘 굿을 해야 낫는다.」는 옛말도 있다.
어떤 때는 눈치 없는 버들치가 와서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재수가 좋으면 팔뚝만한 메기가 장날 할 일 없이 우시장에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으려는 흥정꾼처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물벌레를 물고 당긴다. 그럴 때면 잽싸게 손으로 움켜잡아야 한다.
퉁가리는 가시 때문에 손질하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럴 때는 젓가락을 퉁가리 입에다가 찔러 넣는다. 서너 마리를 젓가락으로 꿰어서 양쪽을 손으로 힘껏 눌러주면 내장이 빠져나온다.
깨끗하게 손질하여 물벌레 잡을 때 잡아놓은 가재 몇 마리도 등짝을 따서, 작은 냄비에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풀고 부추와 햇마늘을 잎사귀 채로 쫑쫑 썰어 넣고, 양념으로 간을 맞추어 뽀글뽀글 끓이다가 수제비를 떠 넣고 한소끔 더 끓이고, 초피가루 솔솔 뿌려 주면 기가 막힌 퉁가리 매운탕이 된다.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이면 산골 매운탕으로는 최고의 요리다.
더러는 퇴비 자리에서 빨간 지렁이를 잡아 낚시를 할 때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퉁가리 낚시는 물벌레가 최고다.
개울 물속에 바윗돌을 뒤집으면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모래를 끈끈한 액체로 붙여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이 물벌레가 커서 잠자리가 된다.
낮에 개울에 멱 감으러 가서 깡통에 잡아 뒀다가 낚시를 한다.
낚시 바늘을 쓰기도 하지만 퉁가리는 입이 커서 낚시를 삼키기라도 하면 낚싯바늘 빼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쑥 뿌리를 사용한다.
혼자서 조용히 낚시질하다 보면 조금 떨어진 큰 바위 사이에서 훌러덩 벗고 목욕하는 광경도 더러 보는데 사람의 엉덩짝이 꼭 퉁가리 대가리를 닮았다.
온 종일 농사일을 하다가도 낚시하는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철쭉꽃이 피기 시작해야 물고기 낚시가 시작 된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정부에서 토질개량용 소석회를 농촌에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논바닥에 소석회를 뿌리자 미꾸라지들이 죽어 나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부터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개울에 소석회를 풀어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동이로 한 가득 잡아다가 냇가에서 천렵도 하곤 했다. 그 때부터 퉁가리가 차차 줄어들기 시작 하더니 논에다 논농사 대신 사과나무를 심고 골짜기마다 과수원이 생기면서 매캐한 농약들이 뿌려지고, 그 흔하던 퉁가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훼손된 자연과 사라진 물고기들의 복원이 필요하다.
희방골 붉은 강철쭉도 누군가 훔쳐가 사라지고, 연화봉 산철쭉만 남아서 해마다 소백산 철쭉제를 지내고 있다.
가난했지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던 그 시절, 철쭉 꽃 필 때면 퉁가리 낚시질이 몹시 그립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